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lowup > 좋은 사람이 좋은 문장을 쓴다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저 제목은 책을 읽다 갑자기 생각나 적어 본 것인데, 촌스러운 문장이군요. 모호하기도 하구요. 그러나 속으로는 문제적 발언 아니냐고도 생각해요. 좋은 사람이 좋은 문장을 쓴다, 는 생각은 논란의 여지가 많을 테니까요. 이 자동 변속 기어 같은 좋은이라는 형용사에 대해서는 먼 훗날 다시 이야기를 할게요.

기왕 말 나온 김에 제가 김연수를 촌스럽다고 여겼던 것도 고백할게요. 그의 촌스러움을 한눈에 알아본 건 제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도요. 가당치는 않지만 유전자에 새겨진 재기가 아니라 노력해 만든 재기라면 좀 만만히 보는 버릇이 있나 봐요.

 

제가 읽은 그의 책은 엄청난 상금으로 기억하는 제 3회 작가세계 문학상 수상작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와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았던 <사랑이라니, 선영아>인데, 데뷔작은 첫 수상작을 이인화의 작품으로 내놓은 문학상답게 포스트 모던했어요. 책을 꺼내와 수상 소감을 보니 이 소설을 나와 함께 뉴 트롤즈의 아다지오를 들으며 87년 대선을 투표권이 없는 눈으로 지켜보았고, <영웅본색> <개 같은 내 인생> <천국보다 낯설은>의 순으로 영화를 보았던 나의 세대에게 바친다고 썼군요.

혹시 웃고 계신가요? 저 때는 저렇게 쓰는 게 유행이었다니까요.

 

이 책에는 저 소설을 쓰던 당시의 상황이 나와요. 쥐가 호스를 갉아먹어 버리는 바람에 방 밑에 98장의 연탄과 9장의 번개탄을 쌓아두고도 전기장판 하나로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던 정릉의 산꼭대기 하꼬방에서 겨울을 나고, 지루한 봄과 여름을 견디기 위해 쓴 게 바로 저 소설이었다고 해요.

어쨌거나 대견하게도 그는 대한민국의 희귀 직업인 전업 소설가가 되었어요. 문학상도 여러 번 타고, 여러 차례 후보에 오르면 결국 곗돈처럼 타먹게 된다는 이상문학상도 몇 년 안에 수상하게 될 테죠. 비아냥거리는 거 아니에요. 그에게는 전업 작가의 결기가 느껴지고, 전 작가로서의 그의 행보와 자세를 심정적으로 지지해요.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화가 이 책에 있네요. 작가가 휴학하고 고향에 내려가 입대 날짜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날, 집에서 운영하는 빵집에 앉아 있는데 스님이 들어오셨대요. 빵과 보리차를 드리고 난로를 사이에 두고 앉아서 그는 랭보의 시집을 읽고 있었는데, 스님이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읽냐고 물어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했대요. 그랬더니 스님이 10년 뒤에는 세상 사람들이 아는 유명한 사람이 돼 있을 겁니다.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대요. 믿을 수 없어 재차 물었는데 스님은 정말이고 말고라고 대답하시면서, 그 무엇이든 10년만 열심히 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 만큼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라고 했다지요.

허무 개그 같은 일화를 읽다가 정말로 크게 소리 내어 웃었는데 마음은 시큰했어요. 저는 김연수가 그런 작가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그는 지나치게 열심인 작가예요. 그 후로 6년쯤 열심히 글을 쓰다가 그는 선배 문인에게 너는 이제 끝났어라는 말을 들었다는데, 스님이 말한 10년에서 아직 남은 4년을 생각하고 용기를 내었다는 전설도 있어요.

 

이윤기 식으로 말하면 내압內壓이 높은 문장, 김훈 식으로 말하면 전압電壓이 높은 문장을 쓰는 작가가 아니어서 그 동안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아요(저런 문장에 대한 동경은 이제는 좀 쑥스러워요). 그러고 보니 그가 소설들로 꽤 형식적 변주를 했다는 사실도 생각나요(읽지는 않았어도). 아무것도 아닌 제가 위의 두 문장을 연결 지어 말하려는 건 주제 넘는 일 같아서, 저는 그러고 보니라는 부사구만 살짝 걸어놓고 갈게요.

내친 김에 한 마디만 더 하자면,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는 아니고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같은 표현은, 무라카미 류가 <69>에서 기똥차게 써먹어서 명백한 오리지널리티를 갖고 있는 말투잖아요. 저도 가끔 써먹지만, 자기 세계를 이루고 있는 작가가 유머라고 구사하는 것이 그런 문장이어서는 안 된다, 고 말하면 너무 엄격한가요?

 

투덜거렸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미세 전류 비슷한 것이 온몸을 돌아다니며 찌르르 찌르르거리는 게, 술 한 방울 입에 안 대고도 기분이 알싸해져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그의 문장들이 정말로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히는 물방울처럼 몸 안으로 흘러 들어 왔거든요. 고압은 아니어도 이렇게 감전될 수 있다는 걸 알았지요. 이죽거리더니 이제 와 웬 딴소리야?라고 타박하지 마세요. 사람은 변한다니까요.

 

타고난 재능, 자기 식의 입담, 소설적 완성도 모두, 비슷한 연배로 자주 비견되는 김영하보다 김연수가 낮은 점수를 받고 있는 것에 저 역시 이의를 달지 않아요. 세월을 견디는 글을 쓰고 싶다던 김영하의 문학적 야망과 달리, 김연수는 내가 죽은 뒤에도 누군가가 내 삶을 추적하고 짐작하는 일 따위를 감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말해요. 그렇지만 저렇게 열심히, 저렇게 쉬지 않고, 저렇게 온몸으로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데, 지금은 최고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최고가 되지 않을까요? (아. 안쓰러운 문장이군요. 애쓰면 이렇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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