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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 : 무삭제 감독판 (2disc)
유하 감독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두 사람이 너른 벌판을 세상 다 누리는 평온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 흐르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극장 밖으로 나와 버렸다.
보통 같았으면 적어도 몇몇 급한 사람들은 함께 밖으로 나올만도 했으련만
어느 누구하나 따라 나오는 사람이 없었고, 어느 누구하나 기침 소리 내지 않고 앉아들 있더라.
취해있고 싶지 않았다.
죽음의 문 앞에서 마저도 홍림의 뒤를 쫏고 쫏는 가련한 왕의 눈빛에도,
분노와 절망, 탄식과 한숨이 섞여 눈물로 흐르던 홍림의 눈빛에도,
절규하며 사랑하는 이에게 달려들던 왕후의 눈빛에도,
그 어느 누구의 눈빛에도 취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불편한 것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일부러 애써 털어내고 싶었다.
지독한 그들의 결말을 위로하는 듯했던 마지막 엔딩장면처럼 나도
벌판을 달리던 두 사람의 틈에 숨어 그래도 괜찮았다고 그래도 아름다왔다고 애써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세사람이 만들어 낸 고집스런 애증과 애욕과 감정의 잔여물들이
’쌍화점’의 또 다른 제목인 ’상화霜花’처럼 자꾸 내 심장 언저리에 차갑게 주렁주렁 매달리고 있다.
그들은 사랑했을까?
세 사람이 집착하던 ’연모의 정’의 시작은 도대체 어디일까
시작부터 금기였던 그들. 왕과 홍림의 관계도, 왕후와 홍림의 관계도
허락될 수 없던 대상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가 비극의 시작이었으리라.
끝이 보이는 비극.
그럼에도 달려들고 집착하고 품고 내지르고 무모하게 자기 자신을 던졌던 그들
그래서 그들이 한 것은 진정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극중 홍림의 변명처럼 ’한때의 욕정’이었을까...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내 마음을 짓누를때
유하 감독의 인터뷰가 눈에 들어왔다.
부질없는 사랑, 사랑의 덧없음,
한때 눈부시게 피었다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마는 얼음꽃 같은 사랑의 순간성.
분명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랑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 할 수도 없다.
사랑은 사랑이었지만 눈부시지 않은, 아니 오히려 불편하리만큼 적나라한 감정의 산물로서의 사랑.
사랑을 하며 하게 되는 거짓과 욕심과 상처냄과 이기심...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집착하는 ’사랑’때문에 잉태되는 불편한 열매들이다.
그 열매가 너무 독해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상채기를
마음 깊이 내버리고 만다.
그들의 눈빛은 말한다.
영화가 내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런 씁쓸한 비극의 열매들인데
감독은 그것을 화려한 대사나 영상이 아닌
세 주인공 그들의 눈빛과 섬세한 심리 묘사로 집요하리만큼 꺼내보이고 있다.
홍림의 침소에서 오래도록 그를 기다리며 초조했을 왕은 정작 홍림 앞에선 최대한 그 마음을 숨긴다.
이미 눈과 마음으로 왕후를 좇기 시작했던 홍림은
왕 앞에서 숨겨질래야 숨겨질 수 없는 그 변화를 애써 감추려 하고
왕후 역시 몸으로 반응하는 그녀의 욕망을 변화없는 표정으로 숨기고 있다.
그들은 서로의 욕망이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거짓을 말하고 행동한다.
수없이 많은 장면들은 집요하리만치 이런 그들의 긴장관계를 쌓고 또 쌓는 연결 고리들이다.
화려한 세트, 연회장면, 디테일한 소품들도 충분히 시선을 잡아끌련만
그들이 뿜어내는 절박한 긴장관계는 한치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다.
이런 미묘한 마음과 마음의 싸움, 눈빛으로만 드러내는 긴장관계를
영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고 안정되게 -다른 말로 하면 질릴만큼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쌍화점은 어쩌면 상당히 다른 평가를 낼 수 있다.
단순한 이야기 구조와 새롭지 않은 삼각관계에 성정체성이라는 양념을 더해 시대극의 외양을 두른
이 영화는 그 흔한 코믹한 조연 하나 없고 기대할 만한 극적 반전을 노리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 세 사람의 눈빛과 미묘한 심리, 비극의 열매로서의 감정의 중첩을 놓치게 되면
그야말로 평범한 ’이야기’, 지루한 ’치정극’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왕과 왕후, 홍림의 내달리는 감정과 갈등의 파생물들,
감독이 일관되게 말하고 싶어하는 그것들의 덧없음을
세 사람의 눈빛과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와 그들을 둘러싼 기운에서 잡아낸다면
그 이후부터는 지독한 비극의 열매의 쓴 맛이 얼마나 지긋이 오래도록 심장에 머무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본 쌍화점은 연출은 둘째 치더라도
적어도 배우들이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잡아내도록 최대한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왕이 보여주었던 슬픈 연모와 집착과 광기의 눈빛 - 영화 내내 압도적이었다. 브라보~-
건조하고 외로왔던 눈빛이 욕망과 간절함으로 빛나게 되어버린 왕후 - 그녀의 낮고 강단있던 목소리-,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던 자의 회한과 절망과 탄식, 젊은 혈기 가진 자의 욕정과 연모와 치기를
동시에 보여주어 먹먹하게 했던 홍림의 눈빛 - 어느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성적 판단을 하기도 전에 다가왔던 클로즈업에서의 그들의 눈빛은
이미 그 쓰디쓴 비극의 열매를 맛보게 했다.
그렇다면 이미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다 끌어내고 보여준 쌍화점의 평가를 결정짓는
마지막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 즉, 관객의 경험치인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던 것을 빼앗겨 분노해 본 사람이라면
외롭고 추운 마음에 들어온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에 집착해 본 사람이라면
사랑이라 믿었던 것에 비굴하도록 집착하고 결국 배신당해 본 사람이라면
그 모든 감정들이 주는 무게가 무거워 순간 사라져 버리기를 간절히 바래본 사람이라면
아니..적어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부조리와 갈등의 부산물들을 맛본 사람이라면
.........’쌍화점’의 서리같은 사랑에??한 욕망과 숨김 없는 죄와 그것이 잉태하는 비극에 함부로 웃지 못할 것이다.
그 비극의 열매가 결국은 내가 살아내고 있는 내 삶에서의 열매들과 별반 다를 바 없기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서리꽃 같은 사랑의 덧없음이 결국 인생의 깊은 통찰이기에..
지루한 후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 더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연일 언론에서 관심을 표명했던 강한 수위의 베드씬이라던지 동성애,
세 배우의 파격적인 노출에 기대감을 가지고 쌍화점을 대한다면
꽤 실망할지도 모를거라는 거다.
그들이 보여주는 정사들은 어느것 하나 아름답지 않다. 파격적인 횟수와 방법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나 조명은 그들의 육체를 너무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그 흔한 카메라 기법조차 부리지 않는다.
첫 합궁때는 긴장감이라도 감돌았었지만 마지막 서고에서의 정사는
말 그대로 불편할 정도로 ’행위’로만 보인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름답게 보이지 않길 바랐던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들이 연모의 마음이라고 믿는 그 욕망과 집착이 빚어내는 비극이
어떻게 처참한 열매를 맺게 되는지 보여주려는 극단의 장치들이 아니었을까.
두 사람의 육체가 서로 반응하면서 가졌던 나름의 긴장감은
회가 거듭될 수록 불편함으로 느껴지고 결국 보고 있는 관객은 ’제삼자’의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 그 순간에 벌어진 일은 무엇이었나.
오랜 시간 그들의 감정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내가 느꼈던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그들의 결말..그들의 비극이었다.
불꽃 같은 축제의 한가운데 서 있다가 그 자극이 지루할 때쯤 빠져나와
사그라드는 불꽃을 바라보는 자의 만감이랄까.
자극과 쾌감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그것이 주는 허무함과 덧없음의 상념이랄까.
그런면으로 난 세 배우들의 몸을 사리지 않았던 열연에 경의를 표한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 사랑의 표현으로의 정사씬이었다해도 쉽지 않았을터.
금기된 욕망과 끝이 보이는 집착과 연민과 애절함과 죄책감과 욕정 그 모두를
눈빛만으로, 거칠면서도 절제된 행위로만 표현해 내고 결국 끝을 보고야 마는
그 임무를 너무나 열심히 훌륭히 용기있게 표현해 내었다는 것에.
쌍화점의 외양은 ’고려시대’고 ’궁중’이고 ’왕’이고 ’왕후’고 ’호위무사’였지만
결국 ’쌍화점’에 남은 것은 욕망에 내달리고 그 욕망에 다시 집착하고 결국 스스로 불살라 버린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들. 그들 뿐이다.
서리꽃처럼 아름답다면 아름다울 사람들,
하지만 부서져버릴 순간에 집착한 어리석어 더 슬픈 사람들.
그들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심장을 지긋이 누를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