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일이 아침이 밝았다. 초대받았던 손님이나 그렇지 않은 손님이나 모두 떠났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집주인을 데리고 떠났다. 나와 아흐마토바는 간밤의 소동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빈 아파트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아마도 우리는 그냥 말없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눈을 붙이기 위해 눕지 않았으며, 차를 마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무엇을 위해? 어디로? 누구에게? 삶은 계속되었다. 아마도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과 닮아 있었던 것 같다. 신은 내게 이 문학적 회고록을 허락하셨지만, 당시
우리는 그 어떤 문학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p.34)
나는 거짓말을 했고, 지금도 그것이 부끄럽다. 그러나 내가 그때 진실을 말했다면, 우리에게 '보로네슈 유형'이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해야만 했었나? 거짓말을 해도 되었던 걸까? '구원받기 위한 거짓말'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 땅에 그런 곳이 있을까?
모든 곳에 허위와 위선이 있다고 우리는 어릴 적부터 배워왔다. 만약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우리의
끔찍한 시절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생 거짓말을 했다. 대학생들에게도, 직장에서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던 선량한 사람들(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에게도, 그리고 이때 그 누구도 날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일상적인 거짓말, 즉 일종의 판에 박힌 예절이었다. 나는 이런 거짓말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았지만, 부하린에게 한 거짓말은 냉정한 계산에서 나온 고의적인 거짓말이었다. 유일한 버팀목을 놓칠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것은 종류가 다른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내가 과연 그때 사실대로 말할 수 있었을까? (p.51)
다가오는 시대의 울려 퍼지는 위업을 위해,
사람들의 높은 종족을 위해
나는 아버지들이 벌인 잔치의 술잔을 빼앗겼다.
즐거움과 자기 명예도.
늑대를 쫓는 사냥개 같은 시대가 내 어깨 위로 달려들지만,
내게는 늑대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
차라리 털모자처럼 나를
시베리아 벌판의 따뜻한 털외투 소매에 끼워 넣으라.
비겁자나 허약한 더러운 자,
바퀴에 낀 피묻은 뼈를 보지 않도록
푸른 여우털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눈앞에서 밤새도록 빛나도록
예니세이 강이 흐르고,
소나무가 별까지 닿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
왜냐하면 내게는 늑대의 피가 흐르지 않으며
대등한 자만이 나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십 만델슈탐 [다가오는 시대의 울려 퍼지는 위업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