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간자키             


  나는 무엇이든지 잘 버린다. 필요치 않은 물건을 방치할 바에야 새 주인을 만나게 해주는 게 낫다는 것이 버리는 자로서의 변명이다. 떠난 물건은 새 주인에게 사랑받아 좋고, 보내는 자는 홀가분해서 좋고, 유행 지난 옷을 재활용 박스에 넣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 창고에서 자리만 차지하던 오래된 그릇을 처분했을 때는 그릇 무게만큼이나 마음이 가벼워진다.  베란다 한 쪽에 방치해둔 접이용 식탁의자를 가지겠다는 이웃에게는 고마운 나머지 덤으로 화분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이상한 것은 버리고, 주어도 집안에는 금세 버릴 물건이 쌓인다는 것이다. 살림의 노하우가 생겨 웬만한 것은 사지 않는데도 버릴 물건은 복병처럼 숨었다가 불쑥 튀어나온다.  살아 있다는 증거로 버리고 ,쌓고, 다시 버리는 일을 반복하도록 그분(?)은 인간에게 형벌을 내렸나보다.  이렇게 버리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물 건 몇 개가 있기는 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백과사전과 엘피 디스크이다.

 

  구입한 지 십 오년 정도 되는 백과사전은 활용도 면에서는 빵점이다.  그 당시 받은 상금 백만원으로  별 고민 없이 샀건만, 몇 년 새 인터넷 환경이 종이 백과사전을 이렇게 무참하게 밀어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늘어만 가는 책들 사이에 부피만 크고 유행지난 액세서리처럼 끼어있는 백과사전이 부담스러워, 아이들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겠다고 했다. 매우 고마워하면서 담당자가 한 말은 직접 배달까지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한 때는 내 분신같았던 책인데 왠지 푸대접받는 기분이라 포기하고 말았다.

 

  언젠가는 이 책도 새 주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책을 진정으로 소우하는 방법은 벗들에게 주어 닳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말을 실천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 유련이 책에다 도장을 찍어 자신의 소유임을 알리려는 것을 보고 이런 멋진 충고를 한 것이 내 맘에 쏙 든다. 책의 효용은 읽힌 다는 것.  따라서 소중한 책 한 권을 마르고 닳을 때까지 새 주인을 만나게 해주는 것은 아주 권장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엘피 디스크. 취미 삼아 뭐 버릴 게 없나 하고 온 집안을 뒤지는데 엘피판들이 쏟아진다. 표지 자켓 안에서 크고, 둥글고, 검은 둥근 판이 나오자 아들 녀석이 신기해한다. 엄마, 이게  뭐예요?  이건 분명 상식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 차이임에 분명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나는 턴테이블에다 엘피판을 올려 음악을 들었다. 그걸 기억해 낼 리 없는 아이에게 턴테이블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싶은데 버리기 좋아하는 내게 있을리 만무.

 

  몇 년 전, 두 번째 이사를 하면서 멀쩡하던 턴테이블과 카트리지 바늘까지 몽땅 버렸다.  그 와중에도, 선물로 받거나 내 발품을 팔아가며 구한, 내 청춘의 신열이 남아있던 엘피판들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턴테이블이 없어서 제 기능을 못하는 엘피판은 아들녀석에게는  한물 간 골동품처럼 비친 모양이다. 그 레코드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나 모짜르트의 미사곡을 함께  들었다는 것을 녀석은 기억하지 못한다. 씨디나 엠피쓰리 같은 디지틀 음악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시켜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버리는 내 성정 때문에 후회한 적은 없는데 이럴 땐 내가 너무 쉽게 추억을 버리고, 향수를 버리고, 시간을 버리고, 급기야 사람까지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아주 오랜 전, 엘피판이 유행하던 시절, 서울로 유학간 친구에게 엘피판을 선물한 적이 있다. 아이 간자키의 로맨틱 플룻이라는 앨범이었다. 그 친구가 답장을 보내왔다. 자취 살림 몇 년에 이사를 다니느라 성가셔 턴테이블을 친척집에 놔뒀단다.  음반이 있어도  들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민구스러움을 이런 위트로 마무리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나.

 

  지금 이 순간 묵은 엘피판들을 들여다보면서 나도 위안을 삼는다. 턴테이블이 없어서 추억에 잠길 수 없다고? 걱정하지 않으련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까. 아이가 엘피판을 가리키며 묻는다. 엄마, 이거 어떻게 들어요?

 

   그거, 듣는 거 아냐. 그냥 눈으로 보는거야.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거든!

   (* 오래된 로맨틱 플루트 앨범 대신 사진은 모짜르트 플룻 협주곡 2번 D단조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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