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1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참으로 오래 기다린 책이었다.

절판된 책을 구하지 못해 안달할 정도로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다.  아마도, 김형경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과 관심이 그러한 충동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내가 김형경을 처음 만난 것은 <죽음잔치>를 통해서였다.  그 당시 문학사상이라는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그 해 신인상 당선작품이었다.  이십대 초반으로 나는 어렸고, 막연하나마 문학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이십여년이나 지난 이야기라 정확한 스토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약간은 엽기적인 사진 작가를 남편으로 둔 여자의 이야기였으리라, 설흰가, 설인가 하는 어린 딸아이도 등장했다. 어린 나이에도 참신하다, 야무지다는 느낌을 받은 작품이었다. 그 외 여러 신인 작품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지만 죽음잔치만큼 내게 강열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없었다.

각설하고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  아마도 죽음잔치 작품의 이미지가 내게 너무 강열하게 각인된 나머지 작가도 그러하리라는 편견이 생겨버렸다. 어딘지 모르게 야무지고, 단호하며, 냉정하고도 사리분별이 있는 작가일 거라고.  해서 그녀의 시집 <모든 절망은 다르다>까지 어렵게 구해서 읽은 기억이 난다. 지금 죽음잔치가 실린 잡지는 내 손에 없어도 그녀의 시집(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인)은 아직도 내 책꽂이 한 편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인연으로 세월을 펼쳤다. 단숨에 읽었다. 세 권을 읽어내리는 동안 화가 났다. 그것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알라딘에서 많은 책을 구입하지만 한 번도 리뷰를 써 본 적이 없다. 쓸 만한 뚜렷한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내가 느끼고, 간직하고 싶어했던 작가에 대한 환상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예의 앞에서 말했던 이십대 때 작가에게 가졌던 야무지고, 냉정하며, 동시에 열정적인 작가일 거라는 환상을 깨게 한 이 작품을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왜 작가는 자신이 겪은 아픔을 순결 이데올로기의 모순과 도덕적 교육의 한계에서 찾으려 하는가?  그 모든 사회적 잘못을 수용하고서라도 작가는 스스로 자기애를 너무 일찍 버린 식물성의 존재로 다가온다.

처음 한 두 번 당하는 고통은 백번 이해하도록 하자.  하지만 여러 정황상 잘못된 관계에 대한 판단이 섰을 땐 미련없이 박차고 나오는 용기가 필요했다. 두려움과 공포 때문이라고 두둔하기엔 너무 작가 스스로가 움츠러들었다.  당당하지 못했고, 소극적이었고,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이었다.  일방적인 상대에 저항조차 하지 않는 삶의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한 번도 주체적이지 못한 관계를 왜 그토록 질질 끌고 나가는지? 그런 관계의 종식을 선언할 기회가 작가 스스로에게 올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인데 왜 상처를 받고 아파하는지.  식물성의 자아는 동물적이고 파괴적이고 일방적인 상대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받는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려 노력한 그 점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며 순응하는 게 사랑의 방식인가? 

끝까지 상대를 배려하는 그 휴머니즘적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몰라서 힘들었다해도, 조금만 자신에게 당당했더라면 이런 아픔을 조금 더 덜 수 있지 않았을까? 왜 이런 작품을 독자가 읽어야 하나?  여성에 대한 모욕 같아 분노가 치민다.  아마 작가에 대한 연민 보다는 작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심이 컸기 때문에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이십 년 이상 갖고 있었던 작가에 대한 환상을 접어야 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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