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을 규정할 수 있는 자신만의 합당한 추억 매개물이 있다. 일기장, 편지, 액세서리, 책, 사진, 음악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요소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준다면 지난 시간들을 그리는데 느꺼운 바탕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물리적 실체가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자의든 타의든 사라지기 쉽다.

 

 

  그나마 무형의 산물인 음악은 원하기만 하면 시간여행의 고마운 친구가 되어준다. 내 청춘의 절정기인 80년대에도 음악이 곁에 있었다. 그땐 팝송이 대세인 시대였다. 김기덕도, 황인용도, 이종환도 팝송과 어울리는 라디오 디제이였다. 더러 취향에 따라 클래식을 곁들이는 이들이 있었는데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날의 클래식 입문기가 떠오른다. 단체 엠티를 가는 날이었다. 여장을 푼 누군가가 텔레비전을 켰을 때 흘러나온 음악이「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이었다. 그 시절 공영방송 텔레비전의 주말 프로그램 안내에 깔리던 무척 익숙한 곡이었다. 제목은 물론 그날 알았다. 모두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분주히 들떠 있었기 때문에 배경 음악 따위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누가 알아서 먼저 쌀을 안쳤으면, 빨리 밥 먹고 카드나 게임 판을 벌였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 와중에 한 아이가 말했다. 그 곡이 배경 음악으로서가 아니라 단독으로 얼마나 품격 높은 것인가에 대해서. 오페라의 서곡이며 작곡가는 글린카이고 푸시킨의 시가 단초가 되어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얘기까지 조곤조곤 들려주는 것이었다. 야외 소풍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얘기를 무심하게 하는 그 아이 눈빛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후 그 아이 안내로 자연스레 클래식에 입문하게 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생명이 약동하는 듯한 그 음악의 제목은 몰라도 그 시대를 건너온 누구라도 그 곡이 주말 방송 안내에 깔리던 것이라는 건 금세 눈치 챌 것이다.

봄이 머지않았다.

 

  봄기운과 어울리는 그 때 그 음악이 다사롭게 떠오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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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2-12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금요일 오전, 이불 속에서 꿈트럭대며 일어나지 않을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음악이었는데 팜므 느와르 님의 포스팅으로 다시 듣게 되니 무척 반갑습니다. 친절한 안내자가 있을 때면 음악으로 그 길을 즐겁게 걷는 것이 가능해져 참 행운이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는데 팜므 느와르님은 그런 경험을 하셨군요! 조금 지나 빛이 바래었지만 생생하게 느껴지는 기억을 살짝 엿보고 갑니다.

덧-콘트라 베이스 주자들의 저 구부정한 등!

다크아이즈 2013-02-14 00:43   좋아요 0 | URL
에뷔테른님, 라디오에서 자주 나오는 곡이긴 하지요.
그게 글린카 곡인지 모를 때랑 친구가 갈쳐 줘서 정보를 좀 알 때랑 완전 다른 차원의 음악이 되는 경험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그 친구 얘기하면 슬퍼져요.ㅠ

제가 님께 하고 싶은 얘긴 콘트라베이스 주자들의 구부정한 어깨를 보는 님의 눈썰미가 너무나 님답다는 거라는 것. 저도 님처럼 사물을 여러 방면에서 관장하는 그런 섬세하고 예민한 눈길을 키우고 싶어요.^^*

소이진 2013-02-12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절대 귀찮아서 로그인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저도 참 좋아하는 곡이어요. 왠지 많이 들어보았는데 어디서 익히 들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어우 짜증날 정도로요. 분명 저는 이 곡을 글린카의 것이 아닌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듯하네요. 한 2분 정도에서 잘린 곡을 휴대전화에 넣어두고 반복재생을 해두었던 것 같네요. 어찌되었든, 글린카의 곡이란 걸 알았으니까요. 저도 클래식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고 싶은데, 마침 좋은 형이 하나 있거든요. 클래식을 무척 좋아하는 형인데 제대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영 없어 씁쓸해요. 글을 만약 안 쓰게 된다면 음악평론이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음악, 이 좋지요. 좋아. 저도 조곤조곤 클래식을 설명해주는 과동기가 되고 싶네요. 그럼 굳밤 :D

저는 소설을 한 편 써야겠네요.

다크아이즈 2013-02-14 00:49   좋아요 0 | URL
이진님 로긴하지 않은 상태의 댓글도 신선하고 좋은데요.^^*
아마 방송 매체에서 넘 자주 틀어줘서 익숙한 것일 거예요.
글린카 아니면 누구라고 생각했을까요?
휴대폰에 저장했을 정도면 꽤나 좋아했겠네요. 전 지금 들어도 좋은 걸요.
클래식 감상은 주변 친구들이 도와줄 때 더 흥미를 느끼는 건 맞아요. 그 형과 좀 더 친해지면 많은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전 이진님이 시에다 소설에다 음악평론까지 하는 그 날을 고대한답니다.
에브리데이 응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