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책을 대했을때 독자의 자세
결국 재미없을랑말랑했던 <바람과 그림자의 책>은 아직도 그 때 읽었던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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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책을 대하는 독자의 자세의 결론은 '읽지 않는다' 혹은 잘 말해주어야 '영원히 읽는 중' 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질문 '재미없는 추리소설을 대했을때 매니아의 자세' 에 대한 답변은 무엇일까.
나 자신을 추리소설 매니아.라고 거창하게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추리'의 요소를 지닌 책들을 편애하는 편인 것은 분명하다. 남들이 알아주어야만 매니아가 되는 것은 아니니깐. 나는 내 자신을 일단은 '추리소설 매니아'로 부르도록 하겠다.
좋은 책, 재미있는 책만 읽을 수 없는건, 첫 한두장에 책을 판단한다는 것은 첫인상에 사람을 판단하는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독자를 골리려고 일부러 재미없는 시작을 만드는 작가가 있을리 없지만, 독자의 참을성을 요하는 첫부분(이건 몇장일때도 있고, 때로는 책의 반토막가량일때도 있다.)을 쓰는 저자도 있고, 이 경우에 그 지루한 첫부분이 무언가 알기 힘든 시너지효과를 주어 더 폭발적인 결말을 끌어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플러스, 완전히 뿅가는 첫페이지에 독자를 홀리고, 지지부진한 중간단계에 개똥같은 결말을 끌어내는 작가들도 있다.
내가 악담을 퍼붓는 책들의 대부분은 '추리소설'이다. 내가 특별히 추리소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이래뵈도 '추리소설 매니아'다.) 내가 추리소설을 대하는 자세때문이라는것을 문득 깨달았다.
지난번처럼 번호를 매길필요도 없다. '재미없는 추리소설을 대했을때 매니아의 자세'는 꿋꿋이 읽어낸다. 이다.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장르 소설에 대한 예의이자 추리소설 매니아로서의 자부심이자, 겪어내야할 고난이다.
(그러고보니 '바람과 그림자의 책'도 미스테리;; 다 읽을꺼다!)
대신 마지막 한 장을 덮을때까지도 도저히 칭찬해줄 구석이라곤 찾을 수가 없을때는 질펀하게 욕해주는거다.
이 부분에서 몇몇 장르문학 독자와 나와의 의견차가 있는데, '저자에 대한 예의'는 개뿔이라고 생각하니 논외고,
'가뜩이나 장르시장이 어려운데, 그렇게까지 할껀 뭐냐' 고 하는 독자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책'을 이 세상에 내 놓은 모든 저자와 번역가와 편집자와 출판사와 북디자이너와 등등의 출판관련하시는 분들의 밥벌이에 보태준 것 있는 소비자로서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감자칩시장이 어렵지만, 맛 없는 감자칩을 돈 주고 계속 사 먹을만큼 나는 관대하지 않다. 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튼, 나로 하여금 또 이렇게 사색적인(?) 페이퍼를 쓰게 만드신 주인공책은
아야츠지 유키토의 <암흑관의 살인>이다.
한 280페이지 정도 읽을때까지는 짜증나고, 속상하고, 괴로웠다. (이건 정말로 내 마음속을 스치고간 감정들이다.)
이 책을 3권이나 샀을때는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몇번이나 고민하다 산 거였고( 산지 한 1년된듯;;)
비록 읽을 엄두는 이제야 냈지만, 머드그린칼러의 이 책이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 만으로도 아주 뿌듯했다.
근데, 280페이지 정도 읽고 나니 '추리' 장르에 대한 나의 애정에서 온 방어기제인지도 모르겠는데,
긍정적인 생각이 마구 들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에 대해 빅팬이 아니라는 건 지난번에도 말한 적 있다.
밀실트릭이라던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류의 이야기에 그닥 매력을 못 느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술 넘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자칭 추리소설 매니아로서 관시리즈 정도는 읽어줘야지 하는 뿌듯함도 있었고.
십각관과 시계관이 한권짜리로 빠르게 단숨에 읽히는 소설이어서
저자가 거기까지가 1부라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패턴이 유지되기를 바랬나보다.
'시점'이라는 녀석이 마구 돌아다니고, '죽음'과 '기억상실'코드가 '난무'하는 이야기
게다가 어짜피 또 집구석이 움직이겠지. 하는 공공연한 트릭까지 다시한번 말하지만 짜증나고, 속상하고, 괴로웠는데,
전작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이 책을 먼저 읽는다고 생각하면,
나름대로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건 모두가 동의하는 생각은 아니겠지만, 난 쓸데없이 긴 소설에도 책꽂이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 외에 그 길이의 미덕 ㅡㅜ 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시점에서 이 책이 재미있어졌는지 페이퍼 쓰면서 그새 까먹었는데 orz
반복의 묘미? 스님출신의 추리작가 탐정 등장에 대한 기대? 코난의 기억상실?
계속되는 으스스한 분위기? 호수 가운데 거인의 관처럼 자리잡고 있는 암흑관?
에도가와 란포와 요코미조 세이지가 연상되는 기괴한 등장인물들? (그러나 아야츠지 유키토가 란포나 세이지처럼 기괴하려면 한참 멀긴 했지만, 나는 워낙 기괴코드를 좋아한다.사실, 나카무라 세이지 하나만 놓고 봐도 아야츠지 유키토가 '괴기'한 캐릭터 창조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분명하고.)
무튼, 이백팔십몇페이지 정도부터 책은 재미있어졌고,
나의 짜증 속에 구상된 이 페이퍼는 짜증과 함께 뒤로하고,
이제 열심히 책을 읽을 생각이다.
사족 : 우리나라에 '추리매니아' 라고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몇명일까??
나 왠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