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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시대 - 문보영 에세이 ㅣ 매일과 영원 1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평점 :
도서관에 앉아 앞부분을 좀 읽다가 다른 책들을 빌려왔는데, 방 그림이랑 일기 앞부분이 재미있을 것 같아 계속 생각나다가 한참 지나 다시 빌리게 되었다. 웃긴 책인 줄 알았는데, 뒤로 갈수록 웃기지 않았고, 일상 에세이인줄 알았는데, 뒤로 갈수록 시인의 꿈과 망상이 많이 나왔다.
나는 이십년쯤 매 년 일기장을 샀지만, 일기든 플래너든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었다. 2022년의 다이어리들을 잔뜩 사두고,이제나 저제나 2022년을 기다리는 중에 좋아하는 작가님이 10월 26일부터 1년 다 쓸지도 모르는데, 그냥 2022년 10월 26일부터 일기를 쓰겠다고 한 것을 보고, 오, 좋은 생각! 하고,10월 26일부터 내년의 나에게 일기를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쓰고 있고, 비결은 아침 일기와 저녁 일기를 쓰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모닝페이지와 같은 느낌으로 저녁의 나에게, 그리고, 내년 오늘의 나에게 일기를 보낸다.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기운 남아 있으면 저녁 일기를 쓰기도 하고, 기운 없으면 안 쓰기도 하고. 길게 쓸 생각 안 하고, 한 줄이라도 쓰자 하고 앉으면 한 줄 보다는 더 쓴다. 만년필로 쓰기 때문에 잉크가 마를 동안 그대로 펴고 하루를 셧다운 한다.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면 펼쳐진 일기를 한 장 넘겨 그 날의 아침 일기를 쓴다. 아무리 골골대더라도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번은 일기 쓸 기운 정도는 끌어낼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보통은 아침과 저녁 두 번 다 꾸준히 쓰고 있다. 내년에도 아침과 저녁에 쓴다면, 한 페이지에 2년간의 아침 저녁 일기가 있는거다. 내년은 아직 안 와서 모르겠지만, 아침 일기와 저녁 일기만 써도, 아,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여! 하게 된다.
아침에 이런거 저런거 해야지. 써 두었는데, 일기 쓰고 고양이 화장실 치우다가 허리를 삔다거나. 그렇게 허리를 삐끗하고, 한 주일동안 허리 보신하고, 남은 인생 허리를 위해 살겠다 결심하게 될 줄 모르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인 아침의 일기를 보면서 저녁의 일기를 쓰는 마음. 아침에 이런거 저런거 쓸 때에는 전혀 몰랐지. 오후에 지진이 나서, 건물 밖으로 튀어나오게 될 줄 알았겠냐고. 그런 뭐랄까, 한 치 앞을 모르는 거를 아침 저녁으로 느끼게 되니, 인생관이 조금 바뀌는 것 같다. 아니, 원래도 현재를 잡아라. 카르페 디엠의 인생관이었는데, 더욱 강화되었다고 해야 하나.
이 책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나는 아침형 인간과 새벽형 인간을 오가는데, 저자는 밤형 인간이다. 새벽 5시에서 6시경 잠들고 오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새벽 시간에 나만 깨어 있는 것 같은 그 시간이 좋은 것 뭔지 안다. 나도 그렇게 살아 봤으니깐. 지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거 제일 좋아. 11시 전에 자서 일곱시간 이상 자는 것이 매일의 목표인 사람이 되었지만, 내가 밤의 시간들에 깨어 있었던 것은 전생 같고, 남의 이야기 같다. 저자는 밤동안 방을 탈출하거나, 방에 갇혀있거나, 아무튼, 방 이야기와 방 그림이 많이 나온다. 도서관에 매일 가고, 하루에 두 번 가는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도서관 다니는 작가들 이야기를 많이 보는데, 나도 도서관에 출몰하는 작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알은 체 하지는 않겠습니다. 묵혀 두었던 옛날 시들을 읽고, 거친 재능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이야기도 좋았다.
" 나에게 나다운 것, 때 묻지 않아서 오히려 잘 쓰던 어린아이와 같은 시절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 처음 썼던 나의 시들이 너무 구려서 기뻤다. 깔끔하게 시작할 수 있어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거친 재능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애당초 그런게 있었던 적이 없으므로. 나는 사실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
나는 요즘 아주 조금씩 글쓰기가 좋아지고,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나자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자신을 던진 사람들의 글이 조금 더 좋아졌다. 이 책은 '매일과 영원' 시리즈 첫번째 책으로 두 번째 책은 강지혜 시인의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 라는 책이다. 이어지는 책들도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