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잘 집중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입장에서 그런 면은 환영받을만한 건 못된다. 드라마는 삶의 표현 양식 중 하나이다.  갈등, 번민, 절망, 화해하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삶을 녹여내는 글쓰기와 그리 무관한 일은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내뿜는 촌철살인의 대사와 적재적소의 기발한 에피소드 같은 걸 눈썰미 있게 보면, 분명 글쓰기에도 도움이 될 터인데 쉽게 몰입하지 못한다. 이야기를 따라가거나 주인공에 감정이입 되기도 전에 비현실적인 상황이 전개되면 나는 그만 지겨워져 딴 짓을 하곤 한다.  





  불륜 설정, 대가족주의에 대한 환상, 신데렐라 만들기, 은근한 쇼비니즘 등이 드라마의 소재가 되어 온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시청률을 의식해야 하는 방송사 입장에서는 대중의 입맛을 자극하는 그런 소재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한데, 도가 지나쳐 리얼리티 부재를 넘어 막장으로 치닫는 드라마에서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욕하면서 본다는 그런 드라마에 쉽게 동참하지 못하는 내 성정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아직도 헛갈린다.   



  어제 우연히 케이블 방송에서 앙코르 단막극 한 편을 만났다.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라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내 오감은 화면에 맞춤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장편 드라마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과는 다른 신선한 감흥이 절로 일었다. 단숨에 몰입한 이 작품이 여운이 남는 건 짧은 시간, 오직 작품성만으로 시청자와 공감하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경희 드라마작가의 ‘우리햄’(드라마 시티 단막극, 2004 방영)은 이제 내겐 매혹적인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노망 든 할아버지, 병석에서 매일 죽는다는 말을 달고 사는 할머니 그리고 주변 모든 이들이 포기한 문제아 우리햄(우리형님), 이 작품은 이렇게 아이보다 못한 어른 셋을 건사하는 아홉 살 철기의 고군분투 생활기를 담은 단막극이다. 



  <우리집에는 얼라보다도 몬한 어른이 서이나 된다. 첫 번째 얼라는 노망이 걸리가 손자가 되는 내보고 오빠야, 오빠야 하는 할배고, 두 번째 얼라는 지난겨울부터 방에만 꼼짝도 안하고 들눕어가 맨날 죽는다죽는다 꽁까는 할매고, 세 번째 얼라는 학집동포(학교, 집, 동네에서도 포기한 문제아) 우리햄이다.> 이렇게 방백하는 애어른 철기. 아홉 살이 감당해야할 삶의 비애와 의연함 앞에서 나는 서늘한 듯 다사로운 한줄기 바람이 지나는 걸 느꼈다.    



  어린애처럼 과자 한 봉지에 집착하는 할배, 똥오줌 기저귀를 자주 갈아줘야 하는 할매, 여전히 건달 신세를 면치 못한 우리햄. 햄(형)이라 부르지만 실은 자신의 아빠임을 진작에 철기는 알고 있다. 이 작품이 과장되지 않고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건 철기의 속 깊은 행동 이면에 동심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말썽만 피우는 우리햄을 떠나, 풍문으로만 듣던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기차역 장면. 딱히 희망적이랄 것도 없는 그 계획이 현실이 되기 전, 철기는 플랫폼에서 우리햄의 진심을 알아 버린다. 자신을 버린 사람은 망나니 아빠가 아니라, 돈 있는 남자를 따라 간 엄마였다는 사실. 플랫폼 수하물 뒤에서 배불뚝이가 된 엄마와, 떠난 엄마로부터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입씨름 하는 아빠를 훔쳐보던 철기는 풀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고 만다. 애어른을 버린 자리에 아홉 살 다친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앉은 것이다. 화면을 통해서 얻는 깊은 울림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절감한 장면이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았을 때도, 할배의 억지와 할매의 투정과 우리햄의 속썩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아홉 살의 의연함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웠던 가를 반증하는 것이기에 더한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진정한 부성애를 맛보게 된 철기는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 번째 얼라는 아홉 살이나 묵은 기, 즈그 아부지 무등 타는 거로 제일 좋아하는 나, 강철기다.> 오프닝을 살짝 비튼 피날레. 이런 수미쌍관의 맵시덕분에라도 이 작품은 오래토록 내게 여운을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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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08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님의 글로만 본 드라마지만 정말 괜찮은 드라마네요.
욕하면서 본다는 드라마 대열에서 이탈한지는 아주 오래 되었지만, 요즘 파스타에 꽂혀서 백만년만에 드라마를 보게 됐어요.ㅋㅋ 우리애들이 엄마도 보통 아줌마와 다르지 않구나!를 외쳐대지만 그래도 꿋꿋이 보고 있어요. 아~ 오늘은 월욜 파스타 하는 날이구나, 룰루랄라~ㅋㅋㅋ

다크아이즈 2010-03-24 20:38   좋아요 0 | URL
아웅, 저도 드라마에 꽂히고 싶어요. 노력해도 조금만 보다 보면 엉뚱한 데로 빠져요. 관심 덜 한 곳에, 몰입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穀雨(곡우) 2010-03-0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능적이든 구조적이든 결손가정이라는 게 마음이 짠~해지는 법인가 봅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홉살이여서 그런 지 전 <아홉살 인생>이 떠오르네요.
다른 세상이지만 동심은 세상에 덜 패이고 덜 깍인 느낌입니다.
드라마, 전 광입니다.^^ 남들 안 보는 드라마만, 진부해 빠진 소재지만 가족 간의
사랑, 희망... 뭐 그런류의 드라마 좋아라합니다.^^

다크아이즈 2010-03-14 23: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아홉살 인생의 이경희 식 버전이죠, 뭐.
드라마 광 되는 법 좀 가르쳐 주시와요. ㅋㅋ 도무지 몰입 단계까지 힘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