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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975년에 기억이 멈춰버린..그리고 80분만 지속되는 기억의 테입을 가진 그
그의 식사를 위해 장을 보더라도 1시간 20분이 지나면
"자네 발사이즈는 얼마인가?" "생일이 언제인가?" ... 다시묻는다
.. 박사, 나(파출부)의 주인이다.
나의 직접고용인은 이쪽(별채)가 아닌 저쪽 (안채)에 살고있는 박사의 형수이다
나는 이쪽에서 현실의 그와 80분씩의 기억을 쌓아가고 싸워가고 있는 동안 저쪽의 그녀는
항상 그만큼의 거리에서 지배하고 존재한다
매일아침 만나도 그는 생일이나 발사이즈를 또 묻는다.
어느날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에 나의 아들이야기가 나왔는데,
"어린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두다니,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일이 아니야!!"
하며 나를 몰아치는 바람에 식탁도 차리지 못하고 집으로 쫓겨왔다
그리고 그뒤로 그의 제안에 따라사실 제안이라기보단 반강제적으로
[아이는 절대혼자있어서는안된다]라는 그의 주장으로 나의 아들과 함께
그의 집에서 저녁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의 10살짜리 아들은 납작한 정수리를 항상 부끄러워 했는데
그는 수학기호 루트를 닮았다고칭찬한다.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야"
그리고 메모지에 기록한다 '새 파출부...와 그 아들 열살 루트'
그때부터였다. 내가 전적으로 박사를 신뢰하게 된것은 아마 루트는 처음부터 믿고 따랐
던것 같다.
박사는 순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순수한 아이를 좋아하고 순수한 소수를 사랑하면서도
0 을 신봉하고 소외된 -1에도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루트는 이제 학교가 끝나면 내가 일하고 있는 박사의집으로 와서 숙제를 하고 식사도 같이 한다
그렇게 우리들의 하루하루는, 박사에겐 매일매일이 새로운 하루였겠지만, 쌓아졌다.
그는 루트에게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루트에게보내는 관심의 1/10 이라도
자신에게 썼으면 저런몰골이 아니였을텐데, 몰골..그는 마른몸에 항상 부스스한 머리 잊지않으려고
써놓은 메모지로 가득한 클립들로 모양이 일그러진 양복차림 이었다.
그날도 내가 잠시 없는 사이 루트가 칼로 손을 벤것에 박사는 벌벌떨면서 미안해하고 또 미안해했다
집밖에라곤 한번도 나가지 않으면서, 운동이라곤 해본적도 없는 그 약한 몸으로 루트를 업고
뛰었다. 매일 모르는 사람으로 만나는 루트에게 그는 그렇게 했다.
그가 아팠다. 나는 처음엔 어찌할바를 몰랐지만, 아픈그를 그냥 두고 가는것은 아니다 라는것은 알았다.
그날밤 나와 루트는 그를 간호하며 별채에서 밤을 보냈다.
그것때문이었다. 갑자기 그만두라는 통보다.
저쪽의 그녀(형수)가, 아마도 계속 이쪽을 감시하고 끝내는 통제하고 지배를 잃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아름다운 수식을 남겨 주고 논란을 잠재우고 다시 일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다시 나와 루트의 하루하루는 한겹씩 포개지고 포개지고, 그에게는 매일매일 새로운 날이었다.
어느날, 그의 1시간 20분짜리 테입이 고장났다.
그래서 이제는 매일볼수 없단다.
하지만 나와 루트는 한두달에 한번씩은 그를 찾아 갔다.
그렇게 또 우리의 기억속에 그는 한겹을 더했다. 포개지고 포개진다.
그는 아마도 더욱 약해질것이다.
하지만 이젠 안다.
내일 그가 우리를 모를지라도, 그가 점점 약해져서 우리곁을 영영 떠나게 될지라도
그가 목에걸고 있는 에나쓰 선수의 카드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것처럼
나와 루트의 기억속에서 매일매일만났던 그는
단단한 결정이 되어 반짝반짝 빛날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