나는 시 사본을 나누어준 뒤 그중 어느 사본이 과연 보존될까 점쳤다. 오빠가 내 유일한 조수였다. 우리는 주된 보관 장소를 계속 옮기기 위해 돌아다녔다. 무식한 밀고자가 내가 없는 사이에 뒤지더라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언어학 논문 자료들 사이에 만델슈탐의 산문 원고더미를 끼워 넣은 여행가방을 끌고 다녔다. 가끔 내가 가진 원고들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 없어지고는 있지만, 아마도 그것은 다른 이유에서일 것이다...중략... 어쨌든 이런 분실 사건들이 있은 후 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집에 두지 않았고, 다시 이런 생각으로 고단해야 했다. '어디가 무사하고 어디가 위험할까.' 어찌 되었건 나는 별로 잃어버리지 않은 채 결승점에 도달한 듯하지만, 아직 결승선이 보니는 것은 아니다. 아니가 들면서 나는 보존의 한 방법은 이제 더 이상 책하지 않는다. 56세까지 나는 시와 산문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는 매일 아무 부분이나 반복해 외워야 했고, 스스로의 생존 능력을 믿는 동안 나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p.448) 나는 1919년 5월 1일 만델슈탐과 처음 만났고, 그는 우리츠키를 죽인 데 대해 볼셰비키들이 '시체들의 제물'로 답했다고 내게 말했다. 우리는 1938년 5월 1일 헤어졌다. 두 병사가 등을 떠밀며 그를 끌고 갔다. 우리는 서로 아무 이야기도 나눌 틈이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 말을 가로막았고 우리에게 작별인사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나는 모스크바의 오빠 집에 도착해 말했다. "남편을 잡아갔어요." 오빠는 슈클롭스키 집으로 달려갔고 나는 칼리닌에 있는 타티야나 집에 남겨둔 원고 바구니를 가지러 나섰다. 내가 며칠만 지체했더라도 바구니에 든 것들은 압수되었을 것이고 나는 검은 까마귀에 태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당시 나는 자유로운 삶보다 검은 까마귀를 더 원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시는 어찌 되었을까? (p.572-573) 알리사 구고보느 우소바는 자기 남편을 타슈켄트 묘지에 묻고 그 무덤과 나란히 자기 자리도 마련한 뒤 자기 건강에 극히 해로운 기후의 중앙 아시아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녀는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을 도와주며 유형기간 동안 자신과 가깝게 지내던 전직 고위관료와 그의 가족을 카자흐스탄의 외진 유형지에서 빼내오기도 했다....중략....우소프 교수가 받은 이 방이 자신이 죽은 뒤 헛되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녀는 지상에서 모든 지상적인 일을 완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자기 묘지에도 남편 묘지에 있는 것과 같은 나무를 심고, 꽃에 물을 주도록 가난한 묘지지기에게 돈을 미리 지불한 뒤 평안하게 묘지에 잠들었다. (p.575) 전혀 모르는 러시아의 시인에 대해 읽는 것이 낯설고 지루하지 않을까 잠깐 생각도 해보았지만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난 후에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딱한 사정을 가진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비록 밀고자이지만 어쩔수 없는 사정이 설명되고 발음조차 힘든 이름들에 대한 주석에는 몇명 걸러 총살당했다는 마무리가 나온다. 사회에 의해 고통 받으면서 반평생 이상을 살면서도 이런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강인함을 느끼게 한다. 하워드 진의 책에서 읽은 한줄의 문장이 조지 오웰의 [1984]로 나를 이끌었고 때마침 내 눈에 들어온 두꺼운 책 [회상]으로 갔다가 그렇게 시작된 여정은 이제 또 다른 모험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