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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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3 루시아 벌린.

전작 청소부 매뉴얼을 읽을 때는 온갖 풍파 겪고 힘든 사랑하는 등장인물들을 보며 저게 나야, 나일지도 몰라, 했었다.
두 번째 묶인 책은 읽어 말아 하다가 제목이 참 좋아서 그냥 샀다. 이 소설집에서 제일 마음에 든 소설 중 하나도 같은 제목이었다. 정확히는 ‘환상의 배’, ‘내 인생은 열린 책’, ‘그늘’ 이 세 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다른 소설들은 막 겪은 일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붙인 듯 생생한데 세 가지 소설은 뭐랄까 진짜 소설 같았다. 답답하고 암담한 속에 아니면 지난 일들을 떠올리다가 만약 이렇다면 이랬으면 하고 써내려갔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이번 책을 읽을 때는 나 아니야, 나는 이렇게 살지 않았고 않을 거야, 조각가나 음악가나 약쟁이 남편을 만나지 않을 거고 아이도 넷씩이나 낳지 않을 거야, 공동묘지나 루브르박물관에서 길을 잃지 않을 거야, 투우를 보러가지도 않을 거야 했다. 그냥 읽은 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허름한 집, 거슬리는 또는 따듯한 이웃, 바닷가 생활, 주변을 둘러싼 꽃과 나무와 산, 그런 것들을 나는 이렇게 멋지게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밖으로 나다니고 돌아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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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지고 눈은 쾌감에 도취되어 반쯤 감겼다. 몸도 돌처럼 굳어지는 듯싶더니 천천히 몸을 흔들었고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에트루리아 무덤의 호색적인 그림처럼 관능적이었다. 그의 조용한 신음 소리는 독경을 외는 듯했다. 빅터는 싱글거리며 그런 버즈의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도 주사기를 채워 바늘을 꽂았다. 그리고 약이 주입된 순간 그는 장작불 속으로 쓰러졌다. 그것을 본 마야는 비명을 질렀지만 버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야는 높은 타판코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바닥에 착지하는 바람에 무릎이 까졌다. 넘어져 무릎이 까진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앞을 가렸다. 머리카락과 살이 타는 악취가 번졌다. 마야는 빅터를 잡아 끌어 그의 머리를 모래에 대고 비볐다. 그는 죽었다. (‘환상의 배’ 중)

-난 형편없는 엄마야. 우리아이들을 위해 건강해야 해. 어휴, 난 난파선 같아. 이 집은 난파선이야. (’1974년 크리스마스’ 중)

-훈훈한 바람이 불었지만 제인은 갑자기 몸이 오싹했다. 깊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모든 게 일시적이라는 깨달음이었다. 투우장 전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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