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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한국사 : 근대편 ㅣ 쟁점 한국사
이기훈 외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쟁점한국사, 근대편 3
ㅡ3ᆞ1운동, 서로 다른 세 개의 기억ㅡ
교과서에서 배우는 3ᆞ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전민족항쟁, 민족자결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등이다. 그것은 국가, 국민의 관점에서 바라본 성격이다.
이 글에서는 3ᆞ1운동의 또 다른 측면을 3ᆞ1운동에 참가했던 세 사람의 삶을 통해 복원해보고자 한다.
주인공 세 사람은 양주흡(일본에서 유학 중인 학생), 장병준(유학을 다녀온 인텔리 청년), 이덕순(경기도 안성의 농민)이다.
1. 양주흡 : 22세, 도쿄 유학생
도쿄 유학생들이 공식적으로 일본정부에 조선 독립의 문제를 제기하고 각국 대사관에 가서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으나 모임은 해산되었고 주최 측은 경시청에 소환되었으며, 집회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양주흡이 보기에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고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인맥이 넓지 못했다.
고종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도쿄에도 전해져 양주흡은 미국 유학 계획을 취소하고 조선으로 귀국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매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3월1일 오후 4시 50분 경성역에 도착했던 그는 격렬한 만세 시위 대열이 이미 경성 시내를 떠났다. 3월 내내 만세 시위에 대한 정보를 찾아다녔으나 늘 한 발 늦거나 실패로 끝났다. 더이상 울분을 견딜 수 없던 차에 3월 25일 밤11시나 되어서야 경복궁 부근에서 소수의 사람들과 만세를 부를 수 있었다.
1919년 4월 14일 경성. 양주흡이 하숙집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난 후 메이지 대학교에 복학했다. 졸업 후 1924년 조선노동총동맹 발기회에 함경남도 이원군 창흥노동친목회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고, 향리에 영신서당이라는 강습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2. 장병준 : 27세, 니혼 대학교 유학 포기, 귀국
3월1일에 장병준의 기록은 없지만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투쟁 한가운데 있었을 것이며 3월 5일 무렵까지도 서울에서 투쟁을 준비했을 것이다.
고향에 내려온 장병준은 장산도 주민 수십 명을 대리 마을 사정에 모아놓고 연설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소식을 전하며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참여자는 수십여 명에 불과했지만, 주변의 다른 지역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이라 파급력이 컸다. 이날 오후 2시까지 만세 시위 후 김극태, 고제빈 등과 함께 바로 섬을 떠났다.
이 날이 3월 18일로 광주에서 3월 10에 일어난 것이나 영암, 목포에서 4월에 시위가 일어났던 것과 비교하면 3ᆞ1운동이 서울과 평양 등 대도시에서 먼저 일어나고 경부선 등 간선 철도를 따라 순차적으로 확산되었다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한다.
장병준의 수배 인상착위는 실제 모습과 완전히 달랐는데, 장산도 주민들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경찰에게 거짓 정보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3. 이덕순 : 41세,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
아들 혼사 준비로 경성에 왔다가 3ᆞ1운동 소문을 들었다. 그는 이미 장가갈 아들까지 둔 나이지만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원곡의 3ᆞ1운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내가 조선 민족이다‘라는 자각이 그를 움직였다.
4월 1일, 이덕순과 원곡면 사람들에게는 운명의 날이었다. 이 날이 음력 3월 1일이라 작심하고 크게 일을 벌이기로 했던 것이다. 이덕순과 최은식, 이근수는 집집마다 다니며 주민들을 모아 1000여 명이 등불과 횃불을 들고 모였다. 이덕순은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면장을 꾸짖고 만세를 부르게 했다. 면장을 앞세워 양성면으로 출발했고 군중은 뜻밖에 원군을 만났다. 삽시간에 2000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양성주재소에 불을 질렀다. 주재소를 불태운 이들은 양성우편국으로 가 전신주를 넘어뜨려 전보와 전화통을 불통시켰고, 일장기를 불태웠다. 주변 일본인 잡화상과 대금업자의 집도 습격했다.
다음 날도 사람들이 모여 원곡면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경부선 철도의 침목을 파괴하다 일본 수비대 소식으로 모두 흩어졌다.
4월 2일 이후 아예 이름을 바꾸고 사라진 이덕순은 10년도 더 지난1931년에 체포되었지만 계속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해 1년 만에 특사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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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세 사람을 통해 본 3ᆞ1운동
ᆞ이들이 변방과 주변, 전통적 공동체에서 근대적 민족과 민중의 세계로 들어간 계기
ᆞ농민투쟁의 마지막 단계라는 성격 포함
ᆞ오늘날 대한민국 정부의 법적 기원
ᆞ3ᆞ1운동이 공동체 단위의 저항
ᆞ‘민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의식 점차 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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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과 비교
오늘날의 저항이 다양한 주체들의 저마다 다른 목소리와 희망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다양성이 한곳으로 수렴하는 것도 알고 있다.
3ᆞ1운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 깊이와 넓이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역사는 더 공부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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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을 마치며
이 책은 2016년을 촛불의 해라고 할만큼 촛불시위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 3ᆞ1운동도 촛불시위와 비교가 되는데, 예전의 시위는 학생운동에서 특정집단으로 옮겨졌다면 2016년도 촛불은 시민들의 촛불이었다. 3ᆞ1운동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다른 이유로 모였고, 공동체적 성격을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마치 3ᆞ1운동과 닮아있고, 이것이 민족성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