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카테고리는 나가오카 겐메이의 카테고리지만, 디자이너, 일본 디자이너, 뭐 이런 카테고리라 치자. 고 하라 켄야도 이 카테고리에 넣어 보도록 한다. 오늘 샤갈전 보고 3층 아트샵 앞 벤치에 앉아 읽다가 진짜 미친듯이 웃었던 장면 하나 -  

'어려운 작업' 이란 꼭지에 나오는 글이다. 이 책의 서문을 쓰기도 한 작가 하라다 무네노리..  

오.. 놀랐다. 혹시나 해서 검색해보니, 번역본도 있다.
 

 

 

 

 여튼, 그 하라다 무네노리의 책 표지 작업을 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하는데,

이 하라다 무네노리라는 작가는 하라 켄야와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였다고 한다. 신사적인 교우관계를 떠올리겠지만, 아니고, '고교시절부터 어울려온 악우' 라고.   

악우라는 말은 들었을법 하지만, 처음 듣지 싶다. 애정을 담아 절친을 '악우'라고 표현하는 건 좀 재미있다.
내가 지금 나와 친한 친구들에게 '나를 만난게 너의 악연'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우아하잖아 -  

여튼, 이 친구의 작품 중 <딱한 사람> 이라는 작품의 표지를 의뢰 받았는데, 그 어려웠던 작업에 대한 이야기.  

'딱한 사람'이란 자기 아버지를 가리키는 듯하다. 아무래도 그 친구의 소설은 사소설적인 것이 많아서 곤혹스럽다.
친한 친구가 '아버지'에 대해서 쓴 '사소설'을 읽고 표지를 궁리하는 것처럼 신경 쓰이는 일도 없다. 작품 자체는 재미있지만 아무래도 이 작품 앞에서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림 없이 제목만 넣는 표지도 언뜻 머리를 스쳤지만 그래서는 조금 살풍경하다.
'딱하다' 라는 말에서는 체념이란 연못 속에서도 '차기둥'(녹차를 탈 때 찻잔 한가운데 찻잎들이 막대기처럼 모이며 일어나는 현상으로 흔히 길조로 여긴다) 이 서듯이 따뜻한 무언가가 떠오르는 느낌을 받지 않는가.
그런 느낌을 전하려면 역시 표지에 뭔가 '딱한 것' 을 집어넣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하라다와 다른 친구까지 가세하여 함께 차를 마시며 '딱한 것'으로 무엇이 있는지를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다.
이를테면 잘못 쪼갠 나무젓가락. 과연 꽤 딱하다. 그러나 신경 예민한 사람한테는 상당히 거스를지도 모른다. 오히려 잘못 쪼개진 젓가락을 힘겹게 쥐고 우동을 먹는 사람이 더 '딱하다'는 느낌에 가깝지 않을까?
혹은 너덜너덜한 와이셔츠를 걸어 놓은 옷걸이는 어떨까. 아니,
어긋난 빨래집게도 꽤 근사하겠다.

논쟁이 달아올랐다.

그중에서도 제일 딱하다는 느낌이 든 것이 소스와 간장 따위를 담은 작은 병들이었다. 대학 구내식당이나 대중식당의 식탁 위에 있는 손발 없는 펭귄처럼 생긴 그것 말이다. 너무 딱해서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중식당의 간장병 일러스트레이션이 그려진 <딱한 사람>이라는 소설책.

 


나는 이 안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라며 저자가 반대했다. 결국 아버지가 자주 썼다는 모자 그림으로 낙착되었다. 너무 무난한 결론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 나름의 배려를 거스를 수도 없지 않은가.  

  

 

 

 

하라 켄야 <포스터를 훔쳐라 +3 > 中 

아.. 진짜 딱한 것들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렇게 눈물 쏙 빼며 웃는건 좀 미안하지만, 진짜 팔 다리 없는 펭귄 같은 간장병을 떠올리며 빵 터졌다. 친구 불러서 읽어주며 또 둘이서 눈물 찔끔 흘리며 웃었다. ..  

그렇게 완성된 시안이 아래의 책이다.

 

 

 

 

1995년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았고, 거기에 2010년의 글을 3개 덧붙여서 <포스터를 훔쳐라> 에서 <포스터를 훔쳐라 +3> 이 되었다. 이런 단순쟁이들 같으니라구. ㅎ  여튼, 거기에 대한 의미는 멋지게 포장해 두었으니, 저자 서문 보시면 되고.

1995년, 15년도 더 전의 디자인쟁이 이야기가 이렇게 2011년에도 재미있다는 건, 전혀 옛스럽지 않다는 것은 좀 놀랍다.
나가오카 겐메이가 주창하는 longlife design.
레트로라는 '트렌드'와 구분되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오래오래 살아 남는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것들. 오래될수록 더 멋스러운 것들. 빈티지나 앤틱과도 구별되는 실용적 의미, 환경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아오던 것과는 약간 노선을 달리하지 싶다.  

안그라픽스라는 출판사에 <포스터를 훔쳐라 +3> 라는 내용을 알 수 없는 제목에 무슨 일본 디자이너라고 하니
'디자인' 이야기인가보다. 하는데, 디자인 이야기가 맞기는 맞는데, 하라 켄야의 눈으로 보고, 경험하고, 지향하는 디자인이라는 것이 '인간' 이고, '일상 '이다. 거기에 더해 '일상의 아름다움' 이다.  

그러다보니, 이 책은 정말 맛깔나게 재미있고, 예쁘게 읽히고 있는데,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하라켄야가, 디자인도 잘 하는데, 글도 이렇게 잘 쓴다는 건 조금 불공평하게 느껴진다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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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1-09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불공평해요. 그래도 패션 감각은 뭣에 쓸래도 찾아 볼 수 없는 아저씨 라고 고백하는 대목이 있어서 쫌 다행이다 싶었다는.. ㅋㅋ

moonnight 2011-01-0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다리없는 펭귄이라니. ^^;
재미있네요. 하이드님 아니었으면 존재조차 몰랐을 책이에요. 읽어봐야겠어요. 불끈.

무해한모리군 2011-01-10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글도 이렇게 맛깔나게 쓰는군요!

하이드 2011-01-10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 외로 글을 너무 재미나게 잘 써서 놀랐어요. 재미도 있고, 유익하고, 뒷맛도 좋아요! ^^

달랑무 2011-05-1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디자인하는 사람인듯. 디자인서적 처음으로 사봤는데.. 이분 책이라서 참 다행이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