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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ㅣ 진경문고 5
정민 지음 / 보림 / 2003년 2월
평점 :
뱀, 너무 길다
창 너머, 겨울비 추적추적 내린다. 한낮인데도 잿빛 기운에 겨운 자동차들은 미등을 켠 채 빗속 행렬을 잇는다. 저 질척거림 속 역동의 파노라마가 주는 청각 이미지도 만만찮을 터인데 실내는 조용하기만 하다. 빗소리나 자동차 소음 심지어 작은 바람결조차 새어 들지 않는다. 날로 진화하는 창호 시스템 기술 덕에 방음 효과를 톡톡히 보는 셈이다. 태초에 소리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듯, 저 모순되게 펼쳐지는 적요의 파노라마가 신기하기만 하다. 뮤트 상태에서 아주 역동적인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천식 기침과 만성 비염후유증으로 청력이 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소리 없는 풍경으로만 스치는 저 ‘부산한 고요’를 맘껏 즐겨본다.
따뜻한 물 한 잔으로 기침을 누그러뜨리며 창밖을 내다본다. 독서 모임 아이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책 좋아하던 실학자 이덕무는 ‘기침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버린다.’고 했다. 하지만 소리 내어 읽지 못할 정도로 내 목은 뻑뻑해져있으니 그 말도 위로가 되지는 못한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 기침은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평생 따라다닐 성가신 친구가 되어 버렸다. 며칠 새 컨디션은 더 나빠져 입술마저 부르텄다. 그래도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를 읽기로 했으니 기운을 내본다. 머리며 어깨에 내려앉은 겨울비를 털어내며 아이들이 자리에 앉는다.
시에 관한 책 토론답게 아이들이 좋아하는 시나 책에 대해서 말문을 트기로 한다. 맏언니 같은 세온이는 론다 번의 『시크릿』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단다. ‘좋은 생각은 모두 강력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약하다고 우주에 선언하라’는 구절이 맘에 들어 메모장에 옮겨 놓았다나. 어라차, 시작부터 오늘 토론 주제의 중심부에 가 닿는구나. 정민 선생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패랭이꽃>을 지은 정습명과 <시골집의 눈 오는 밤>을 노래한 최해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패랭이처럼 작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리라는 긍정의 삶을 노래한 정습명은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평탄한 삶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우울한 자화상을 읊은 최해는 불우한 생을 살았다. 긍정은 명랑을 낳고 부정은 비애를 낳느니라. 선현의 예를 들어, 긍정의 미학을 강조한 작가의 의도를 학생들이 알아차렸으면 좋겠다.
귀여운 상연이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을 들먹인다. 두꺼운 책이지만 맘 내키는 대로 아무 쪽이나 펼쳐도 건질만한 게 나온다나. 중학생의 감수성을 기왕에 잃어버린 나는 그런가, 하고 고개만 끄덕인다. 작가의 기발함, 창의력을 너무 기대했기에 실망 또한 큰 책 중에 하나였다.
식성이 까다롭고 말이 없는 기훈이는 의외로 『정의란 무엇인가』 읽기를 시도했단다. 정의가 무엇인지 결코 말해주지 않는 그 철학 입문서를 중학생이 읽기엔 벅찼을 것이다. 우려한 대로 읽기 유보 중이란다. 중도 포기가 아니니 다행인가. 이 책이 베스트셀러인 것은 분명하지만 팔린 만큼 많이 읽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의문형 제목에 명쾌한 답을 얻고자 책 나무에 오른 독자라면 정의의 수많은 곁가지에 매달려 허우적대다 끝내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말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수현이의 얘기가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다른 친구들이 긴 책에 대해 말할 때 수현이는 대뜸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초등학교 이학년 때 선생님께 들은 시 한 편이 너무 강렬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 다.”
도대체 얼마나 감명 깊었길래? 모두 긴장을 늦추지 않고 녀석의 뒷말을 기다렸다.
“프랑스 작가라고 들었는데 제목은 뱀이고 내용은 ‘뱀은 길다’라는 한 줄 시입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오늘 소주제 중에 정민 선생이 말한 <시는 직접 말하지 않고 돌려서 말한다, 다 말하면 안 되고 숨겨야 한다, 설명하는 대신 깨닫게 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수현이가 말한 ‘뱀은 길다’ 라는 시구는 너무 직접적이지 않은가? 시를 아는 작가라면 저렇게 직접적인 문장으로 한 줄 시를 썼을 리가 없지. 의문을 가진 채 검색을 해본다.
내 예상이 맞다. 『 홍당무 』의 작가 쥘 르나르가 쓴 <뱀>이란 시의 정확한 표현은 ‘뱀은 길다’가 아니라 ‘뱀, 너무 길다’였다. 그럼 그렇지. ‘뱀은 길다’ 와 ‘뱀, 너무 길다’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정민 선생 식이라면 ‘뱀은 길다’는 시가 되기 어렵지만 ‘뱀, 너무 길다’는 차고 넘치는 시적 은유가 아니던가. 돌려서 말해야 하고, 숨길수록 좋고, 깨닫게 해야 하는 시의 속성 앞에 ‘뱀, 너무 길다’라는 이 한 마디보다 더 나은 촌철살인이 어디 있으랴!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