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간의 유배생활에서 다산 정약용이 해배되자 본인만큼이나 기뻐했던 이들이 강진의 제자들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스승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중앙 정계에 복귀하는 스승의 덕을 볼 수 있으리라는 현실적적인 계산도 있었다.
서울로 올라갈 스승과 강진에 남아 있을 제자들은 영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다신계(茶信契). 모임을 조직한 이유 중에는 다산이 강진 유배 동안 마련한 토지와 그곳에서 나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당시 다산이 강진에서 불린 땅은 서울에서 기와집 두 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원체 다양한 곳이 사람 사는 데인데, 다산을 둘러싼 인적 환경도 다를 바 없었다. 처음에는 제자들도 다산의 재산을 잘 관리해주었다. 때가 되면 소출된 곡식과 차를 다산에게 올려 보냈다. 하지만 유배에서 풀려났다 뿐, 다산은 노론이 득세하는 중앙 정계에 복귀하지는 못했다. 정계 진출의 끈이 되어주지 못하는 스승에게 실망하고 지친 제자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갈라진 것은 제자 탓만은 아니었다. 다산은 강진의 재산 관리에도 관심이 많았고, 요구 사항이 있으면 제자들을 다그쳤다. 인간적 한계를 보인 다산에게 제자들이 등을 돌린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유가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사회라 해도 기브앤테이크가 되지 않는 세계에서 제자들 역시 인간적인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다산은 다신계가 무신계가 되었다고 자조한다. ‘신의를 잃어버린 모임’이 와해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특히 학문적 소양이 뛰어났던 이청(이학래)과의 결별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산의 수많은 저술에 지대한 편집자 역할을 했던 이학래도 스승이 이렇다 할 믿음을 주지 못하자 추사 김정희의 식객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만다. 이청의 작업이 없었다면 다산의 저술은 후대에 빛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미래도 보장해주지 않고 평생 부려만 먹었다고 생각한 이학래의 고충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신뢰를 주지 못하고 의무감만 부여하는 스승이 야속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다산의 제자 중 끝까지 남은 이는 황상 한 명 뿐이었다. 곁가지를 돌아보지 않는 그의 우직함은 곁가지를 돌아보지 않았고, 오직 학문에만 힘썼다. 스승이 가르친 대로 실천했을 뿐, 애초에 스승에게 바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승과 제자는 많지만 참된 스승과 제자 되기는 어렵다. 스승은 제자를 키우고, 제자는 스승을 세운다. 키우고 세우는 일은 쌍그네를 타는 것과 같다. 스승이 무릎에 힘을 실어 그네를 시룬다. 제자는 스승의 기를 받아 허리와 발끝까지 온힘을 모아 그네 키를 높여나간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태풍 앞이라면 그네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태풍이 견딜 만한 것인가 아닌가는 그네를 잇는 동아줄이 안다.
스승으로서 자기 관리에 서툴렀고, 제자를 기르는데 미욱했던 다산의 동아줄이 터지는 걸 보면서 슬픔이 아니라 위안을 얻는 것은 왜일까. 아마 학문적 깊이나 인품의 넓이에 상관없이 우리는 누구나 약점 많은 인간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호모사피엔스들, 오늘도 곳곳에서 위태로운 그네를 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