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주에는 원북 행사의 일환으로 독서공개토론회가 열렸다. 시립도서관 소속 연합 독서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시민들과 함께 소설 덕혜옹주에 대해서 토론했다. 토론회장 분위기는 소박하나 진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경술국치 100주년,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올해 덕혜옹주에 관한 소설이 원북으로 선정된 것은 어쩌면 지당한 사회적 요청인지도 모른다. 가슴 아픈 우리 근대사, 그 질곡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온 황족과 그 주변부를 조명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역사를 거시적 시각으로만 보는 것을 경계하는 쪽이다. 모든 잘못된 역사의 피해자는 결국 개별자이다. 물론 조국이나 민족(집단) 없이 구성원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된 혹은 치욕스런 역사 속에서 무조건 애국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시선엔 거부감이 든다. 숱한 전쟁 역사 속에서 가해국, 피해국으로서의 역사의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각 개별자의 고통과 실존이라고 생각한다.  

  덕혜옹주를 읽으면서도 그런 미시적인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몰락한 대한제국 황족으로서 덕혜옹주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당시 집권층의 운명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독자로서 덕혜옹주는 슬픔과 답답함과 분노 지수를 번갈아 갈아타게 하는 인물이었다. 일본순사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갈 뻔한 복순을 구해주는 장면에선 올곧은 성정과 민초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황족으로서의 위엄도 맛볼 수 있었다. 원하지 않은 결혼 생활, 남편 소 다케유키와 딸 정혜의 완벽한 이해를 구하지 못한 것은 같은 여자로서 충분히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말처럼 그녀의 가장 큰 불행은 황족 신분이었다는 것.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했다면 나라 잃은 설움 뒤에 숨은 큰 에너지를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당시 역사적 진실을 떠나 어차피 소설이니 덕혜옹주의 캐릭터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넘어 구국의 염원과 민초들의 삶에 대한 역동적 지지로 승화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선의 운명을 뒤바꿔놓을 만큼 강인하지 못할 캐릭터의 덕혜라면 차라리 개별자로서의 갈등을 감정을 배제한 채 객관적으로 그려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복순에 대한 아쉬움도 컸다. 작가는 복순을 철저하게 덕혜옹주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 독립투사 자녀인 복순은 충분히 독립적인 개체가 될 수 있는 피를 타고 태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황족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나라를 구하는 일’이란 작가의 의도대로 복순은 피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에게 강제추행을 당해도, 일본인의 피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낙태를 감행하는 장면에선 모성보다 조국애의 이데올로기의 우위를 말하는 것 같아 심적으로 불편했다. 복순을 안일하게 죽음으로 내몬 것은 민초들의 운명을 황족사 안에만 가두려 한 것 같아 갑갑하기도 했다. 개별자의 존엄성이 때에 따라 한 집단의 부속품으로 전락해도 마땅한 것인가 라는 생각에 미치자 내가 너무 허무주의에 경도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 덕혜옹주 남편인 소 다케유키, 딸 정혜도 개별자로 돌아가면 모두가 잘못된 역사의 피해자였다. 자발적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그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소 다케유키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역사의 굵은 수레바퀴를 떠나 그 구성 집단 속 개별 신분으로 돌아가면 모두가 희생자일 뿐이다. 한마디로 전쟁을 원하는 소수 집단을 빼면 대부분의 개인은 희생자이고 피해자일 뿐이다. 원북 한 권을 통해, 우리 근대사의 비극적 단면을 조명하고, 국가 또는 민족 나아가 개별자의 운명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거리를 갖는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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