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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의 의미 ㅣ 동문선 현대신서 16
존 버거 지음, 박범수 옮김 / 동문선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시청(視聽)과 견문(見聞)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보러 갔다. 포항 칠포리 암각화를 본 뒤였기에 그 둘을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오랜만에 자연에 가까운 가을 풍광을 만났다. 늪, 들, 물, 잎 등이 맞춤하게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인위적인 것으로부터 암각화 주변을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이 느껴졌다.
암각화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댐 건너 먼 풍경으로만 보였다. 답사 온 한 무리의 학생들이 앞 다퉈 망원경으로 호수 건너를 관찰한다. 암각화가 보인다고 소리치는 쪽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쪽으로 나뉜다. 보인다고 소리치는 쪽은 소수지만 목소리가 크고,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말하는 쪽은 다수지만 그 소리가 작다. 투덜대는 목소리가 작은 건, 꼭 봐야 하는 것을 남들은 봤다는데 자신은 못 봤으니 주눅이 들어서 그렇다.
그들 틈에 끼어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강 건너 바위는 흐릿하기만 하다. 수면에 직각으로 내리뻗은 절벽단층만 보일 뿐 암각화는 그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다. 세월에 풍화되어 그림이 흐릿해진 걸까. 아님 안경 없이 봐서 그런 걸까? 분명 보인다고 소리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땀까지 흘려가며 망원렌즈와 씨름하고 있는데 현장지킴이 아저씨가 다가온다. 뭘 봤다는 학생들은 착각한 거란다. 암각화는 현재 볼 수 없다나. 얼마 전 태풍으로 수위가 높아져 물 속에 갇혔단다. 갈수기인 봄에나 드러난다는데 그나마 이끼나 먼지가 껴 제대로 된 그림을 보기는 쉽지 않단다.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이란 말이 있다.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을 말하고, 견문은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을 말한다. 시청은 견문과 그 깊이와 넓이가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시청’하면서 ‘견문’했다고 착각한다.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는데도 ‘시청’이라도 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안 본 사람이 흘려 본 사람을 이기고, 흘려본 사람은 제대로 본 사람을 앞선다. 그런 부조리한 상황이 곳곳에서 연출된다.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려운가. 시청에 머물 게 아니라 견문을 넓히는 연습이 무던히도 필요한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