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무르익은 과실처럼 저절로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오토바이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당신들 처마실 술을 내가 왜 사는데? (56쪽)  


  단지, 자신을  배려하려고 술 자리에 앉히려는 한기철 일행에게 저렇게 쏘아 붙이는 아버지 엄시현. 융통성 없는 소갈머리의 소유자. 엄시헌에게  밥벌이의 비루함과 숭고함은 오직 가족의 무사를 위한 것이란다. 가부장적 책임감은 원만한 사회성에의 요청보다 앞서는 것일까?   


  엄시헌은 지나치게 내부적(가족지향주의적) 가부장 제도에 함몰되어 있다. 러셀 할배가 말했다.  '행복의 비결은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라고.  또 이런 말도 했다. '부모에게 사랑받은 것과 같은 특별한 종류의 행복은 만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타고난 권리다.' (버트란트 러셀, 행복의 정복) 엄시헌은 러셀 할배의 조언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안과 밖의 긍정적 환유가 없는 삶이란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의 역할 자체가 맹목적이라 해도 숨 돌려 가며 주변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적의 없는 동료에게(오히려 호의적인) 공격적인 언사로 자기 방어를 해대는 것이 가족을 위한 밥벌기의 온당한 변명은 되지 않을 것이다. 엄시헌이 실제 내 아버지라면? 글쎄 이런 적극적인 변명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시헌은 그 자신이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미스 정이 지어야 하는 여러 가지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61쪽)  - 자신의 이해관계가 맞닿는 곳에서만 엄시헌의 이런 캐릭터가 적용된다. 씁쓸하지 않은가? 그 이유도 오직 아들 둘을 위한 것이었으니.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핍진한 삶의 방식에 내 공감대는 조금씩 무너진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읽는다.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 - 가족을 거두기 위한 가장의 지난한 일상의 숭고함 - 를 넘어서는 뭔가가 있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읽어내려 간다.   

 

  엄시헌은 살아생전 내 아버지의 삶과 달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구차할 정도로 검약했던, 그래서 언제나 내 삶의 괄호 밖이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타인에 대한 배려는 깊었다. 써야할 땐 썼다. 그것이 타인을 향하든, 가족을 위한 것이든.... 아버지 삶의 끄나풀에서 벗어나고자 그토록 원했으면서도 그런 면 때문에 내 아버지에겐 그 어떤 뚜렷한 잘못의 혐의가 없었다. 세상에 대한 도의와 가족에 대한 도리를 동시에 감내했던(엄시헌은 오직 후자에만 치중) 내 아버지 식 삶이 더 온당하다고 느껴지는 건 엄시헌이란 캐릭터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진 것보다 궁색함을 표방했던 내 아버지를 싫어했지만, 가족 제일주의인 엄시헌이 내 아버지라면 경멸했을지도 모르겠다.   


  미스 정과 함께 '인부들이 먹다가 남긴 반병쯤 되는 소주를 비우'(63쪽)려는 알뜰한 쩨쩨함 같은 걸 나는 못 견뎌 한다. 내 어릴 적 겪었던 아버지들의 그 비루한 일상이 내겐 치욕의 저장고나 마찬가지이다. 그 간접 고통이 주는 풍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골방에 앉아 글을 쓰거나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야 했다. 단절이나 침잠은 누가 뭐래도 경제적 고통이 주범이다. 그렇다고 내 안위를 위해 타인이 고통을 무시하거나 이용해도 될까? 내(가족)가 살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줘도 안 되고, 이타적이기 위해 그 고통이 가족을 향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오직 자식을 위해서란다. 저처럼 밑바닥 인생인 동료들을 상대로 도박장을 개설하고 운영하는 것이. 그게 인간의 비루함이라는 걸 깨치란다. 그 야만적 비루함은 언제나 맘에 걸리는 큰아들의 생계와 둘째놈의 공부를 위한 변명거리가 되어준다. 오매불망 내 새끼만 찾는 가족제일주의를 혐오하는(그 대표 격으로 김훈이 있다.) 사람들은 엄시헌을 덜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엄시헌은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기보다 그렇게 살도록 규정지어진 사람이다. 꼭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이 아니라도 세상엔 그런 기질 자체로 태어난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시종일관 담담하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엄시헌의 아내는 없다. 아버지 처세의 곤고함을 강조하다 보니 어머니의 부재는 당연한 것일까? 오랜 세월, 가족 먹여 살리기 위해 귀가하지 않는 아버지 집 문풍지는 한겨우내 몹시도 울었겠다. 감사할 생계비가 있으니 아버지 부재의 가계를 이끄는 고통은 사치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가족을 먹여 살린다, 는 명분이 있으나 내가 보기엔 가부장적 권위가 부여한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엄시헌의 가족  사랑은 일방통행이다. 방죽 정비에 나선 일개 노동자인데, 굳이 그 긴 시간 동안 가족과 헤어져 살 이유가 있을까? 일이 년 외곽에서 마련한 종자돈으로 당연히 가족이 있는 서울에 터전을 잡아야 했었다. 그래야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이 증명된다. 포장마차가 됐든, 작은 분식집이 됐든 지방에서 하는 천변 정비 사업이나 술집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다면 가족애가 남달랐을 터인데, 그 가족애는 아내가 아닌 자식들에게만 할당됐던 것일까? 어느 누가 정지용의 향수에 아내가 덜 부각된 게(누이보다 엄마보다!) 불가사의하다 했는데, 그런 심정이랄까?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멀리서 돈 붙이며, 편지 속에서나 존재하는 아버지여서는 안 되지 않나?  


  오로지 '가족 먹여 살리기 프로젝트'만이 목적이었다는 게 엄시헌의 한계다. 그것을 뛰어 넘지 못한 걸 보면 실재했던 우리 아버지들의 초상과 작가가 구현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 약간은 엇박자를 낸 게 아닌가 싶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한 아버지의 노고는 위대했으나, 꼭 그것만이 엄시헌의 존재이유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엄시헌 자체의 부조리를 독자에게 이해시킬 때 큰아들을 태운 엄시헌의 오토바이는 좀 더 자유롭게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엄종세의 후배 김경한 또한 엄시헌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짧은 단문일수록 중언부언하지 않아야 하는데 확인 차 앞에 나온 내용을 뒤에 다시 설명하는 부분은 구성상 긴장감이 떨어진다. (김경한의 각서 요구 부분 같은 경우) 기왕 쓰는 것 김훈처럼 얄밉게 쓰면 안 되나? 

  감상문을 떠나 문장이나 문체 면에서는 건질 게 많은 작가이다.   

 

 

  질서와 훈육의 특성 속에는 그런 면이 있었다. 공허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치고 질서에 제대로 편입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마찬가지로 질서에 제대로 안착한 사람치고 좋은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래서 엄종세는 최고 우등생보다 여백이 있는 우등생이 팀원이 되기를 원했다. 입맛에 딱 맞는 직원은 없었다. 차선으로 택한 인물이 김경한이었다. (119~ 120쪽)

  남자에게 일이란 그랬다. 일이 없으니 동료가 없고, 동료가 없으니 초상집마저 썰렁했다. 일과 사람은 함께 왔고 함께 사라졌다. 하나씩 차례로 온다면 양쪽 모두에 충실할 수 있겠는데, 한꺼번에 왔다가 한꺼번에 사라지니 직장에 다니던 시절엔 가정에 소홀했고, 직장을 떠난 후에는 가정에 민망했다. (132쪽)  


  이런 문장들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책을 놓기가 쉽지 않다. 글 자체를 잘 쓰는 작가이기 때문에  군더더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문장이 미덥다는 건 그 만큼 작가적 내공을 쌓았다는 증거다. 그가 신문기자라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훈을 빌렸으나(도모유키가 심했고, 능소화나 이번 작품은 극복하고자 했으나 잔재가 남아 있다.) 그 만큼 세련되지 않고, 김경욱만큼 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먼지 훌훌 털어낸 뒤 잘 말린 홑이불(솜이불 말고) 같은 단정함이 있다. 그 정도로도 인정받기 충분하다. 성실한 작가는 부지런히 집필 중이다. 그것 또한 미덥다.   

 

  아버지 된 자의 손은 궂은일과 마른일을 가리지 않는다.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비의 손과 궂은일을 하는 손은 별개가 아니다. 너도 이제 아버지가 됐으니 네 손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가리지 마라. 그리고 네 손이 하는 수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마라. 아버지 된 자, 남편 된 자가 처자식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칭찬이나 상 받을 일이 아니다. 네 처자식이 네 평생의 상장임을 잊지 마라. (166쪽)  


  아들 엄종세가 첫 아이 낳았을 때 엄시헌이 보낸 편지글이다. 서글펐다. 왜곡된 가부장주의의 전형을 만나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다. 밥벌이를 위한 아버지의 노고가 숭고한 건 사실이지만 이런 생각이 전적으로 온당한 것일까? 이런 시각이라면 거꾸로 여자인 어머니에 대한 희생 또한 너무나 당연한 걸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접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가족들 옆에서 충실하게 의무를 수행한 대가로 가족의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여성이 가족을 소홀히 여기고 쾌활하고 매력적인 생활을 유지했다면 아마 가족들은 이 여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러셀(행복의 정복 205쪽)의 충고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엄시헌도 결국 죽어서야 가족에게 이해받는 쪽 아니었나? 가부장적 책임의식이 자신의 비굴하고 야비한 삶을 변명해줄 순 있어도 그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개별자이다. 아버지 또한 그 개별자로서의 존재 증명이 되어야 한단 말이다. 시종일관 작가는 말한다. 시헌이 개차반 같은 일을 서슴지 않았던 건 오직 하나 가족(특히 아들 둘) 때문이라고. 아버지 친구 장기풍의 입을 빌려 이런 설교는 계속 리바이벌된다. 이건 뭐 예수님이 인간 대신 죽어줬으니 평생 그 죗값 하며 살아라, 하는 협박과 뭐가 다른가? 부도덕하고 치사하고 개차반 같은 행동을 해도 자식을 위한 것이었으니 입 닥치라고 훈수 두는 장기풍은 곧 작가의 다른 목소리이다.  


  비슷한 처지의 타인의 고통을 발판 삼아(외면한 게 아니라 이용했다) 가족애를 도모해야 하는 부정은 진정한 의미의 부성애는 아니지 않는가? 거창하게 인류애 어쩌고 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사람이니까 사람에 대한 연민이 가족애에만 한정된다면 그게 사람일까? 그런 아버지 때문에 먹고 살만해졌으니 입 닥치라고? 엄시헌처럼 살지 않아도 자식 교육 시키고, 사람 도의 지키며 사는 이들이 훨씬 많다. 밥 먹여준 아버지는 위대하나 꼭 엄시헌처럼 일 필요는 없다.   


  작가의 말처럼 '아버지를 미화하거나 복고를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부성의 희생에다 점수를 주려고 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 희생이 온전히 가족을 위한 것이라 쳐도 그 방식에 대한 면죄부나 공감은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처럼 엄마를 부탁해, 같은 책에도 알러지가 있는 독자에게라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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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3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3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0-01-15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도서가 백만부 팔리는 날이면 진정 '대한민국 독서강국'이 되겠죠? ㅋㅋ

공 들인 건 아니고, 잘 쓰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은 걸려요. 그래서 잘 쓰는 여우님 같은 분을 존경해요. 먼 발치서 응원할게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