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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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들끼리도 질투하고 삐칠까? 아주 그런 맘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편견 많은 나는 남자들은 사소한 일상에서는 그런 감정이 없는 줄 알았다. 혹여 있더라도 그런 부분은 애써 무시하고 사는 부류들인 줄 알았다. 대의명분을 중요시 하는 남자들은 사소한 것에서는 의연할 것이다, 라는 왜곡된 남성관을 알게 모르게 지니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오늘 그것에 관한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남자들만 참석하는 독서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들의 포복절도할만한 솔직담을 경험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독서 토론을 하기 전, 분위기 조성을 위해 회원들끼리 자유발언 시간을 갖곤 한다. 회원 중 한 명이 다른 회원 누군가를 성토하겠다고 나섰다. 물론 농담이었다. 성토 대상은 평소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어느 누구보다 회원들을 챙기는 전형적인 모범생인 ‘장학생’씨였다. 천성적인 밝음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은 회원이라 누구나 좋아하고 따르는 편이었다.

  한데 성토자로 나선 회원에 의하면 그 모범회원은 ‘사람들 앞에서는 잘해주는 척하는데 둘이 있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후배들이 공부방에 들어왔는데 온통 그 후배들에게만 신경을 쓴다나. 그들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필기구를 빌려준다, 특별자료를 챙겨준다 하면서 오버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간 자신이 받아왔던 관심을 후배들에게 빼앗겨 여간 서운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성토자의 불만을 듣던 우리는 배꼽이 빠지라고 웃어젖혔다. 그러면서도 그 울분의 블랙유머를 지켜보는 것이 단순한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남자들 내면도 여자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 아니 인간이란 동물은 근본적으로 남녀 구분 없이 비슷한 정서를 지녔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남자도 감성적이고, 섬세하고, 다치기 쉽다. 다만 우리는 애써 그런 면을 무시해왔던 것은 아닐까. 그런 남자, 아니 인간의 내밀한 속성에 관한 에세이가 여기 있다.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달, 2009)는 그걸 잘 말해주고 있다. 단순 신변잡기 에세이로도 볼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 않다.

  노래하듯 한소절한소절씩 음미하다보면 한 남자의 내면 깊숙이 꽂힌 칼날 같은 단상들이 여린 개나리처럼 피어오른다. 샛노란 표지와 엷은 노랑 속지마저도 이런 내용을 뒷받침해준다. 내용과 형식이 이처럼 조화로운 책을 만나는 건 독자로서 행운이다. 새 책이라도 험하게 보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는데, 이 책을 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군더더기 없이 까슬까슬한 표지의 작은 의자 셋마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은 책 내용이 유리처럼 투명하고 감성적이고 깨지기 쉬운 것처럼 보여서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봐도 낙서 없고, 접힌 곳 하나 없고, 평소 하던 대로 첫 속지 위에 휘갈겨 쓴 감상문 따위도 없다. 일상을 건너는 남성 작가의 예민한 성찰 앞에서 독자로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었을까?

  다만 내 취향대로라면 제목이 껄끄럽다. 보통의 존재라니? ‘언니네 이발관’같은 포스트모던한 밴드이름을 차용한 작가가 만든 제목치고는 평범하다. 언더그라운드에 관심 많은 독자들은 아시겠지만 저자의 밴드 언니네 이발관은 일본 비디오 제목에서 빌린 것이란다. 이런 독특한 캐릭터의 저자치고는 책 제목이 싱겁다. 차라리 마지막 부분의 소제목인 '손 좀 들어봐' 같은 것을 취했으면 어땠을까?

  언니네 이발관, 이란 후광 없이 에세이스트 이석원으로 자리매김하고픈 결벽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제 안의 혼란을 반죽으로 눙쳐 독자라는 수제비 냄비 속으로 뜯어 넣는 품새가 아프고 아리다. 일상은 무탈하지 않으므로, 독자인 나 역시 수제비 포가 되어 봄날 둥둥 뜨겁게 떠다닌다. 사랑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단상도 나로서는 절대 공감이다. 어느 새 이석원의 예민한 펜끝 친구가 되려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며칠 전에 온 메일에서 누가 그래. 만약에 다시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음악이 달콤하게 변하지만 않기를 바란다고. 아니, 사랑이 달콤하디? 달콤한 사랑해본 사람 어디 손 좀 들어봐. 얼굴 좀 보게. > 347쪽 '손 좀 들어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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