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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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아프고, 모두 다 상처 받고, 그렇게 홀로이나 그래도 추억하거나 살아내거나 살 만한 것에 관한 단편집, 으로 나는 읽었다.    

 

  김연수 -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은 읽은 지 오래 되기도 했지만 별로 남은 게 없다. 누구나 아프다. 사는 게 고통이다. 때로는 그 번민으로 불면의 밤을 보낸다. 뭐 그런 주인공이 산책으로 돌파구를 찾아나선다. 산책하면 다섯 가지 즐거움이 생길까? 글쎄다. 짧은 시간에 척척, 코끼리도 재울 수 있으며, 침대에서는 잠만 자고 섹스만 하고, 결국 혼자서 길을 걸어가게 도리 것이며, 거리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다. 이건 뭐 또 뻔하잖아. 김연수를 읽으면서 생각외로 여성적 코드가 보이는 게 흥미롭다. 사는 건 고통이자 아픔이다. 그러니 오래 고민하지 말고, 무거운 짐도 훌훌 털어내고, 단순해지고, 누구나 혼자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니, 거리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라. - 뭐 이렇게 정리한다. 작가가 뭐라고 의도했던 난 내 식대로 읽는다. 김연수는 재미있는 작가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생각하게 만든다. 소설가가 진지하면 독자 떨어지기 십상인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그의 자선작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  연애소설(아마도 첫사랑 쯤)을 표방한 세태소설이다. 1980년대 후반기를 주석한다는 것만으로도 김연수식 후일담 쯤 되겠다. 아무래도 젊었을 때 쓰거나 자료 수집을 한 것으로 재가공한 소설 같다. 김연수는 자료을 멋드러지게 가공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그 자료만으로도 소설 잘 쓰는 작가로 내게는 각인되어 있다. 마치 왕오천축국전을 주해하는 소설 속 나처럼, 김연수식 주해가 능한 작가이다. 재미라는 것은 별개로 하고라도. 

 

  이혜경 - 축제, 는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인척 뻘 남자에게 성폭행 당한 나의 상처 극복기 같은 거다. 상처를 극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끝내 옴 샨티 즉,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이라는 주문을 외는 것, 그 힘겨운 타협이 저마다의 상처 끌어안기 방식임을 알게 될 뿐이다. 발리라는 매개지가 등장하고 여러 명의 주변인들이 등장해도 그것 모두 상처와 치유의 상관 관계 속에서 배치된다. 기성이니 용서되는 소설이지 신예가 이런 소설 쓰면 일단 참신성에서 탈락이다. 아무래도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내레이션 방식에 점수를 주는 내 읽기 취향도 문제가 있다. 무뎌진 펜끝으로도 이상문학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이 기성의 특권이다. 억울하면 잘 써서 간택받으면 된다!  

 

  정지아 - 봄날 오후, 과부 셋. 금세 읽힌다. 잘 썼다. 이렇게 쓰고 싶다. 누구나 에이코가 되어 그 허한 마음을 다독이며 산다. 마음을 주고도 마음으로 받지 못하는 한 생의 씁쓸한 봄날 오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빚을 갚듯 하루코는 장을 담갔을 것이다. 아무것도 주지 않은 사다코가 얻어먹은 콩물은 빚이 아니라 마음이었다.'(130쪽) 마음 얻는다는 것이야말로 사람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가난한 친구 하루코에게 책방 차려주고 재기하도록 도와준 것은 에이코지만,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그 마음 가져간 이는 한 것 없는, 가진 것이라곤 새침한 입무거움과 은근히 잘난척인 전형적인 모범생 사다코이다. 노년의 삶을 빌려와 사람살이의 그 오묘한 관계를 그려내는 과정이 여간 아니다. 인품이란 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저마다의 성정대로 발현된다. 그 모순의 귓불이 붉어지는 상태를 우리는 '인간적'이라고 자위하는지도 모르겠다. 정지아가 말한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성품이다.'(130쪽)라고.   

정지아 소설답게 사상 얘기는 양념으로 곁들인다. '사상이고 뭐고, 살아보니 다 덧 없다. 죽으면 한 줌 재지뭐.' 그렇게 말하는 사다코의 곁에는 여전히 '통일광장'이라는 잡지가 놓여있다. 이런 장치들도 소설가로서의 정지아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이라 독자로선 용인되다 못해 반갑다.  

염장녀 하루코, 완벽녀 사다코, 오지랖녀이자 나레이터인 그녀(에이코) 중 단연 에이코에게 감정이입된다. 작가가 그리하라고 시켰으므로. 끝까지 그녀의 오리랖은 잦아들지 못한다. 생삼겹을 사러 자청하는 길 뒤에도 나머지 둘의 속닥임은 계속될 것이니. 그녀의 눈물겨운 오지랖이 그래도 봄날 오후 같은 건 '김 영감 팔베개를 베고 자다 죽는'(137쪽) 꿈이 있기 때문이다.   

 

  공선옥 - 보리밭에 부는 바람, 은 친근하다. 동년배가 그리는 시골 풍광 속으로 잠시 빠져 들게 하는 맛. 시골살이는 내게 너무 짧았던가? 물장구치고, 아이 들쳐업고 동네를 헤매던 70년대의 산골 풍경엔 반공 이데올로기 또한 제격이었다. 수요 발표회 속에서도 간첩 식별하는 법 등은 단골 메뉴였다. 어쩌면 빨갱이로 몰려 숨어지낸(월북했다 남파된 간첩일지도 모를) 작은 아버지의 급작스런 방문은 주인공 어린 나에게는 영원한 비밀이 되어야 할 시대였다. 그렇게 '보리밭이 젖고 망초꽃이 젖고 여우가 젖고 내가 젖'는 시절이 있었다. 눈을 뜨면 '지린내' 대신 '낯선 비린내'가 나고, 그렇게 기성에 한 발짝 다가서기 위한 전초전으로 '형이 세수를 하고 있는 우물가로 달려'(161쪽) 나갔던 것이다. 30년은 훌쩍 넘어간 풍광을 보듬는 작가의 시선 역시 공선옥답다, 이다. 

 

  전성태 - 두 번째 왈츠. 내용은 접고, 시집이 팔리지 않으나(인구가 워낙 적어서) 시낭송대회의 관람료가 비싼 나라가 몽골이란다. 낭만적이다. 몽골은 시의 나라였구나. 일찍이 김경욱이 천년의 왕국, 에서 조선은 시의 나라, 시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관료제의 전형인 과거 제도를 빗대어) 곳이라고 예찬한 이래, 그 맥을 잇는 나라가 몽골이구나. 하는 생각. 근데 그 시 낭송 문화는 '율격의 지나친 강세, 그리고 쉬운 표현을 요구하는 대중성으로 시를 죽이고 있'(171쪽)단다. 결국 몽골도 '듣는 시가 아니라 읽는 시가 자신들의 정신을, 현대의 몽골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171쪽)하단다. 읽는 시의 교조성보다 듣는 시의 낭만성이 더 좋은데, 정치색(혹은 국민성 개조)이나 신념 앞에서는 그 전통도 무색하길 바라나 보다. 

몽골에 사는 북한여자 취재기가 주인공 나의 가장 큰 목적이다. 하지만 체제 변화 이후에 감도는 몽골의 분위기와 특히, 안내여성 냐마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 연정을 두 번째 왈츠로 명명한 것일까? 찾던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냐마의 울음 속에서 두 여자에 대한 '주체할 수없는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것은 생의 한 시절 숨 트이고 싶은 강열한 열망 때문인지도... 

 

  조용호 - 신천옹. 소설로 읽히지 않고 담담한 고백록으로 읽힌다. 괜찮지 아니한가? 모든 소설이 소설적 기법과 그럴듯한 사기에 열을 올린다면 그 또한 낭패지. 진정성을 구현하는 이런 '남자로서 세상에 부대껴 보기' 같은 소설도 필요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두 남자 이야기이다. 나레이터도 두 친구가 번갈아 나,로 나온다. 굳이 독자에게 혼돈을 주는 이런 방식을 취한 이유는? 이야기가 담담체인데, 기법은 어설픈 포스트모더니즘인가? 막걸리에다 치즈 안주 들이미는 격이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작가라 판단유보. 정주를 꿈꾸는 여자와 유목을 허하라는 친구의 삶을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인 나의 갈팡질팡 중년기 쯤으로 읽힌다. 누구나 자신만의 앨버트로스를 꿈꾼다. 한데 소설 속에서 그 정체성은 모호하다. 여자에게는 떠나거나 정주하거나 간에 함께 하는 것으로(원래 평생 같이하는 금슬 좋은 새란다) , 남자에게는 떠나는 것으로(그래서 또 다른 이름이 나그네새인가), 주인공 나레이터에게는 그저 꿈꾸는 것으로.

 

  박민규 - 말 많을 절.(용용자 네 개 붙이면 이런 한자된단다. 우라질리아~) 정말이지 박민규 만은 피하고 싶다. 적응 안 된다. 박민규 답지 않게 고삽한 순우리말 들고 나와서 한물간 무림 천하를 융통한다. '윤슬 같고 는개 같아진'(221쪽), 해심, 해미까지는 용납하겠다. 운김, 드레 같은 낱말은 부러 찾아야 했다. 내 무지보다 소설 읽는데 사전까지 찾아가면서 수수께끼 풀어야 할 필요 있나, 부아가 치민다. 박민규는 옆에 순우리말 사전 끼고 이 소설 끼적였음에 틀림없다. 그건 박민규답지 않은 반칙이다. 슈룹은 우산이란다. 용린은 용비늘 하면 되지 이게 뭔 지랄을 떠는가 싶다. 지랄떠는 게 박민규식 소설의 강점이니 용서하자.  곤두박질치는 무림고수들 이야기니 고삽한 순우리말 고어 정도는 감내하자. 그러고 보니 가장 이상적인 이상문학상 후보가 아닌가 싶다.  

 

  윤이형 - 완전한 항해. 이건 뭐 소설 아바타 쯤 되겠다. 아바타 에디션이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자아로 형성되어 있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에디션은 상대의 모든 것을 흡수하여 새롭고 완전한 존재로 태어나는 과정이란다. 루족 창은 결국 에디션을 거부하고 창공을 향해 날아오른다, 파국의 의미는 역사상 달에 가장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라나.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 이런 소설에 적응 안 되는 것 보면 내가 기성세대라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다. 울어야 할지 자위해야할지 역시 판단보류.   

 

  다시는 단편집 같은 것 들고 리뷰 도전 안 할 것 같다. 필요에 의해서 읽은 거지만 리뷰는 간단치 않다. 점점 단편들이 재미없게 느껴진다. 늙는 징후이다.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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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10-01-2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흐름이 좋으네요. 전 매번 막히고 얽혀서 혼자 미로속을 걷는 기분인데...
다녀간 흔적 보고 잠깐 들른다는 것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전 김연수작가의 만물장수처럼 술술 뽑아져 나오는 이야기의 샘물이 좋더군요.
<밤은 노래한다>의 연변에 가 보기라도 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아, 그리고 좋은 이야기 많이 들쳐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다크아이즈 2010-01-21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잘 정돈된 리뷰보고 팬이 됐다는 것 아닙니까? 영광이에요. <술술 뽑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을 제가 질투한답니다. 그 중에 물론 김연수도 있지요.

곡우님 많은 것 배우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