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양장) -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혼마 야스코 지음, 이훈 옮김 / 역사공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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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은 통한다. 지나치게 활발하거나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제 안의 우울을 감추기 위해 그런 행동양식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울을 포장할 매혹적인 통제력마저 놓쳐버린다면? 맥 풀린 그 우울은 ‘말’까지 버리라고 강요할지도 모른다. 혼마 야스코의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역사공간, 2008)를 읽으면서 공권력의 횡포 앞에서 개별자의 운명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은 ‘할 말 없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인간이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 존엄은 개별자로서의 존엄을 말하지 힘의 논리 앞에서 그것을 양보하거나 희생해도 좋은 존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언제나 개별자의 인권은 권력의 마수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덕혜옹주도 그런 길을 걸었다.

  혼마 야스코가 쓴 이 평전은 제목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혜옹주와 소 타케유키’ 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덕혜옹주 못지않게 남편 소 타케유키에 관한 변호가 많은 내용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어떤 제목으로 출간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덕혜옹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었던 소 타케유키를 위한 평전의 몫도 크다는 것이다.

  타의에 의해 뒤틀린 그들의 운명은 그 둘에게서 ‘말’이란 것을 뺏어가 버렸다. 혼마 야스코는 시종일관 혼신을 다해 그 둘에게서 연민의 시선을 떼지 않는다. 덕혜옹주의 일본 시절후견인 역할을 했던, 배다른 오라버니 이은 왕세자와 올케 이방자 여사에게는 서운함을 내비칠 정도로 덕혜옹주의 입장이 되어 그녀를 이해하고 재조명한다. 대마번주의 아들이라는 백작 신분으로, 한 왕국의 공주(비록 망국의 왕족이긴 하지만)와 정략결혼해야 했던 소 타케유키도 운명의 희생자였음을 작가의 시선은 놓치지 않고 있다.

  사춘기 시절부터 앓고 있던 덕혜옹주의 정신분열증은 그들 결혼 생활에 치명적인 방해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라 잃고 부모 잃고, 말 설고 사람 선 이국땅에서 우울이 깊어지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남편 소 타케유키의 배려와 관심이 있었다 한들 근원적인 아픔과 고통이 제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을 덕혜옹주에겐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끝내 정신병원까지 가게 되고, 이혼을 거쳐, 말까지 잃게 되는 건 당연한 순서처럼 보였다.

  소 타케유키 역시 덕혜옹주 못지않은 부침의 세월을 보냈다. 귀족 신분으로 태어나 평탄한 세월을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권력의 희생자라는 면에서는 아무리 연민해도 지나치지 않다. 소 타케유키로서는 최선을 다한 결혼 생활이었다.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왕녀의 지참금을 보고 결혼한 것도 아니고, 덕혜옹주에게 비정한 사람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다만 운명이, 상황이 그들을 갈라놓았을 뿐이다.

  덕혜옹주와의 사이에 유일한 혈육이었던 마사에마저 신혼 생활 몇 개월 만에 자발적 행방불명이 되었을 땐, 마지막 희망마저 놓친 심정이었을까? 소 다케유키 역시 하찮은 말을 버려버렸다. 대학 교수로서 학자로서 말년에 인정받는 삶을 살았지만, 소 타케유키는 죽을 때까지 덕혜옹주에 관한한 그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다만 몇 편의 시로 그 시절을 안타까운 은유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197쪽)

   덕혜옹주가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었다면, 소 타케유키는 말을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경우였다. 말 못하는 자와 말 하지 않는 자의 내면은 상통한다. 개별자의 우울이 공권력 앞에 무너질 때, 말을 버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항거가 없는 모양이다. 말 버린 자들은 말이 없는데, 말 많은 자  이렇게 남아, 그 둘의 실어를 공감하는 말을 휘갈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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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8-0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 다케유키도 말을 버렸군요.
낙선재로 덕혜옹주를 만나러 왔었는데 돌보던 이가 끝내 허락하지 않아서 못 보고 돌아갔하고...한국사 전에 나왔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옹주를 보고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겠죠...

다크아이즈 2010-07-23 04:17   좋아요 0 | URL
8월 말에 소설 덕혜옹주로 공개토론회 하는데, 저는 이 책에 더 구미가 당기네요. 주관은 개입되었되, 감정 과잉이 덜 되었다는 것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