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수는 이십대 때 한 여자를 사랑했지. 청춘을 지나온, 하자 없는 대부분의 독자가 그러했듯이. 연수의 사랑은 언제나 파국을 예견하곤 했지. 사랑이 온전하지 않은 것임을 미처 몰랐던 누구나의 이십대가 그러했듯이. 잘 뻗은 메타세쿼이아, 그 적막한 그늘 벤치에 함께 앉았을지라도 그 사랑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그런 시절을 건너는 것이 삶의 톱니바퀴이기도 하지. 그럴 때 연수는 노래했지. "사랑은 저처럼 뒤늦게 닿기만 하면, 닿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자욱도 없이 삼월의 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    

  소설을 쓰기 전 연수는 시를 (오래) 쓴 적이 있었지. 그때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등장하는 시 한 편을 쓴 적이 있지. 그 시의 제목이 꼭 세계의 끝 여자친구일 필요는 없었어. 중요한 건 그날의 데이트 여정 중에 메타세쿼이아의 이미지가 연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거지. 실제로  그 나무 아래 벤치를 서성였는지, 그 올곧은 나무를 연상케 하는 여자의 잘 다려진 스커트 때문에 그 나무를 떠올렸는지는 역시 중요하지 않아. 메타세쿼이아 한그루를 가슴에서 뿌리칠 수 없었던 연수는 급기야 도서관에서 '메카세쿼이아, 살아 있는 화석'이란 책까지 빌리게 되지. 시상은 떠오르고 그 시적 완성미를 위해 책을 활용해야 했던 거지.  

  딱히 연애랄 것도 없는, 지리멸렬하기만 한 연수의 만남에 위안을 주는 것은 이를테면 이런 거야. '이따금 그 메타세쿼이아 쪽을 바라보면서 호수 주위를 달렸으며, 생각날 때마다 매번은 아니고 세 번에 한 번꼴로 <나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미니책자 27쪽)내는 거지. 그리하여 '나의 미래는 여전히 전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같은 책 27쪽)지는 거지. 애인이든, 대타 여성이든 모든 만남은 여전히 전혀 내 것이 아니어야 스물다섯 시절이라 할 수 있지. 그걸 아는 연수는 결국 시 한 편을 건너 뛰어 단편 하나를 완성하기로 하지. 이름하여 세계의 끝 여자친구, 라는 제목이 탄생되는 순간이지. 연수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시를 쓴 시인으로 분하고, 시집 두 권을 낸 경력이 있는 그 시인은 암 투병 중 죽게 되는 거지.  

  마침 그를 아끼고 사랑한 스승이 있어 그 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작중 화자는 그것을 알린 사람에 대한 막연한 흑심으로 시 읽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 사람이 시인의 국어선생이지 늙어버린 김희선씨라는 걸 알게 되지. 김희선 할머니(아니 김희선씨)는 죽은 제자 시인이 화자와 닮은 것에 놀라고, 화자는 자신의 애인과 할머니가 이름이 김희선으로 같다는 것을 알게 되지. 비록 탈렌트 김희선 만큼 아름답진 않지만 작중화자에겐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었던... 이제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껴안을 것인가는 자명해졌어. 김희선씨와 작중 화자는 서로를 이해하게 될 거야. 유방암을 앓는 김희선씨(굳이 할머니는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지)와 사랑 앓이에 혼란스러웠던 화자는 한 그루의 메타세쿼이어를 향해 걸어가는 거지. 그 거리에 관념적 사랑은 영원히 남고,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같은책자 31쪽)른다는 자기확신을 되새기며.  

  사랑이란, 집 근처 공원, 그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메타세쿼이어 나무 한 그루까지 온전하게 함께 닿는 길을 말하지. 하지만 삼십 분도 걸리지 않는 그 길이 실은 세상의 끝에 다다르는 것 만큼 힘겹기만 하지. 그래서 사랑은 모호하고, 불길하며 흔적이 없을 수도 있는 게야. 정작 사랑은 어디에도 없는데. 다만 우리의 환상이 저 메타세쿼이어 우듬지 어디에 그것이 있고, 그것이 곧 세계의 끝이라 우기고 싶은 거지.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 모두는 헛똑똑이가 되는 것이지. '모두 헛똑똑이들이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아는 것들이다.' (같은책 24쪽) 사랑이 버거운 건  '내 쪽에서 아는 것'에서 메타세쿼이어 끝을 꿈꾸기 때문인 거지. 삼월의 눈발처럼 사라지는 그 몹쓸 사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