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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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내미가 핸드폰으로 낱말 퍼즐 게임을 한다. 온라인으로 친구를 불러 내 열중하는 중이다. 게임은 게임인지라 지고 싶지 않은지 막힐 때마다 엄마, 뭐야? 하고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글 쓰는 엄마니 퍼즐 낱말 정도야 금방금방 댈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이다. 딸내미의 기대치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다. 앞 글자 힌트를 주는데도 퇴화진행성 뇌주름 탓인지 한 마디도 거들지 못했다. 도움을 주기는커녕 순발력에서 딸내미 자신에게 밀리자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가만 속엣 말을 한다. ‘내 나이 되어 봐라.’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도 적재적소에 맞는 단어를 활용하는 게 쉽지 않은데 외국어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면 난감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들이 길, 차안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비장하고 서정적인 시 한 편이 흘러나온다. 폴란드 여류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외국어 낱말」이라는 산문시였다.

 

 

  간략한 내용은 이러했다. 폴란드는 지독하게 춥다며, 라고 한 프랑스 여인이 날씨 이야기로 화제를 이끈다. 폴란드인 화자는 멋들어지게 대답하고 싶었다. 내 조국에는 시인들이 장갑을 낀 채 시를 쓰고, 달빛 방안 비출 때 비로소 장갑을 벗는다고. 그들이 쓴 시에는 황량한 부엉이 소리와 바다표범을 기르는 어부들의 노래가 있다고. 꼭 밟은 눈 더미 위에다 잉크 묻힌 고드름으로 서정시를 새긴다고. 물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직접 도끼로 호수에다 바람구멍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화자는 프랑스어로 ‘바다표범’이 생각나지 않고 ‘고드름’과 ‘바람구멍’도 확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폴란드 거기는 무척 춥다면서요, 라고 묻는 여인에게 저토록 섬세한 시 대신 ‘뭐, 대충 그렇죠.’라고 짧게, 얼음처럼 냉랭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추위를 견디고자 장갑을 낀 채 시를 쓰는 쉼보르스카. 가끔 빛이 들면 햇살에 겨워 장갑을 벗어던지는 여유. 확신에 찬 서정적 눈빛으로 주변 풍광을 노래하지만 서툰 외국어로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편의 짧고 냉랭한 언어로 남을 수밖에.

 

  외국어 낱말로 시적 심상을 표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시인은 말하고 싶었겠지만 나는 바람결처럼 자유자재로 언어를 다루는 그녀의 서정적 확신에 심장이 떨렸다. 추위를 견디며 시를 쓰던 쉼보르스카를 상상하느라 서툰 외국어 때문에 소통에 힘겨워하는 그녀는 뒷전일 정도였다. 모국어로 충분히 좋은 시를 썼으니 까짓것 외국어 낱말에 좀 서투르면 어떤가.

 

 

  평범한 우리말 단어 하나도 제대로 주무르지 못하는 건 내 안의 정서가 외국어 낱말처럼 서툴기 때문이다. 두껍게 언 마음 호수에다 도끼로 바람구멍 한 점 내고 싶다. 그리하여 장갑 낀 쉼보르스카 여사처럼 바다표범과 고드름을 맘껏 불러내고 싶다. 은밀한 결구로 화룡점정 하나 찍지 못하는 불면의 밤이 또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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