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자. 천 오백 년을 훌쩍 거스르는 타임머신을 타고. 이 황홀한 과거 여행을 주선하는 이는 다름 아닌 <미실>과 <측천무후>이다. 아니 그것은 틀린 말이다. 김별아와 샨사라고 해야 옳다. 이 두 소설가로 인해 미실과 측천무후라는 걸출한 여걸을 만나게 됐으니 여행의 공은 마땅히 그들 몫이다.

  7세기 전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하를 쥐락펴락했던 두 여성.

  일억원 고료의 국내 문학상을 거머쥔 <미실>이나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지지자를 끌어모은 <측천무후>는 분명 다른 소설이다. 그 진휘 여부로 사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필사본 '화랑세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미실과, 사학계뿐만 아니라 영상업계에서도 제법 등장하는 측천무후. 전자는 화랑제도가 숨쉬고 있던 신라시대가 배경이고, 후자는 당나라 초기가 그 무대이다.

  문체에서도 두 작품은 차이가 난다. 우리글로 쓴 미실은 예스럽고 정갈한 문장이 적재적소에 적확하게 구사되고 있다. 고전에서 소재를 따와서 그런지 때론 장점 많은 그 문체들이 고삽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리 큰 단점이 될 수는 없었다. 불어로 발표된 것을 번역한 샨사의 측천무후는 그 담백하고 정갈한 면에서는 미실과 같으나 가끔씩 나타나는 몽환적 분위기는 독자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게도 한다. 따라서 단단하고 정제된 문체라고 상찬하는 세계 언론에 그다지 동조하고 싶지는 않다.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짚어낼 수 없는 번역문학의 한계 때문에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 밴 공통점이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선, 실재했던 두 여걸의 이야기를 여성주의 입장에서 당당하게 이끈 점이 와닿는다. 미실과 측천무후는 본능에 충실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판에 박힌 듯한 요부나 비운의 주인공 역할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운명과 맞섰고, 거침없이 내달렸으며, 끝내 승리했다. 그 승리의 정점에서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야 말았다.

  그간 역사의 모든 주체는 남성이었다. 권력과 야망은 그들의 몫이었고, 복종과 굴종은 여성의 것이었다. 따라서 남성적 역사관에서 본다면 미실과 측천무후는 요부이자, 책략자요, 모사꾼이며 잔인한 모성의 소유자여야만 한다. 하지만 소설에서 그들은 당당한 열정과 솔직한 욕마응 숨기지 않은, 그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고자 했다.

  두 여인이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색공'의 형식디었다는 게 안타깝기는 하다. 성상납을 말하는 색공. 당시의 신분질서나 시대상을 놓고 볼 때 그것은 단순한 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라나 당이나 사정은 비슷했다.) 여성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자발적이고도 고도한 정치적 행위였음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

  누대의 왕과 왕실 남자들을 마음껏 휘둘렀던 미실과 측천무후. 그 둘은 남성중심의 질서에 모반을 꾀하고 스스로 중심이 되고자 했던 당찬 여성들이었다. 절대자로서의 고독들 안으로 잠재우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당돌한 갈망을 희구하던 주체적 삶의 선구자였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온당한 여성의 삶인가. 작은 것 하나에도 상처받기 쉬운 영혼이라면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이러한 근본적인 갈들 때문에 편두통이 따를지도 모른다.

  아직도 여성성에 대한 억압과 왜곡이 심심찮게 보이는 이 시대에 미실과 측천무후는 여성은 무엇으로 사는가게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여성상을 복원해낸 두 소설가의 다아나믹한 상상력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고대사를 사료의 한계 밖으로 끌어어 멋진 이야기로 윤색한 두 작가의 성지에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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