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책갈피의 기분 - 책 만들고 글 쓰는 일의 피 땀 눈물에 관하여
김먼지 지음, 이사림 그림 / 제철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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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0 김먼지.

책 제목과 저자의 이름만 보고 재미있어 보여서 빌렸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작가가 쓰거나 그린 창작물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더해 정말 물성을 가진 ‘책’이라는 사물, 상품, 존재가 되도록 애쓰는 사람 여럿이 달라 붙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여러 출판사에서 몇 년 간 일해온 편집인이고, 그러다가 편집인으로 일하는 고충에 대한 글을 써서 독립출판을 했고, 그 책이 주목받으면서 상업출판까지 하게 되어 내가 읽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신기하면서도 짠했다. 왜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고생이 필요한 것일까. 삶이란 다 그런 건가? 내가 하는 고생은 과연 누군가의 즐거움이 되는 건지 궁금하다. 내가 누리는 즐거움은 또 괜시리 미안해진다. 즐겁기도 하고 지루하거나 괴롭기도 하던 독서 끝에 이런 저런 말을 싸지르는데, 자식처럼 내놓은 책을 그렇게 가혹하게 물어뜯으면 아파할 사람이 작가 말고도 많겠구나, 번역자, 편집인, 교열교정인, 인쇄소에서 일하는 분들, 하여간에 많겠구나.
그래도 읽고 또 뭐라뭐라 주절주절 불평하면서 다른 책 찾아 나서겠지.

처음부터 편집인 되고 싶던 사람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쓴 작가도 쓰는 일에 대한 열망이 엄청 났고, 결국은 써서 펴냈다. 술술 잘 읽히고 책이 나오는 과정에 대한 정보도 주고 짠 한 마음도 주고 아, 책은 읽을 때 좋은 거지 만드는 일에 가담?하기 시작하면 그건 또 무한 고통이구나,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딨어, 그러니 내 하던 일이나 잘하자...하는 자기반성까지…

내 책을 갖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굳이 나무의 영혼을 나까지 탈탈 털어서 폐휴지 만들 필요 있을까 싶기도 한데, 잘 쓰고 많이 읽히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한다. 그런데 요즘은 의욕이 바닥이라 그냥 다 집어치우고 싶다. 일기나 쓰고, 메일은 이제 안 쓰고, 독후감이나 쓰고, 그냥 주절주절 혼자 아무말잔치하면 그건 그거대로 재미나니까. 돈도 안 들고 자원 낭비도 별로 안 되고 내 시간은 잘 흘러가고 그냥 그렇게 살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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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8-11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궁금했어요. 요즘 책을 만드시는 분들의 이야기에 눈길이 가더라구요. 책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으든 열심히 만든 책이 누군가의 손에서 읽히고 있다는 것이니까 무관심보단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8-11 08:49   좋아요 1 | URL
헤헤 이렇게 제 죄책감을 덜어주시네요. 읽히는 건 술술 잘 읽히는 책이었어요.

- 2020-08-12 0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럼고럼 고로케 늙어가면 되지. 그래도 독자 한명 여기 있음다 ..!

반유행열반인 2020-08-12 09:02   좋아요 1 | URL
자꾸 제 못난 글 읽어주시면 저 반할지도...이미 반한지도...그래서 반반... ㅋㅋㅋㅋ
 
뇌는 왜 아름다움에 끌리는가 - 뇌과학과 성선택으로 풀어본 성적 미학의 탄생
마이클 라이언 지음, 박단비 옮김 / 빈티지하우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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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200809 마이클 라이언.

왜 쟤랑 하고 싶은가.에 대한 과학적 접근.

글 제목을 자극적으로 붙였지만, 사실 저런 물음과 호기심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원제에는 뇌가 없다. ‘A Taste for the Beaufiful’인데, 한국어판 내면서 최근에 뇌 들어간 책 잘 팔리는 거 보고 머리를 조금 쓴 것 같다. 부제도 ’뇌과학과 성선택론으로 풀어본 성적 미학의 탄생’으로 뇌과학을 맞춰 넣었는데, 뇌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에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아주 적은 비중이다. 오히려 동물행동학의 비중이 거의 압도적이다. 아 당연한 거였다. 저자가 동물행동 연구의 권위자라고 하네…
섹스 타령 많이 하고 확실히 흥미로운 책이다. 그런데 인간을 가지고 실험 관찰 연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 대부분 동물, 그것도 조금 더 연구에 유리한 개구리, 조류, 곤충(특히 초파리), 물고기가 주인공이고 우리는 이로부터 인간 행동의 경향을 유추해 볼 뿐이다. 인간에 대한 것은 티셔츠 냄새 연구(자신과 다른 유전적 특성을 지닌 남자가 입던 티셔츠 냄새에 여자가 더 끌려했다는…)처럼 유명한 것들이 약간씩 나온다.
이 책은 광범위한 아름다움을 다루지 않는다. 예술적 아름다움은 인간의 전유물에 가까우니 동물로는 확인할 길이 없어서 제외. 성적 매력, 성적 선호, 성적 아름다움 같은 비슷한 용어가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또한 동물의 짝짓기 행동, 그러니까 섹스하고 싶은 상대를 선택하는 경향성에 대해서는 다루지만 인간은 그거 말고도 배우자 선택의 요인이 훨씬 다양한 것을 감안해야 한다. 알만 낳아 놓으면 알아서 크는 개구리나 물고기와 달리 인간은 훨씬 오래(최소 이십 년 넘게) 자손을 양육해야 하고, 또 일회적 짝짓기에 그치지 않고 양육이 다 끝난 후에도 함께 경제적, 정서적 공동체를 누군가와 유지해 나가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은 일시적인 끌림에 대한 설명 정도만 동물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겠다. 여하간에 재미있잖아.

미학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아름다움 또한 인간 바깥의 어떤 절대적인 영역에 궁극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그런 말들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아름다움은 내가 바라보는 상대방이 아닌 내 뇌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당신이 결정자이다. 성적 아름다움은 개체의 형질과 그를 인식하는 감각기관 및 두뇌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43쪽)

진화는 우리 뇌가 적절한 배우자감을 얻어 자손을 남기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 엉뚱한 상대를 만나면 그 사이에 얻은 자손이 생존할 확률은 줄고, 결국 그런 엉뚱한 결정을 하는 개체는 도태된다. 자연선택설과 성선택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적절한 상대를 구분하는 방법은 인간 뺨치게 다양하다.

매력적인 음성으로 우는 개구리나 새(청각), 특정한 색깔과 모양과 크기를 보이는 깃털이나 지느러미를 가진 새나 물고기(시각), 유전정보나 생식 가능성이나 종 구분을 하게 만드는 냄새(후각)까지, 수많은 감각과 이를 지각하는 생물체의 뇌가 특정한 성적 선호를 만들어낸다. 사실 4,5,6장의 이 구체적 세 감각에 대한 연구는 조금 어렵고 재미없기도 했다.
1,2,3장의 일반적인 개관이랑 7장의 시간과 남 따라가기나 비교 대상, 8장의 숨겨진 선호나 포르노가 득세하는 요인 중 하나에 대한 고찰 쪽은 훨씬 따라가기 쉽고 흥미로웠다. 1,2,3장은 읽은 지 조금 되어서 그새 기억이 안 나네...아, 3장에서 ‘좋아함’과 ‘원함’을 구분하는 부분은 나름 중요하다. 좋아한다고 해서 모두가 원하게 되는 건 아니다. ‘원함’까지 나아가는 데는 도파민의 쾌락 보상 경로가 형성되어야 한다. 갈망, 중독, 모두 도파민 짓이다. 다행인 것은 귀여운 메추라기의 짝짓기 조건-반응과 조건-소거 실험을 보니 원함 또한 소거가 되긴 된다...

7장에 시간과 변덕스러운 취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 소개된 일화가 웃겼다. 사회진화이론학자 트리버스가 제시한 자신이 겪은 이야기이다.
‘트리버스는 거리를 걷다가 젊고 예쁜 여성들을 보고 말을 걸기 위해 접근했던 일을 회고한다. 옆을 언뜻 본 그는 흰머리가 잔뜩 나고 등이 구부러진 노인이 다리를 절면서 여성들을 좆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는 걸음 속도를 높이고 다시 어깨 너머를 봤지만, 스토커는 여전히 함께 있었다. 그제서야 트리버스는 스토커가 자신이었으며, 노인은 상점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젊고 예쁜 여성의 존재로 인해 그는 잠시 동안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스스로를 더 젊게 인식한 것이다.’(246쪽)
성욕에 영향을 주는 시간 개념은 생식 주기와 노화가 있다. 가임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선호에 관한 연구(복장, 몸매, 목소리, 태도 등의 매력이 생리 주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그것이 상대에게도 인식됨), 생식이 불가능하기 전까지 남은 번식력을 활용하려는 여성의 성욕 증가 등. 노래 가사에서 술집이 닫을 시간이 올수록 눈이 낮아지는 자신을 한탄하는 내용이 소개되는데, 실제로 이 노래 가사로 영감을 얻어 실험을 했더니 정말로 마감시간이 다가올수록 상대를 선택하는 기준이 완화, 후해진다고 한다. 사람도 그렇고, 개구리도 오랜 시간과 자원을 소비해 생성한 난자가 소멸될 무렵이 되면 그전까지 까탈부리며 걸러내던 이상한 음성의 상대 개구리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한 젊을 때 많이들 사랑합시다…

물고기 연구가 여럿 등장하는데 세일핀몰리와 아마존몰리의 사례가 가장 흥미로웠다. 세일핀몰리는 암수가 짝짓기하는 평범한 종이지만, 아마존몰리는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전원 암컷 뿐이고, 수정 없이 클론을 만들 수 있다. 단 알의 부화에는 정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수정은 아니지만 생화학적 자극을 해야 알이 발달하는 식. 그러니까 아마존몰리는 어미의 유전자만 물려받는다. 아마존몰리가 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다른 종이지만 그나마 유전적으로 가장 유사한 세일핀몰리와 짝짓기하는 것이다.
세일핀몰리 수컷 입장에서는 짝짓기 해 봤자 정액만 도둑질(…)당하고 유전자도 못 남기고 체력도 빨리고 손해인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왜 그러고 사나 과학자들이 궁금해했다.
가설1. 수컷 세일핀은 같은 종과 아마존 암컷 구별도 못하는 바보이다.
->가설 기각. 세일핀과 아마존 암컷 둘을 제시하면 같은 종을 더 선호하는 걸 보면 종 구별은 하는, 완전 바보는 아니다.
가설2. 상대가 누구건 신경쓰지 않는 섹스광이다.
->맞긴 맞다. 종 안 가리고 세일핀과 아마존 암컷 둘과 모두 짝짓기를 한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수컷의 이종간 짝짓기 이유는, (수컷이 이종 선호의 변태라서...는 아니고) 다른 암컷과 있는 수컷에게 또다른 암컷이 더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혼자 멀뚱히 있는 것보다 다른 종인 아마존 암컷이랑이라도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다음 잠재적 짝짓기 상대인 동종 암컷에게 어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 세일핀 암컷은 다른 세일핀 암컷과 있는 수컷을 아마존 암컷과 있는 수컷보다 더 선호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더 예쁜 여자/남자 사귀고 있는 남자/여자가 더 매력적인 것...빈익빈부익부의 근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4장에 시각 관련 성적 선호 연구에서 특정 물고기 수컷에게 원래 없는 커다란 꼬리지느러미를 달아주자 암컷이 몰려드는 결과를 보여줬었다. 이 장면...내가 스무살 때 가르쳤던 열아홉살 과외학생을 일년 후 스물한살, 스무살이 되어 마주쳤을 때를 생각나게 했다. 원래 그 학생은 머리가 숏컷으로 짧았는데 엄청 긴머리가 되어 있었다. 물어보니 붙임머리를 했다고...그러면서 ‘남자가 배로 꼬여요’하고는 자기 언니와 나이트에서 만난 한 남자를 두고 번갈아 가며 만나고...서로 갖겠다고 싸운 이야기를 들려준 게 생각났다… 쓰고 보니 별로 상관은 없는 거 같은데 하여간에 동물 세계에서도 붙임머리처럼 원래 없던 뭔가를 장식적으로 붙여주면 인기가 급상승한다고 한다. 8장에서는 이런 현상을 우리의 유전자 속에 아직 발견하지 않은 선호에 대한 가능성이 숨어 있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면 이것이 발현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그런 숨겨진 선호가 포르노가 번성하는 배경이 된다는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포르노 속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극단의 신체와, 극단의 행위와, 극단적인 태도들이 등장한다. 현실과 비교하면 비정상적인 아름다움, 비정상적인 자극인데 사람들은 그런 극단(책에서는 초정상 자극이라고 한다)에 노출되고, 포르노와 함께 극단의 쾌락, 다량의 도파민을 분출시키는 일이 반복되면 좋아함은 원함이 되고, 결국 포르노중독이라는 성적 페티시가 형성된다. 우리 뇌의 거울 뉴런이 폭력적이고 모욕적인 형태의 포르노에 자극 받으면, 일상 생활에서 파트너와 적절하게 상호작용하는 데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뭐 그렇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신체적으로 성적 아름다움을 서서히 진화시킨 동물과 달리 우리 인간은 문화적 아름다움으로 더 다양한 성적 아름다움을 뻗어나가고 있는 것… 거기에는 음악도 있고, 미술도 있고, 문학도 있고, 패션과 향수도 있고, 포르노도 있고, 하여간에 많다. 동물의 진화적 특성을 알고, 인간에게도 남아 있는 경향성을 알고, 그러면서 또 동물과 인간이 다를 수 있는 여지를 계속 생각해 보면, 사랑과 욕망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깊어지지 않을까 싶다. 내 취향에 맞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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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9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9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0-08-09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고 깜놀했습니다. ‘그전까지 까탈부리며 걸러내던 이상한 음성의 상대 개구리‘.......... 여기에서 엄청 웃고말았다는. 도서관에 있는지 검색중이요 ^^

반유행열반인 2020-08-09 15:11   좋아요 1 | URL
이거 엄청 신간이라 저 제 돈주고 사서 봤어요 ㅋㅋㅋ신간 신청하세요. 책 제목이 제가 지은 거 처럼 이상하지 않아서 빌려도 덜 민망할 듯. 그래도 어울리지 않는 걸 바로잡고자 하는 욕구가 그만...안 예쁜 거도 예쁘다 예쁘다 하고 뇌를 속이고 예쁜 건 내 뇌새끼야 너 고장이야 하면서 또 바로잡고 해야 할 것 같.지...만 역시나 진화가 잘못했네요. ㅎㅎㅎㅎㅎ

파이버 2020-08-09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들을 보면 사람도 결국은 동물이구나...싶습니다ㅎㅎ 나이를 먹을 수록 눈이 낮아지는 것 슬프지만 공감이에요ㅠ

반유행열반인 2020-08-09 15:13   좋아요 1 | URL
사람도 동물이지만 또 제가 동물인 걸 자각하는 동물도 많지 않으니 개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요. ㅎㅎ눈을 낮추면서 오히려 행복해질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 ㅋㅋㅋㅋ
 
[전자책] 물성의 원리 - 식품을 지배하는 네 가지 분자 맛 시리즈 2
최낙언 지음 / 예문당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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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8 최낙언.

오랜만에(거의 2년 만에) 최선생님 책 읽었다. 여덟 번째 책. 사실 이 책 2년 전에 나왔다고 페이스북에서 소식을 들었을 때 두께와 가격과 주제를 보고 흠, 무리다 나에게는, 하고서 구매 욕구를 접어뒀었다. 그러다 이번에 전자도서관에 들어왔길래 읽어보자, 하고 물성의 원리와 물성의 기술을 나란히 빌렸는데...그 때 안 사길 잘 한 것 같다ㅋㅋㅋ 기존의 책들이 식품이나 맛에 관한 교양서 수준이었다면 이 책은 굉장히 본격적이다. 읽을 책 굳이 많은데도 막 도전하는 기분으로 물성의 원리를 며칠 간 꾸역꾸역 읽었다. 읽었다기도 민망한 게 눈으로 글자를 한 번 슥 훑어갈 뿐. 내 뇌새끼는 다른 망상의 나라로 갔다가 맛있는 게 나오면 어, 초콜릿? 헤헤 하며 잠시 집중하다가 다시 다른 나라로 갔다가 반복하며 그냥 시간을 시절을 현재를 죽이고 있었다.

물성의 원리를 다 읽고서 물성의 기술은 그냥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고 다음 기회에 읽기로 했다. 그런데 물성의 기술은 훨씬 더 본격적이다. 원리가 기본 이론이라면 기술은 실전책 개념인데, 온갖 식품의 형태와 식감-물성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 현상, 상태에 대해 그래프, 도표, 사진, 엄청나게 싣고 총망라해 놓았다. 제과류 빙과류 음료부터 육류 전분류 하여간 다 나온다. 짱이다. 식품공학 할 사람들한테는 이 두 책이 바이블에 핵심정리에 족집게 족보 수준일 듯하다. 요리와 음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책 두권 찹 꽂아 놓고 책등만 봐도 뭔가 든든할 것 같다.

밥도 잘 안 챙겨 먹고 주전부리도 잘 안 하는 주제에 어려서부터 가공식품 뒷면의 성분명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읽던 나는 그냥 순전히 흥미거리로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의 분자구조도들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아름다웠다. 장인이 한땀한땀 포토샵?으로 그린, 그것도 크기랑 휘어진 각도까지 따져가며 그린 모식도들이 무지하게 많이 나온다. 식품에 가장 많은 구성 성분인 물,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이놈들은 확실히 두드려패고 간다. 동시에 식품 자체가 원래는 생명체였기 때문에 식품 구성 물질이 생명활동을 하는 동안 식물, 동물, 인체에서 어떤 기능을 어떤 원리로 하는가에 대해서도 자세히 짚고 간다.

단백질의 응고부분은 확실히 기억난다! 전에 뇌과학책이었나 하여간 어떤 책 볼 때 단백질의 접힘현상이 잘못되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뇌의 영역에 대해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단백질이 접히고 펴지는 것에 대해 다시 보게 되어서 오, 하고 유심히 보았다. 굳는다고 하면 뭔가 접힐 거 같은데 단백질은 원래부터 막 머리카락 뭉친 거 마냥 데굴데굴 뭉치고 엉켜 있다가 열이나 마그네슘 칼슘 같은 응고제나 물리적으로 휘젓고 압력 주고 난리를 부리면 뭉친게 펴지면서 길쭉해져서 지들끼리 들러붙어서 응고되는 것이라고 한다. 우아아아아아아 그렇구나. 이제부터 계란 부칠 때나 거품기로 휘핑할 때나 치즈를 먹을 때 막 그 뭉친 먼지 같던 분자 사슬이 좍 펴지고 달라붙는 그림을 생각할 것 같다. 그리고 식품의 용해도와 ph에대한 이야기도 어렵지만 인상 깊었다. 하여간 물성을 이야기할 때는 그게 중요하대… 그리고 또 저자가 아이스크림 만들던 분이라 그런가 초콜릿 코팅된 아이스크림 스르르 입에 녹는 부분 묘사할 때는 완전 공감각 느껴버렸다. ㅋㅋㅋㅋㅋ 제과용 초콜릿도 다 같은 게 아니라 빙과용은 또 다른 녹는점, 식감을 고려하면서 만든다는 걸 막연하게 느끼던 걸 잘 정리해 두었다.

친절하게도 마지막에 물성에 대한 요약정리에다가 다른 맛 책에 나왔던 맛에 대한 요약정리까지 부록으로 제공한다 ㅋㅋㅋ몇 년 전에 읽은 내용 다시 보니까 괜히 반가움 ㅋㅋㅋ 확실히 맛보다는 물성이 어렵다. 그래도 씹고 녹여먹고 마시고 바사삭 쫄깃 쫀득 딱딱 부들부들 우리가 감각하는 것들이 어떤 원리로 그런 느낌을 주도록 만들어지는지 알고 싶을 때 이 책을 보면 좋겠다. 나는 보긴 봤고 알듯 말듯 한데 여하간 나처럼 무식하게 통으로 한 권 볼 책은 아니고...업계 관련자가 두고두고 필요할 때 찾아보면 진짜 좋겠다. 업계 관련자도 아닌 일반인 주제에 강력 추천함...왠지 꼭 그래야 할 기분임….ㅋㅋㅋㅋㅋ졸며 깨며 읽다가 멘탈이 나갔구나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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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8-08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어렵다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08-09 06:34   좋아요 0 | URL
네 ㅋㅋㅋ같은 저자가 쓴 맛이란 무엇인가 나 감각환각착각 같은 건 좀 더 재미있어요 ㅋㅋㅋ

바다그리기 2020-08-09 0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 덕분에 어렵기도 하지만 낯설고 편하게 읽히지 않는 책들을 보면서 90프로 이상 소설에만 치중 되어있는 저의 독서 편식을 반성하게 됩니다. 이 책은 감상을 읽는것만으로도 난해함이 느껴지니 곁눈질을 통해 알게된 것을 기쁘게 여기기로 하고^^, 님의 목록에 있는 책들중 저의 취향과 조금은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어요. 초콜릿홀릭인 저에겐 초콜릿 코팅 아이스크림 스르르 입에 녹는.. 이라는 문장만으로도 침이 한가득 고이는 효과. ㅋㅋ
사르르 파사삭 쪽득의 근원이라니 무지 궁금하긴 합니다.
계속 읽을까 말까 갈등하게 될 것 같아요. ㅎㅎ
읽는 즐거움을 주는 글들 계속 업뎃 해주시니 감사감사~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반유행열반인 2020-08-09 09:28   좋아요 1 | URL
더 즐거운 독서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 책은 도서관에서 스칠 일이 있으면 한 번 훑어나 보시는 걸로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8-09 09:30   좋아요 2 | URL
갈등 후려쳐버리기 기술입니다 ㅋㅋㅋ 제가 본의 아니게 낚시하는 것 같아 그냥 이 책의 존재를 알리는 정도로만...혹시 식품 관련 업계 종사하시면 실무용 장식용으로는 권합니다. 아니라면 졸고 괴로운 건 제 선에서 끝내요 ㅎㅎㅎ
 
[전자책]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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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4 줄리언 반스.

미술은 하나도 모른다. 얼마나 모르냐면 이웃에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프사로 올려달라고 했다가 민망했던 적도 있다....진짜 1도 몰라서, 그리고 랭보가 턱 괴고 있는 표지 그림이 아련해서 읽었다.

미술이나 색채에 대한 책을 볼 때는 항상 아쉽다. 글에 언급한 그림을 조금 더 실어주면 좋을 텐데, 그러자면 책의 두께나 가격이 친절하지 못하겠지. 전지전능의 구글신이 있으니 조금 부지런하면 검색하면 되는데, 굳이 미술에 대해서 썼으면 글만으로도 뭘 좀 남겨줘야 하지 않겠어? 하고 고집을 부리며 꾹꾹 참고 읽었다. 그러다가 열 번째 글까지 읽고 목차를 펼쳐 놓고 화가들의 이름을 주욱 검색해 보았다. 오, 읽고 나니 뭔가 더 알듯말듯한 느낌으로 그림을 보았다. 게다가 같이 읽던 ‘내 인생은 열린 책’에서 앵그르와 제리코를 언급할 때 이 책을 먼저 읽은 덕에 오, 나 들어본 화가다, 할 수 있게 되었다. ㅋㅋㅋ 나머지 일곱 챕터는 읽기 전에 미리 화가들의 작품을 검색하고 읽었는데, 그닥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예술에 관해, 창작자와 감상자의 관점 차이에 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생활 엉망진창이고 창작 과정도 폭력적인 예술가의 작품을 그런 배경 이야기를 제외하고 볼 수 있을지, 알고 모르고에 따라 우리가 그림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미술 뿐 아니라 문학도 비슷한 상황을 접하게 되어서 더 관심이 갔다. 아주 오래전이라면야 시대가 지날 수록 맥락이 사라지고 후대 사람들이 그림 그 자체만 보게 되는 날이 올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는 때가 온 것 같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 대해 너무 많은 것들이 낱낱이 기록되고 남겨지고 있다. 수 년 전에 SNS에 남긴 글, 주고 받은 메시지들의 내용 또는 방법이 올바르지 않음 때문에 오늘의 창작물이, 업적이 절하되고 쫓겨난다. 이제 바깥으로 알려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더욱 도덕적으로 엄격해지고 완전무결해지거나,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사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죽은 예술가들아, 솔직히 니들은 운이 좋았어. 요즘 같았으면 니들 다 매장이야…

아쉬웠던 점은, 책 한 권을 통틀어 다 남자 화가 소개 밖에 없다. 뭐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이니 줄리언 반스 취향에 다 남자 화가 작품만 들어왔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생각난 김에 서점 검색창이랑 초록 검색창에 여성 화가, 쳐보니까 진짜 빈약했다. 나혜석, 로사 보뇌르, 프리다 칼로 정도가 나왔다. ’예술하는 습관’을 읽으니 몰랐던 여성 작가, 화가, 예술가들 그렇게나 많던데. 내가 팍 꽂힌 로메인 브룩스도 있지. 미술이라는 장르 자체가 미친놈들에게 특화된 예술인지, 여성이 미술하는 일이 녹록치 않았던 건지, 많은 여성들이 작품을 남겼는데도 평가절하되고 잊혀지고 드러나지 않은 건지,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다. 궁금한 걸 알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겠지. 미술사도 하나도 몰라. 오, 여성 미술사로 검색하니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라는 책이 나와서 궁금해졌다.
하여간에 줄리언 반스님 책은...다음에는 소설이나 읽는 걸로...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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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8-04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그림이 랭보였군요 저는 아는 화가들부터 골라읽고 있어요 그림이 부족하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그림크기도 작아서 그냥 속편하게 검색하면서 보고 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08-04 18:01   좋아요 1 | URL
저는 아는 화가가 정말정말 없어서 순서대로 읽긴 했는데...기억 날 때마다 검색해보고 싶은 화가와 그림들은 조금 건진 것 같아요 ㅎㅎㅎ

수이 2020-08-05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재미없었다!!!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8-05 18:07   좋아요 1 | URL
어 나도 조금...은? ㅎㅎㅎ쌰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는 어땠어요???

2020-08-05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5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20200803 루시아 벌린.

전작 청소부 매뉴얼을 읽을 때는 온갖 풍파 겪고 힘든 사랑하는 등장인물들을 보며 저게 나야, 나일지도 몰라, 했었다.
두 번째 묶인 책은 읽어 말아 하다가 제목이 참 좋아서 그냥 샀다. 이 소설집에서 제일 마음에 든 소설 중 하나도 같은 제목이었다. 정확히는 ‘환상의 배’, ‘내 인생은 열린 책’, ‘그늘’ 이 세 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다른 소설들은 막 겪은 일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붙인 듯 생생한데 세 가지 소설은 뭐랄까 진짜 소설 같았다. 답답하고 암담한 속에 아니면 지난 일들을 떠올리다가 만약 이렇다면 이랬으면 하고 써내려갔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이번 책을 읽을 때는 나 아니야, 나는 이렇게 살지 않았고 않을 거야, 조각가나 음악가나 약쟁이 남편을 만나지 않을 거고 아이도 넷씩이나 낳지 않을 거야, 공동묘지나 루브르박물관에서 길을 잃지 않을 거야, 투우를 보러가지도 않을 거야 했다. 그냥 읽은 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허름한 집, 거슬리는 또는 따듯한 이웃, 바닷가 생활, 주변을 둘러싼 꽃과 나무와 산, 그런 것들을 나는 이렇게 멋지게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밖으로 나다니고 돌아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

+밑줄 긋기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지고 눈은 쾌감에 도취되어 반쯤 감겼다. 몸도 돌처럼 굳어지는 듯싶더니 천천히 몸을 흔들었고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에트루리아 무덤의 호색적인 그림처럼 관능적이었다. 그의 조용한 신음 소리는 독경을 외는 듯했다. 빅터는 싱글거리며 그런 버즈의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도 주사기를 채워 바늘을 꽂았다. 그리고 약이 주입된 순간 그는 장작불 속으로 쓰러졌다. 그것을 본 마야는 비명을 질렀지만 버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야는 높은 타판코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바닥에 착지하는 바람에 무릎이 까졌다. 넘어져 무릎이 까진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앞을 가렸다. 머리카락과 살이 타는 악취가 번졌다. 마야는 빅터를 잡아 끌어 그의 머리를 모래에 대고 비볐다. 그는 죽었다. (‘환상의 배’ 중)

-난 형편없는 엄마야. 우리아이들을 위해 건강해야 해. 어휴, 난 난파선 같아. 이 집은 난파선이야. (’1974년 크리스마스’ 중)

-훈훈한 바람이 불었지만 제인은 갑자기 몸이 오싹했다. 깊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모든 게 일시적이라는 깨달음이었다. 투우장 전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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