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

 

 

  사람은 몸으로 말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그 주제와 맞닥뜨렸다. 평소대로 나갈 준비를 했는데 약속 시간보다 많이 남았다. 내 오전 스케줄은 주로 열시에 시작한다. 그것이 일이든 취미 생활이든 대개 그래왔다. 주부들이 짬을 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오전이 그 시간일 것이다. 한데 오늘은 열시 반에 약속이 잡힌 날이다. 젊은 엄마들은 아이 유치원 보내고, 집안 치우고 나면 그 시간이 되어야 모일 수 있다고 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내심 열시를 기대했던 스스로가 머쓱하고 미안했다. 오래 길들여진 내 생활 패턴일 뿐인데 그게 가장 합리적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이래서 역지사지가 필요한 거다.

 

 

 

 

  시간을 쪼개가며 바지런 떠는 형과는 거리가 한참 멀지만, 스텐바이 된 상태의 비는 시간이 아까웠다. 마침 화장실에 남편이 보던 책이 있길래 집어들었다. 지겨운 자기 개발서라니! 하면서 아무 데나 펼쳤다. 맘에 쏙 드는 구절이 나온다. 메라비언의 법칙이란다. '메라비언은 한 사람이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이미지는 시각이 55%, 청각이 38%, 언어가 7%라는 사실을 발견한 심리학자다.(중략) 이는 대화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할 때 말의 내용보다 그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요소가 93%의 영향력을 갖는다는 의미다'『 마음으로 리드하라 』- 류지성, 삼성경제연구소(127쪽)

 

 

 

  모임 장소에 도착해서 열심히 수다를 떤다. 이름하여 건전한 책 수다. 눈빛이 형형한 한 멤버 차례가 되었다. 그미는 눈동자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단다. (그 때 우리는 이태석 신부님의『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토론하고 있었다.) 그미는 사람을 볼 때 눈동자를 눈여겨본다고 했다. 자신이 밑줄 그어 온 부분을 성심껏 읽어 주었다. 가난과 전쟁 때문에 신뢰를 잃은 아이의 탁해진 눈빛을 묘사한 장면이었다. 환경에 따라 순한 사람의 눈망울이 얼마든지 살기 서린 눈빛으로 변할 수 있다. 이 안타까운 장면이 계기가 되어 그미는 사람의 눈동자에 대해 떠올린 모양이었다. 상대의 눈동자를 보면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단다. 백퍼센트 확신할 순 없지만 통박(?)으로 알 수 있다나. 맞는 말이다. 아침에 읽은 메라비언의 법칙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심리학자들은 메라비언과 같은 결론을 숱하게 내렸다. 사람은 혀가 아니라 몸으로 말한다고.

 

 

 

  내가 좋아하는 모 작가는 눈빛이 참 불편하다. 직접 뵌 적은 한 번도 없는데 화면 속에 비치는 그의 눈빛을 볼 때 안타깝기만 하다. 대담이나 인터뷰일 경우 자연스러운 화면을 위해 카메라를 주시할 필요는 없는데, 그 때문인지 작가는 눈길을 어디다 둬야 될지 몰라 눈치를 보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 인터뷰어가 여성일 경우, 옆으로 훔쳐보는 듯한 그 부자연스런 눈길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화면 속으로 들어가 시선을 적당한 어딘가에 고정시켜 주고 싶을 정도다. 어여쁜 인터뷰어나 아나운서를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쳐다보는 연습을 시켜드리고 싶은 것이다. 옆 눈길로 자꾸만 훔쳐보는 듯한 그 모습을 보면서 작가가 특정 미인에게(어쩌면 여성 전반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작가의 불편한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작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미인을 똑 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작가의 고지식한 성정 탓이라면 귀엽게 봐줄 만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연스레 상대와 시선을 맞추는 연습을 하라고 주변인이 조언 좀 해줬으면 좋겠다. 자고로 사람은 몸으로 말하고, 특히 그 몸 중 눈빛의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을 터인데 삐딱한 시선으로 훔쳐보는 모양새는 신뢰감을 반감 시킨다. 아무리 좋게 봐줘서 쑥스러움 때문이라 하더라도.

 

 

 

  상대와 자연스레 눈길을 맞추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어렸을 때 숫기 없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가정 방문 오신 선생님을, 놀러 온 오빠 친구를, 잘 생긴 이종사촌 오빠를 당당하게 쳐다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사람을 키우는지 지금은 그런 울렁증이 없어졌다. (시간의 때가 묻은 거겠지.) 아직도 외모 콤플렉스가 심하지만 될 수 있으면 상대방과 눈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몸 언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혀 언어 매너가 좋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배울 게 많다. 동의를 구하는 상대에게 리액션으로 장단 맞춰주기, 기발한 아이디어나 조언 요구에 필터링해주기, 진정성 밴 눈빛으로 동정을 호소하면 더한 연민의 눈빛으로 화답하기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상대방도 그 정도가 적당해야 나의 몸 언어도 좋은 쪽으로 발동하게 되는 거다. 뭐든 지나치면 거부 반응이 이니까.

 

 

 

  어쨌거나 말보다 몸이 더 많은 말을 한다니 말 조심 뿐만 아니라 몸 조심도 해야 겠다. 좋은 언어 습관도 연습이 필요하듯 몸으로 하는 말도 갈고 닦아야 한다. 우선 부정의 몸 언어부터 버릴 일이다. 혀에 든 욕보다 눈에 든 욕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일견 고고해 보이는 리액션 없는 무표정에는 탄력 있는 입 꼬리를 덧 올려보자. 타인의 약점을 못견뎌하는 냉소적인 눈빛에는 힘을 조금만 덜고 눈두덩이부터 웃어 보자. 찌들고 탁한 눈동자를 갈고 닦는 데 이태석 신부님 같은 분이 곁에 있다면 한결 도움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쉽게 주어지는 행운이 아니니 주변에서 그 모델을 찾는 게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

 

 

  오늘도 나는 내 탁한 눈빛과 이지러진 표정을 맑고 밝게 해줄 멘토를 찾아 길을 나선다. 그것이 책이든, 사람이든 도처에 있을 것을 기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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