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칼보다 가족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망설이고 주저할 때 누군가 ‘이 한 권의 책’을 권해 준다면? 그리하여 읽고 났을 때 한낮의 무더위 속 소나기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면? 권한 이도 읽는 이도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젊은 동화작가의 소박한 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어린이 독서클럽 회원들과 그 작가를 만나러 갔다. 부산스런 한두 아이가 설사라도 난 것처럼 번갈아 강연장 안팎을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애가 쓰인 나는 집중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날 얻은 가장 값진 선물은 한 일본 작가를 뒤늦게 알게 된 일이다. 그날 동화작가는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북하우스, 2004)라는 소설을 가장 감명 깊은 작품으로 소개했다. 동화책을 답으로 준비할 것 같았던 내 예상을 뒤로 하고 작가는 일본소설을 추천했던 것이다. 신뢰할만한 작품을 쓰는 작가가 권하는 책이라면 얼른 사서 읽어도 실망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날 당장 책을 주문했다. 결과는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무더위 속에서 첫 대면한 아사다 지로는 숲 깊고 바람 서늘한 휴양 섬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해주었다. 두 권으로 된 책은 저물어가는 막부 시대의 한 사무라이의 개인사와 심상에 관한 것이었다. 130여 년 전 막부시대가 막을 내릴 즈음의 격동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실존인물이란다. 패전을 앞둔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한 하급 사무라이 요시무라는 원적지로 기다시피 피신해온다. 그는 천황을 모시고 양놈을 배척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며 원적지를 이탈한 배신자였다. 막부의 깡패집단이나 마찬가지인 신센구미 일원이 된 그의 탈번(脫藩) 이유는 단 한 가지, 돈 때문이다. 아니, 사랑하는 아내와 세 명의 자식이 먹을 밥 때문이다. 아내가 살림하고 자식이 배곯지 않도록 뒷받침 해주는 것만이 사무라이로서 그의 존재이유이다.  

  기왕의 작품에 등장하는 마초적이고 영웅적인 사무라이 세계가 아닌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차별이자 미덕이다. 번듯해 보이는 명예는 밥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사무라이의 기본정신인 충의를 저버릴 수도 있는 것. 생활인으로서,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충실한 것이 더 중요한 삶의 가치가 아니냐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불명예와 바꾼 밥이야말로 소박하나 숭고한 삶의 방식이 아니냐고 절절한 펜으로 독자의 감성을 자극해댄다.

  작가가 변주하는 요시무라의 독백과 주변인물들의 회고담은 일본 근대사의 큰 물줄기 속에서 시종일관 소박한 삶에의 지향을 추구한다. 삶의 정의는 무엇인가? 사무라이의 가치는 무엇인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대의명분을 위해 기꺼이 할복하는 것? 천만에! 하급 사무라이인 요시무라의 행적을 좇는 작가는 그것을 오로지 가족애에 둔다. 어디에도 무사로서의 길들여진 위엄과 충성의 이데올로기가 도드라지지 않는다. 처절하고 절실한 가족애야말로 사무라이들의 기저를 지배하는 인간적인 꿈이라고 말한다. 

  사무라이 요시무라는 생활인으로 돌아가면 일반인들의 정서와 다르지 않다. 남의 피를 거둔 칼이 번 돈으로 아이와 아내가 먹을 쌀을 구한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바보가 되어도 무시를 당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푼돈을 아끼느라 이발을 제때 하지 못하고, 차림새는 추레하기 그지없다. 비루하기 짝이 없는, 하지만 잘 웃는 이 수전노 사무라이는 가족에게 돈을 부칠 때 가장 행복하다. 이런 요시무라를 누가 감히 탓할 것인가.

  ‘높으신 분들이 한결 같이 말단 무사에게 죽어라 죽어라 다그치는 것은 스스로 죽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던가. 전장에서 죽는 것이야말로 무사의 영예라니, 대체 어느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시작했단 말인가. 공자님은 그런 말씀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주군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는 하셨어도 충효를 위해 죽으라고는 하지 않으셨어.’ (237쪽) 

 가족애를 가장 우선에 두는 사무라이로서의 삶이 쪽팔리는 가치라면 당신의 그 위대한 가치라는 게 무엇인가, 라고 허세부리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팔을 걷어 부칠 기세다.

  오류 많은 사무라이의 길을 걸었지만 요시무라의 삶을 관통하는 자세에는 거짓이 없었다. 사랑을 지켰고, 자식을 건사했으며, 우정을 사수했다. 크게 얘기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종으로 이 책은 읽힌다. 개별자의 존재 가치야말로 당당히 보호 받는 세상 그것이 정의여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빨 빠진 칼에 스스로 져서 끝내 이기는 요시무라의 절절한 울림에 정신없이 밑줄 긋는 한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