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진실한 사랑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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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일롱카, 페터, 유디트. 세 사람의 공통점은 각자 살아온 나날의 기억과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서로에게 실패한다. 기억과 습관은 그들을 이루고 있는 초침이며, 전부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버리게 된다면 자신은 없게 된다는 이치. 세 사람에게서 끔찍하게도 반복되는 것은 다른 문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갖춰야 할 덕목은 조화와 균형이라는 것. 그게 아니라면 사랑은 실패한다는 것.
세 사람은 사랑에 실패한다. 실패 라는 말이 인생의 실패로 들려서는 안되겠지만 인생의 한 부분은 실패이기도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서로에게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명확하다. 살아온 환경이며 집안의 분위기 심지어 먹었던 음식들 조차 그들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의 불균형과 부조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사회적 계급, 그것은 그들의 관계에 소통이 되지 못하는 주범이었다. 페터는 상류층, 일롱카는 중류층, 유디트는 하류층 자녀였다. 세 사람의 고백을 통해 당대의 사회, 결혼이 안고 있는 모순을 이야기 하는 이 소설은 곧 인간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지난 기억이 더 강한 법일세.
페터가 말한 것처럼 그들의 지난 기억은 서로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지 못한다. 고상하고 품격 있는 신사 페터는 아내 일롱카를 사랑하지 않았다. 자신과 계급이 다르기도 하였고 이미 그녀가 들어오기 전에 페터의 마음에는 다른 여인이 있었다. 일롱카는 페터가 유디트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린다. 일롱카의 고백에 나오는 페터는 페터가 말하는 페터 보다는 조금 차갑다. 다른 사람의 시선 안에 내가 들어갔을 때 내가 제대로 갖춘 모습을 하고 있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유디트를 향한 페터의 시선은 뜨겁기도 하니 나는 일롱카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의 고백 속에 나오는 세 사람은 두 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고백체다. 그들은 왜 사랑했던 사람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제 3의 인물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란 그렇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게 되면 감정에 휩싸여, 그 눈빛에 휩싸여 거짓 고백을 하게 되기도 한다. 어떻게든 내 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말이다. 일롱카의 경우가 그렇다. 일롱카는 남편을 기다렸고 남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페터는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내 어깨를 좀 더 높이 치켜세우게는 하여도 내 마음을 앗아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런 짓들은 무모하다. 그래서 페터는 일롱카에게 어떤 식으로든 힌트를 주지만 일롱카에게는 그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이므로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일롱카의 사랑이 내 마음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일롱카의 보편성은 사랑의 비극적인 이면을 보여주며 또한 일롱카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을 지켜내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바람직한 사랑의 태도라고 할까?
유디트 알도조는 (그녀의 이름은 풀네임으로 불러야 어울린다) 페터의 집 하녀였다. 하녀와 도련님의 사랑은 아주 흥미로운 신파다. 하지만 소설은 페터라는 인물로 하여금 격이 떨어뜨리게 하지 않는다. (유디트 알도조의 고백에서 조차 작가 산도르 마라이는 마구 흐트러진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페터의 고백 제목이 '용기없는 사랑' 이란 것은 잘 맞아떨어진다. 그에게 맺혀있는 사회의 단단한 구조물들은 자신이 정말 사랑했던 여인 조차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유디트에게 물질적인 것을 마음껏 누리게 해주었으나 결국 그 물질에 의해 유디트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유디트가 갖고 있던 습관들, 환경들을 이해해주는 척은 할 수 있으나 정말 그녀를 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 구조와 제도 안에 갇힌 우리들의 사랑이 갖는 순수의 기준은 무엇일까. 일롱카에게 등을 보였으므로 페터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순수한 사랑이 이시대에 가능한 것일까 하는 질문 앞에서는 페터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라는 말을 어떤 책에서 본 적이 있다. 페터도 같은 말을 한다. 그걸 옮겨 적을 때 조금 으스스했다. 사랑이 사랑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해서는 안될 것만 같다. 각자 멀리서 사랑하는 대상을 바라보며 사는 게 마땅할런지도 모른다. 어렵게만 생각한다면 한없이 어려운 게 사랑이지만 나는 아직도 사랑은 함께 나누고 보듬어야 한다고 믿는 주의라서, 조금씩 조금씩 빗금 쳐진 내 등을 씻어내려 무늬 없는 상대의 등처럼 만들어 비슷함을, 닮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게 된다. 사랑이 수험생 교실의 표어처럼 노력해서 되는 거라면 그렇게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페터와 유디트의 불발된 사랑은 용기도 없었지만 서로 다치는 걸 꺼린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산도르 마라이는 결혼과 사랑에 갇힌 세 사람을 통해 인간의 모순, 허위, 진실을 파헤쳤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 밑줄 긋느라 다시 한 번 읽은 대목이 여러개다. 잘 된 심리학 서적 보다 이 책을 더 많이 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