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원고 청탁전화였다. 이곳 문화계의 주된 스폰서인 한 대기업이 마련한 문화행사를 관람하고 난 후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일해야 하는 내 일정이랑 맞지 않았지만 그 일정을 조정해가면서 관람후기를 써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워낙 성실한 분이라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과외로 들어온 수입, 이를테면 원고료나 강연료 같은 것을 연말이면 불우이웃을 위해 기꺼이 내놓곤 하신다. 그 훌륭한 인품을 보고 나도 언젠가는 저리해야지 하고 결심한 적이 있지만, 과외수입은 커녕 수입 자체가 변변한 아르바이트 인생이다보니 한 번도 그 결심을 실행한 적은 없다.
이런저런 안부 인사를 주고 받다가 그 선배 왈. 저 번 고료는 꽤 많이 들어왔지? 한다. 서너 달 전에 선배의 부탁으로 묵은 원고를 건넨 적이 있었다. 관례대로라면 십만원의 원고료에서 세금을 떼고 구만 육천 얼마 정도의 고료가 지급될 터였다. 한데, 너무나 무신경했기에 원고를 넘겨주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해서 얼떨결에 '십만원 넘게 넣으셨어요?' 했더니 아니란다. 거금 오십만원이 입금되었단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원고지 십매 분량의 고료로 오십만원을 주는 기업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동시에 그 사실을 아직도 확인하지 않은 무뎌빠진 스스로를 자책했다. 돈을 좋아하는 속물인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정리된 통장을 찾아보았다. 그런 거금이 입금된 흔적은 없다. 조심스럽게 선배에게 얘기했더니 담당자를 연결해주었다. 담당자의 말인즉슨 행정상 작은 실수로 전표처리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모르고 지냈던 내 불찰은 아니구나,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담당자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살다보면 업무상 크고 작은 실수를 하는 게 사람인데, 나 때문에 몇 달 전의 일로 문책이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나로서는 확인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거금이 입금된 걸 확인했다면 나는 당연히 그 선배에게 확인 전화를 했을 것이다. - 원고료가 너무 과한 것 아니냐고.
어쨌거나 그쪽에서는 다시 절차를 밟아 고료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고료는 선배가 말한 금액이 맞았다. 대기업이 솔선수범해서 문화 전반에 과감하게 투자하자는 취지로 한시적으로 그 꼭지 고료를 대폭 인상했다고 했다. 세금을 떼고 나면 많이 줄어들긴 하지만 그간 다른 어떤 청탁에서도 그리 큰 고료를 보장하지는 않았었다. 원고료 미입금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했다. 해서 고료를 받지 않겠다고 담당자에게 말했더니 그럴 수는 없단다. 이리하여 생각지도 않은 거금이 생겼다. 꼭 금도끼 은도끼 동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은도끼를 선택했더니(거액의 고료는 생각치 않고 원고를 건넨 일) 금도끼, 은도끼 뿐만 아니라 고대광실까지 얻게 된 사내처럼 얼떨떨하기만 하다.
선배에게 전화를 드렸다.
"고료를 입금하겠다는데요. 어떻게 해아할지 모르겠어요."
"당연히 받아야지. (웃으면서) 불우이웃 도우면 되잖아."
착실하게 살아오신 선배님다운 충고였다. 하지만 그분은 이것까지는 모른다. 나야말로 불우이웃이라는 것을.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집 아저씨 왈.
" 뭐 그리 고민하노? 내가 바로 불우이웃이다!"
속물근성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나는 고민한다.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이 거금, 어찌해야 쓰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