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러 갑니다
가쿠타 미쓰요 지음, 송현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살의를 분출하고픈 욕망이 여러 편의 소설에서 고개를 치든다. 남자는 배신을 당한 후 스스로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누구보다도 성실히 살았다. 그는 배신의 아픔을 이겨냈을까.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그는 미움이 거대한 탑처럼 쌓여 병들어간다. 미움은 차곡차곡 쌓여가는 동안에도 그는 웃고 떠들 수 있지만, 가슴 속에서 그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는다.

작가는 갈고 닦은 복수의 칼날을 보여준다. 날은 반짝일 만큼 예리해졌다. 금세라도 사람의 가슴팎을 밀고 들어갈 수 있겠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미래의 문을 닫고 밀폐된 방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또 갈아대는 사람들. 그들의 일상은 미움과 미움이 겹치고 겹쳐 한없이 얼룩져 있지만, 그렇다고 칼을 뽑아 휘두르지 않는다. 미움이 칼을 부르고, 칼이 피를 부르는 일이 없다. 일상은 그저 흐르고 흐를 뿐이다. 오히려 복수의 칼을 든 채로 멍하니 미움의 탑을 올려다본다. 내가 쌓은 탑이야, 작가가 중얼거리는 듯했다. 아니, 내가 흘리는 혼잣말인 듯해서 깜짝 놀랐다.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단편들은 뭔가 미진한 결말로 마침표를 찍은 듯 시원치 않았다. 아니, 마침표 없이 문을 열어두고 나간 듯한 결말들이다. 작가는 결정적인 마지막 행동 또는 마지막 실마리를 풀어내지 않고 손을 흔들며 나가버렸다.(어쩌면 작가가 추리기법을 소설에서 살리지 못하거나 혹은 살릴 마음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복수의 칼을 쥐고 있다면 어떤 마지막 행동을 취할까. 작가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을까. 복수의 칼을 사람의 가슴팎이 아니라 미움의 탑에 꽂기를 바라면서.

*

작가의 표현이 무척 섬세하다. 미움과 살의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쌓여가는지 손으로 만져지는 듯했다. 미움이 쌓이는 과정은, 먼지 같이 흩날리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돌돌 뭉쳐내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혹 바다 같은 게 아닐까. 그 위에 뗏목이 덜렁거리며 떠다니다가 시간의 흐름에 흔들려 떠내려오는 것. 뗏목 위에는 틈틈이 건져올리는 미움의 파편들이 있다. 쌓이고 쌓여 뗏목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지는 순간. 작가가 잡아내는 건 뗏목이 떠내려오다가 가라앉기 바로 직전의 순간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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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01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제목이 섬뜩하네요. ^^ 친절한 금자씨가 떠올라요. ^^
미움의 파편이 쌓이고 싸여 가라앉기 직전의 순간에 있는 뗏목, 그걸 포착했다는
비유가 참 신선합니다.^^ 3월의 첫날이에요. 즐거운하루 보내세요..

hanicare 2007-03-0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이는 학교 들어갔겠네요. 우리 집 아이보다 1살이 많았던가.
내가 암만 게으름을 피워도 세월은 가는군요. 지구는 자꾸 더워진다는데 나는 갈수록 몸도 맘도 차가와집니다. 그런 와중에 또 봄이네요. 알라딘에서 맞는 봄도 손가락
몇 개가 필요하다니.

조선인 2007-03-02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는 내년에 학교에 갑니다. 유치원에 보내는 것도 불안초조인데, 학교 보내기는 또 어쩔런지요.

chaire 2007-03-02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단편 모음집이었군요. 제목이 독해서 언제 한번 들춰봐야지 싶었어요. 미움의 탑이라니, 뭐, 그거 안 쌓고 살아가는 인간, 있겠습니까..^^
근데, 어머 하니언니! 새로 바뀐 그림 보면서, 와 잘 계시구나 했었어요.^^

2007-03-02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7-03-02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제목은 섬뜩하지만, 안 그래요. 오히려 미움이 쌓이지만 분출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인걸요. 3월이네요, 벌써. 어휴, 시간이 유수 같아라. 혜경님도 정말 봄다운 3월을 보내시길요. ^^

하니케어님, 이안이 서영보다 한 살 더 많을 거예요. 여전히 똑똑하게 잘 자라고 있죠? ^^ 몸도 마음도 차가워진다고 하시지만, 제가 느끼는 하니케어님은 이성적일 뿐인걸요. 알라딘에서 이렇게 가끔, 바뀐 그림으로 반가워할 수 있는 지인도 있고, 가끔은 이곳, 썩 괜찮은 곳이란 생각이 들어요. ^^

조선인님, 어휴 그러게요, 엄청 신경이 쓰여요. 근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늘 제가 더 불안초조했던 듯해요. 정작 아이들은 꽤 적응을 잘하던걸요. 마로, 잘해나갈 거예요. 참 예쁘게 많이 컸어요. ^^

카이레님, 하하 이 그림 너무 재밌는 거 있죠. 서재에 찾아가서 다시 한번 보고 슬그머니 웃다가 왔어요. 전 저 길다란 머리를 묶어주고 싶은데요. 아, 그러려면 옷도 필요하겠구나~ 저 빨간 머리, 왜 뜬금없이 부러운지. ^^

속삭인 님, 저도 일본소설 끌리지 않아서 일부러 읽지 않다가 이번에 몇 권 읽었어요. 일부러 유명세 있는 것 빼놓고요. 무슨 심술인지. ^^ 그래요, 미움을 가만히 들춰보면 그 안에 두려움이 있는지도 몰라요. 겉으로 드러난 모양새는 미움이지만, 속내는 다른 경우가 많잖아요.
공부, 늘 성큼성큼 달려가기를 바랄게요. 좀 느림보 같다 싶음, 저한테 하소연이라도 하세요. ^^

icaru 2007-03-04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홋... 제목이 아주 노골적으로다가...
작가가 갈고 닦은 복수의 칼날의 반짝임에 눈이 부실 것도 같은 혹 그런 느낌도 있나요? .. 살면서 복수하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사람과 경험이 있었나 떠올려 봤어요. 헤- 사회 초년 시절에 정말 싫고, 밉고 그렇게 속으로만(면전에서는 제가 기어들어갔고요 ㅎㅎ) 용납을 못 했던 상사가 있었는데... 신기한 것은요. 지금의 그 나이인 어린 친구들은 대개 그 때의 제 경우처럼 그렇게 미운 상사가 있더라고요. 제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잘 이해가 가는게... 그 친구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로 봐서...
확실히 그 때의 제가 어렸구나!
에구구... 또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그나저나... 이 서재에 오면 하니케어 님의 자취를 운좋게(??) 발견할 수 있어 좋아요!!

2007-03-04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7-03-05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저도 그래요. 그땐 정말 이해 못할 사람들이 더러 있었죠. 지금은 조금 이해도 가고(그렇다고 동감은 할 수 없고) 애처롭게도(!) 느껴지니 그게 참 신기해요.
저도 오랜만에 하니케어님 만나서 참 좋았어요. 가끔씩 이렇게 만나면 안 될까 싶은데. 안 그래요, 여러분? ^^

어휴, 속삭인 님, 저도 그 비슷한 증세 아는데. ^^ 저도 어깨가 무거우면 좀처럼 두꺼운 책을 못 읽겠더라고요. 이 책, 얇아요. 큭큭.
그런데 오늘 눈발이 날리데요. 그럴 거면 겨우내 간간이 그랬음 좋잖아요. 괜히 한 군데 폭발하듯 내리지 말고 말이죠. 이제 봄이라고 괜히 핑계대고 마음 다잡으려는데 생뚱맞게 눈발이라니. 오늘 추웠죠? 건강 잘 챙기세요,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