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인플레이션....기름값 고공행진,,,....힘들겠다~~이럴땐 금을 사야되나???
대학교 1학년, 기말고사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왔다. 벌어 두었던 돈은 이제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방학 중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는데, 처음 한 것이 바닷가에서 폭죽을 파는 것이었다. 폭죽 하나에 천원했는데, 내가 직접 폭죽을 대량으로 살 경우 하나에 150원 정도면 되었다. 20만원을 투자했다. 지금부터 25년 전이니 지금으로 보면 약40만원 이상은 될 듯하다. 폭죽은 엄청난 양이었다. 매일 베낭에 폭죽을 50여 개를 담아 바닷가에서 팔았지만, 약10일 동안 10만원 정도밖에 팔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폭죽을 파는 것이 불법이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바닷가에 온 연인들로 보이는 사람에게 약 20발 정도를 5,000원에 팔고 한 두 시간 숨어있다가 다시 5,000원 정도에 파면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순찰 도는 의경을 피해 도망치 듯 팔고 빠지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그러던 사이에 모랫 사장 여기저기 널 부러진 빈 소주병이 보였다. 숨어서 쉬는 사이에 바닷가를 오가며 빈 병을 주웠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었다. 매일 약 50병 정도의 빈 소주병을 주웠다. 당시 소주병 한 개는 100원이었으니, 매일 5,000원의 이문을 보았다. 처음엔 빈 병을 집 앞 가게에 가져다 주었는데, 소주병으로 한 병에 50원에 계산해 주었다. 물론 맥주병은 2배의 가격인 100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빈 병을 소주 회사에 가져다 주면, 더 이윤이 많이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바닷가로 가는 길에 소주 판매처가 보였다. 낼름 들어가니, 한 병에 100원씩 계산해 주었다. 이윤이 2배가 되었다. 이제 법에 저촉되는 폭 죽 판매는 10만 원의 손해를 보고 접었다. 사실 주변에서 몰래 폭 죽을 판매하는 아주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 번은 내가 너무 많은 양을 팔아서 마구 폭죽을 쏘는 연인을 본 아주머니께서 내게 다가와 한 개 천 원 이하로는 팔지 말자고 했다. 나는 모른 척 그냥 무시하면서 집으로 왔지만, 너무 부끄러웠다. 나머지 폭죽은 다음 해, 엄마가 처리했다. 그렇게 약 보름을 지냈다.
어느 날, 친구가 전화해 뭐하냐고 말했다. 두 달만 신문 배달 해 달라는 이야기를 했다. 난 얼마냐고 했더니, 아침마다 250부를 2~3시간 정도 배달하면, 25만 원 준다고 했다. 아파트가 있는 곳이니 쉽게 배달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오토바이를 못 탔지만, 배우면서 아침마다 신문을 배달했다. 그렇게 나의 첫 여름방학 아르바이트는 폭 죽 판매로 10만 원 손실에, 빈 소주, 맥주병을 팔아 20만원을 벌었고, 한 달 반의 신문배달로 42만 원을 벌었다. 그래서 50만원 정도의 돈을 벌었는데, 당시 내 등록금은 90만 원이었다. 그리고 자취방 월세로 한 달에 15만 원을 냈다......한 학기, 4달 동안 필요한 비용은 등록금 90만 원, 월세 60만 원, 한 달 식비 20만 원(주로 아침은 학생회관에서 가장 싼 백반 900원짜리를 먹고, 점심과 저녁을 기숙사에서 2,300원 짜리를 주로 먹었다. 술은 먹지 않았다.), 용돈 책값으로 한 달에 10만 원을 사용했다. 결국 한 학기에 최소 450만 원이 있어야 했다. 등록금은 절반은 장학금, 나머지 절반은 학자금 대여로 해결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에게 300만 원은 도와 달라고 해야 했다. 나중에 모두 갚아 주겠다고 하면서 도와 달라고 했다. 그때 시장에서 운영하던 엄마의 가게는 손님이 급감하고 있었다. 시장 입구에 큰 마트가 생긴 이후로 나날이 손님이 급감했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지만, 엄마는 어떻게 든 돈을 마련해 주었다.
다시 한 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이 되었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마치고, 다시 어떻게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앞이 안 보이는 안개 속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