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이 늪으로 흩어질 때

                                   




  한 순간이었다. 커브 길을 지날 때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마주 오던 버스의 속도감에 짓눌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에 발이 올라갔다. 자갈 깔린 갓길에 닿은 바퀴는 순식간에 튕겨 올랐다. 제어불능 상태가 된 핸들은 갈지자로 휘청거렸다. 맞은편에서 통근 버스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다음엔 트럭 차례였다. 노련한 트럭 운전수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내 차를 피해갔다. 속도를 줄였다면 도리어 충돌이 일어났을 것이다. 승용차 한 대가 뒤이어 지날 때 나는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최종적으로 차가 닿은 곳은 빗물 가득한 하수통로였다. 외곽길이라 정비되지 않은 늪 같은 하수도로 차가 서서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전날 비가 와 노면은 미끄러웠고, 하수량은 불어나 있었다. 구십도 각도로 기울어진 운전석으로 물이 금세 들어찼다. 살려주세요. 분명히 소리쳤지만 차 유리에 부딪힌 절규는 가슴팍으로 되돌아와 꽂혔다. 밖으로 퍼지지 않는 말의 무용함이 칼날처럼 휘감겼다.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휴대전화기가 들어 있는 핸드백에 손을 뻗쳤지만 허사였다. 충격으로 꽉 조인 안전벨트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물이 점점 차올랐다. 이렇게 죽는구나, 이것이 죽음의 실체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차 오디오 데크에서는 영어 이솝우화가 불라불라 흘러나왔다. 무심결에 듣던 유쾌한 테이프가 장송곡처럼 들렸다. 손만 닿을 수 있다면 구조 전화를 거는 것보다 저 테이프의 스톱 버튼을 먼저 누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일 먼저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아들의 뱃살마저 살갑게 다가왔다. 아들아, 미안하다. 네 살도 못 뺐는데 이렇게 엄마가 힘들어하는구나. 아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자괴감이 빠르게 스쳤다. 예쁘지만 공부에 전념하지 않는 딸내미 얼굴도 어른거렸다. 딸아, 공부 안 한다고 눈 내리깔고 얼음장 분위기 만들던 엄마를 용서해라. 무뚝뚝한 남편도 생각났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만 빼면 언제나 내 편인 남편 옆에서 마음껏 웃어주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제 맘껏 쓰지 못하고 언제나 용돈을 구걸하던 남편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고 싶었다.

 

  겨우 발바닥까지 물이 찼을 뿐인데 심리적으로는 목울대까지 압박감을 느꼈다. 왜 글을 쓰겠다고 자신을 괴롭혔는지 가슴이 아파왔다. 차라리 아이들에게 맛난 것 해주고, 남편 출근길에 마음껏 배웅해주는 다사로운 엄마나 마누라가 될 것을. 재능도 없는데 실한 엉덩이만 믿고 자판기 앞에서 끙끙댔다니. 비록 눈썰미는 얕으나 날선 통찰이 있으니 언젠가는 글이 되지 않을까 고군분투해온 자신이 가엾기만 했다. 밑줄 쳐가며 두 번째 읽던 김훈의 남한산성 분홍빛 표지도 떠올랐다. 소설가의 문장으로만 보기 아까운 김훈. 어느 평론가처럼 에세이스트나 문장가라 불리는 게 나을 얄미운 작가. 그에 대한 문체 분석도 덜 끝났는데 왜 나는 늪으로 가야만 하나? 내 볼품없는 문장에 회의하고, 작가가 될 마음조차 없는 세상의 완벽한 글쟁이들에게 느껴야 할 질투나 절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반짝이기를 기다리는 별들 - 아이들, 남편, 좋은 주변인 그리고 아쉽기만 한 글에 대한 내 열정. 아직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했는데 왜 별들은 늪으로 가야 하나? 나를 조롱하듯 이솝우화 테이프는 잘도 돌아갔다. 양치기 소년을 지나 서울쥐 시골쥐를 거쳐 떡갈나무와 갈대에 이르기까지 윙윙대는 이국의 목소리는 내 욕망의 부질없음을 끝없이 질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나를 구하러 와서 저 테이프 소리를 듣는다면?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꼼짝할 수 없다. 간신히 발로 낚아챈 가방에서 휴대 전화기를 찾았다. 위급할 때 일일이를 누르는 거지. 어처구니없이 허튼 버튼을 눌러대고 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정 여럿이 내 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물이 안 깊어요. 이상하리만치 바깥 소리가 안으로 잘 들렸다. 구급대원들이 오기도 전에 출근하던 장정들이 수렁에서 차를 들어 올렸다. 창을 열고 물기 묻은 옷깃을 여미는데 창피했다. 아이 슈드 비 어쉐임드 옵 마이셀프! 부끄러운 게 많은 내가 기도처럼 외워둔 한마디가 절로 나왔다. 다친 데는 없어요? 누군가 물었다. 왜 다치지 않았겠어요. 마음을 다친 걸요. 내 무사함을 알리려 고개를 저으면서 나는 속울음을 삼켰다.    

 

  가끔, 커브 길에서 흩어진 별들은 늪으로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별이 소중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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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5 2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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