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 해례본 - 드라마의 끝, 역사의 시작
이경민 지음 / 소네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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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 산바가 휩쓸고 간 자리는 나름 심각했나 보다. 온종일 집안에 갇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가로수들이 요동쳤고 강물이 둔치까지 삼키긴 했다. 하지만 태풍이 올 때면 늘 있는 일쯤으로 여겼다. 요즘 유행하는 시스템 창호가 바람소리마저 막아주는 바람에 창 너머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그림 속 풍경처럼 대했던 것이다.

 

 

  다음날 나서 본 거리도 깨끗했다. 나쁜 공기를 몰아낸 덕인지 하늘 역시 맑고 드높았다. 모든 게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서야 무심하게 맞을 태풍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숙사 천장에 비가 새고, 마당에 물이 차오르고, 벽 틈으로 비가 스며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파트 화단 풍경을 보고 제대로 실감하게 되었다. 조경수 중 삼십 퍼센트 정도는 뿌리째 뽑혀 넘어져 있었다. 신생 아파트라 심은 지 얼마 안 된 것들이었다. 트럭에 실어 올 때의 모습 그대로 뿌리가 친친 감겨 있었다.

 

 

  가로수나 조경수가 넘어지는 건 나무 잘못도 태풍 잘못도 아니다. 사람 잘못이다. 숲 속 나무가 강한 바람에 넘어진다는 소리는 잘 듣지 못했다. 아무리 작은 나무라도 그 뿌리 단단히 내렸기 때문에 태풍조차 넘보지 못한다. 하지만 가로수의 운명은 그렇지 않다. 옮겨 심는 과정에서 밑동을 동여맨 고무 밴드 때문에 뿌리 내리기가 쉽지 않아 쉽게 넘어지는 것이다.

 

 

  뿌리 내리기 쉽지 않은 건 우리 일상도 마찬가지다. 맘속 뿌리는 작은 비바람에도 흔들리기 쉽고, 어떨 땐 송두리째 뽑혀 나가기도 한다. 어느 순간 동여맨 고무밴드가 스스로를 옭아매 뿌리 내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라고 조상들은 노래했다. ‘곶 됴코 여름 한’ 그날을 위해서라면 제 몸 옭아맨 끄나풀부터 걷어내야 한다. 강한 바람은 뿌리 얕은 나무를 데려가지 아무리 작더라도 뿌리 깊은 나무는 쓰러뜨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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