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읽으면서 계속 속죄인가, 자기합리화인가 그 생각에만 꽂혔다. 소설과 더불어 영화도 봤다. 영화 제목은 잘 알다시피 어톤먼트. 소설은 브리오니 입장 위주로, 영화는 세실리아와 로비 입장에서 진행된다. 지루하지만 섬세한 심리묘사가 독자를 압도한다. 고전적인 방법을 취한 이 내레이션이 부럽고도 탐났다. 단정과 속단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의 가공할 폭력성에 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가진 자의 권력이든 왕따 문제이든 인간이 지닌 딜레마 중의 가장 큰 주제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폭력성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 아무래도 인간의 본성은 성악설에 가까우며 후천적 경로를 통해 성선설을 학습하게 된다는 쪽으로 무게추를 기울이게 된다.

 

   롤라는 폭행 당사자를 몰랐을까? 브리오니는 진심 속죄의 의미로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명성을 이용한 또 하나의 장난을 한 것은 아닐까.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한다 해도 인간의 다중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소설적 장치로 등장하는 깨진 도자기의 의미도 좋았고, 시대적 배경을 통한 전쟁과 폭력의 참상을 브리핑한 부분은 어쩐지 소설 내용과 어울리지 않지만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전쟁박물관을 활용한 작가의 자료 수집 의지 같은 건 백 번 존경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이야기에 해당하는 척추와 묘사를 이끄는 피톨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느낌. 진실을 알리는 방법에서는 전자가 상황을 보여줄 때는 후자가 낫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작품이다.

 

 

 

*등장인물

<탈리스 가>

*브리오니 속죄 당사자, 세실리아의 여동생, 내레이터.

*세실리아 소꿉친구 로비를 사랑함, 런던 지하철 폭격으로 사망

*레온 브리오니와 세실리아의 오빠, 캠브리지에서 공부

*폴 마셜 레온의 친구, 초콜릿 군납업으로 성공, 롤라와 결혼, 롤라 폭행범

*잭 탈리스 탈리스 가의 가장, 브리오니 남매들의 아버지, 공직으로 런던 근무

*에밀리 탈리스 탈리스 부인, 냉정함

*베티 주방마님,

*폴리 - 가정부

*하드만 씨탈리스 가의 집사

*대니 하드만 하드만의 아들

 

<퀸시 가>

*허마이니 이혼으로 애인과 파리 도피 중, 브리오니의 이모

*클렘 브리오니의 외삼촌, 전쟁에서 도자기를 포상으로 받아 탈리스 가에 남김

*롤라 브리오니보다 두 살 많은 이종사촌 언니, 15, 성폭행 당함, 롤라와 결혼

*피에로, 잭슨 쌍둥이 소년, 롤라의 동생들

 

<터너 가>

*로비 터너 브리오니 탈리스 가의 가정부 아들로 세실리아와 사랑하는 사이, 의대 준비생, 브리오니에 의해 롤라를 성폭행한 것으로 몰림, 프랑스 전쟁터에서 부상 후유증인 패혈증으로 사망,

*그레이스 터너 로비의 어머니, 탈리스 가의 파출부

*어니스트 터너 그레이스 남편이자 로비의 아버지

 

<기타>

*전쟁터에서 브리오니가 만난 환자 병사

61하나같이 중요하다고 아우성치는 20억 개의 생각들을 가지고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곳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실 어느 누구도 특별할 수 없었다. 모두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무도 특별하지 않았다.
67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177그녀는 이미 로비의 편지를 읽은 후였고, 언니를 보호하겠다고 결심했으며, 사촌으로부터 로비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것들은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나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바에 따라 그 형태가 일부 수정되어야 했다.
215벌레들을 빛 속으로 유혹하는 것은 빛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어둠이라고 했다. 벌레들은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빛의 가장자리에 있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가려는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곤충들 눈에 보이는 빛 속의 어둠은 착시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그의 이런 설명은 궤변처럼, 단지 설명을 위한 설명처럼 들렸다.
241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순진한 브리오니가 롤라가 해야 할 일까지 다 떠맡아줄 것이다. 롤라는 그저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그 진실을 빨리,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신이 브리오니와는 다른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확신이 없는 거라고만 믿으면 되었다. 그의 손이 눈을 가리고 있어서 그를 보지 못했고, 공포에 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자신을 설득하기만 하면 되었다. 브리오니는 단계마다 곁에서 그녀를 도와줄 터였다.
269공포에 떨 일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밀려와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공포는 예상치도 못했던 작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368,369요즘 같은 때에 죄란 과연 무엇인가? 별 의미가 없었다. 누구나 다 유죄이기도 하고 무죄이기도 했다. -- 우리는 매일 서로의 죄를 목격하면서 살고 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죽게 내버려둔 적도 없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었나?
394현대의 소설가는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토대로 하는 소설을 쓸 수 없다. 지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생각과 인식 그리고 마음이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의식의 흐름, 그 강물의 흐름과 각자가 한데 모여 잔잔한 강에 동요를 일으키는 지류, 그리고 강물의 방향을 바꾸게 될 예기치 않은 장애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잘 표현하는가가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바람이었다.
449그녀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로 하찮은 소설 하나 펴냄으로써 그 사실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서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그녀 인생의 척추였다.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454,455저 폴 마셜과 롤라 퀸시, 그리고 이 브리오니 탈리스가 작당을 하여 침묵과 거짓말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던가? 그러나 그를 유죄로 만든 증언은 바로 브리오니 자신이 했다. 지방 법원에서 큰 소리로 선서를 한 뒤 행한 그녀 자신의 증언이었다. 게다가 형 집행도 이미 끝났다. 대가를 치른 것이다. 배심원의 평결은 여전히 유효했다.
490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 언니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비와 함께 있는 언니였다. 그들의 사랑이었다. 브리오니도 전쟁도 그들의 사랑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이 사실이 도시 아래로 더 깊숙이 가라앉고 있는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521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521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아직 그만큼은 아니다. 내 생일 축하 파티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려낼 힘이 있다면. 아직까지 살아 있는 로비와 세실리아가 서재에 나란히 앉아 <아라벨라의 시련>을 보며 미소짓는 것으로 결말을 바꿀 수 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선 잠부터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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