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한권, 에세이 세권째. 지금까지 읽어본 무라카미 하루키. 

처음이 그가 선물한 하루키의 에세이. 스무살 그 당시 하루키를 모른다고 무시당했던 기억(정말로 무시). 

이 책을 읽고 하루키의 매력을 다시한번 느끼며, 아니 어쩌면 새로이 느끼며. 
다른 하루키의 에세이집 들을 읽으리라 다짐.
그저 소설은 한권 읽었을 뿐인데 하루키의 책은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맘에 든다는. 
하루키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회적이고 부드러운 문체 속에
시니컬함, 자기 반성, 오픈 마인드. 내가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부분들. 

 

   
  나라고 하는 한 인간이 혹은 한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일본에서 사라져 버려도, 누구 하나  특별히 곤란해 하거나 불편을 느끼지 못 할 것이다. 결코 심사가 뒤틀려서 하는 말이 아니라, "결국 나 같은 사람은 있으나 없은 마찬가지구나"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
하지만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자기의 소임 따위에 바쁘게 쫓기다 보면, 그건 자기의 무용성과 같은 것에 대해서 찬찬히 깊게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
가끔은 생각이 나기도 하겠지만, 내가 없어서 특별히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약간 과장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외국에 오랫동안 나가 있는 다는건, 나 자신의 사회적 소멸을 미리 경험해 보는 의사 체험을 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
외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처음부터 차별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험을 무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차별을 받거나 이방인으로서 말도 안 되는 배척을 받기도 하는 나는 모든 걸 빼앗긴 제로 상태인, 알몸인 나이기 때문이다. ....
그 당시에는 물론 화도 나고, 마음도 상하고, 자신에게 있어 어떤 의미로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속 편하게 도저히 생각할 수 없지만, 나중에 냉정하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내가 일본에 있을 때 항상 느꼈던 갖가지 종류의 복잡한 고민보다는, 이렇게 개인이라는 자격에 바짝바짝 다가오는 직접적인 '어려움'쪽이 내게는 더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 
그러나 '슬픈'이라고 해도 그것은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거나, 외국어가 잘되지 않아 슬프다는 건 아니다. 물론 약간은 그런 점도 있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무슨 운명 때문인지 나에게 있어 우리말처럼 설명의 필요 없이 스스로 명백한 성격의 자명성을 갖지 않는 언어에게 이렇게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에 가까운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쩐지 말을 빙빙 돌리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된다.
그리고 가끔 일본에 돌아오면 이번에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은 정말로 우리에게 있어 자명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그러나 물론 이런 나의 사고 방식은 적절한 것이 아닐 게다. 왜냐하면 분명성에 의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자명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한동안 일본에서 지내면 이 자명성은 내 속으로 다시 조금씩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자명성이라는 것은 영구 불변의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에 대한 기억이다. ..
 
   

 

 

아마도 이 부분의 글은 내가 아주 잠시나마 외국(낯선 곳)에 살아본 경험으로 동의하고 있는 느낌인 것 같다. 역시 어렴풋이 느끼는 부분들을 작가는 이렇게 자명하게 (그는 자명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 글로 표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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