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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박찬욱 외 지음 / 그책 / 2009년 4월
평점 :
20221118 박찬욱, 정서경, 최인.
그날 공부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 시험이 끝나면, 박찬욱이랑, 데이빗 핀처 전작을 다시 다 봐버려야겠다. 잠시 쉬는 틈에 갑자기 파이트 클럽의 이런저런 장면들이 떠오르곤 했다. 스무 살 언저리에 정말 좋아하던 영화라 새내기 때 대학 국어 수업 발표 시간에 그 영화에 대한 발표를 했었던 기억도 났다. 나는 다시 열아홉, 스물을 살고 싶은 것일까. 어두컴컴한 집구석에서 달아나 넓은 세상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면서 내가 갈구한 것은 아마도 사랑이었다. 그렇지만 스무 살 내내 많은 연애 시도가 실패했고 나는 많이 외로웠다.
늦게 시작한 공부에 짓눌려 살고 힘들긴 했지만, 평안한 서른아홉을 보냈다. 마흔도 그럴 것이다. 어떤 날들보다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걸 느낀다. 다만 그 사랑이 무색하게도 나 스스로가 기대만큼 잘하지 못하는 나를 많이 미워하고 많이 울렸다. 내게 더 잘해야 한다고, 못해서 밉다고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도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이제 술주정뱅이 아버지도, 내 애정과 관심을 거절하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나 하나였다.
수능 전날 수험표를 받으러 간 학교 앞에서 같은 과를 나오고 우연히도 같은 교육청에 발령받아 뭔 일만 있으면 신기하게 마주치곤 하던 친구 선생을 또 만났다. 갑자기 몰려든 엔수생 무리와 엉킨 자동차들 사이에서 교통정리랑 질서 요원을 하고 있었다. ㅋㅋㅋ 나는 반가운 마음에 엔수생들이 길게 늘어선 줄 뒤에 붙으면서 어이, 00(친구이름), 이 학교로 옮겼어? 했고 뒤늦게 나를 알아본 친구는 어, 니가 여기 왜, 뭐야 의대라도 가게?! 하면서 큰 눈이 더 휘둥그레지게 놀랐다. 아니, 약대 갈래다가…망했어. 사실 감독 안 갈라고ㅋㅋㅋ 그런데 수학이 너무 어려워서 내년에 또 만나자. 이 학교는 교육청 옆에 붙어 있어서 수험표 배부 업무를 맡는 대신 감독을 빠지는 은혜 받은 학교였고, 내년에도 높은 확률로 얘는 여기서 또 이러고 있고 나 역시 여기에 또 줄을 설 예정이었다. 하긴 우리 대학 갈 때 수학 점수 안 들어갔잖아. 그 점을 간과했다…그러고 좀 웃다가 얘는 계속 차량 정리를 해야 돼서 나는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
일단 다시 집 앞으로 돌아와서 시계를 보고, 시험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내심 이 버스가 가는 중간에 있는 여고 떨어지면 참 좋겠네, 했는데, 역시 여고 앞까지는 이십분이면 닿았는데, 아쉽네. 차는 고개를 넘어 서울대 정문에서 턴을 하고 종점인 회차 지점에 멈췄다. 차에서 내리니 늦은 가을을 맞은 관악산 자락과 새로 단장한 샤짜 정문이 보였다. 여러모로 복잡한 공간이었다. 내가 시험을 볼 학교는 서울대에서 가장 가까운 공학 고등학교였고, 그 바로 건너편에 직전까지 근무하던 중학교가 있었다. 끝끝내 수학 과학 점수를 엔간한 수준까지 끌어올리지 못한 나는 시험 여드레쯤 남기고 이제 더는 애쓰지 말자, 하고 무너져서 몇 날 며칠 울기만 하고 공부를 거의 손에 잡지 못했었다. 학교 앞에서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는 방문객들을 보다, 다시 학교 안쪽을 멀거니 보며 생각했다. 나는 저 깊은 구석구석에 뭐가 있는지 알아. 너무 오래 머물렀잖아. 저곳은커녕 서울 안에 들어가지도 못할 점수가 나온다고 절망할 일이 아니야. 나는 저기에서 아직 나오지도 못했어. 그랬다. 나는 딱 이십 년 전에 저기에 들어갔고, 또 십 년 전에 논자시까지 다 보고 수료만 해놓고는 석사 학위를 포기해서 아직 적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걸 잊고 올 한해 인생이 다 걸린 고3처럼 대학 못 가면 뭐 큰일 나는 것처럼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를 친 것이다. 곁의 사람이 그게 이상하다고, 왜 진지하게 고3이냐고 그냥 편하게 놀듯이 해야지 일찍부터 열두시까지 안 되는 거 붙잡고 있는 게 스트레스 관리에 너무 안 좋아 보였어, 지금 내가 해도 최소 일 년 해도 될까 말까 한데 이십 년 가까이 문과로 산 네가 그 짧은 시간에 수학 실력이 올라오면 그건 나보다 네가 수학에 재능이 있다는 거지. (그니까 아니란 거 알겠구요…) 당연한 결과이고 또 그렇다고 일 년을 더 해도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세상에는 수학이 맞지 않는 사람도 있는 거라고,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라고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건네왔었다.
그래서 그럭저럭 남은 닷새 정도를 얼른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며 버텼다. 그리고 첫 수능에 비하면 오롯이 오줌 안 마렵게 물 안 마시고, 컨디션 관리에 치중했고, 막 시험장에 같은 학교 선생님들 오는 바람에 게다가 내 시험실에도 나랑 동갑인 동료 교사가 부감독 들어와서 그냥 웃으며 손 흔들어주고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았다.
시간 부족한 적 없던 국어마저 지문 한 개를 통으로 날리고 수학은 평소 나오던 반타작보다는 몇 문제 더 풀어서 히히 기분 좋네 영어랑 과학은 준나 모르겠네… 어려서는 가채점표에 답을 모조리 적어와서 집에 돌아와 이비에스 보면서 답 맞추고 엉엉 울었었는데 이번에는 가채점표 작성은커녕 거의 모든 과목을 제시간 내에 다 풀지도 못해서 하하 내가 대체 답을 뭐라고 썼는지 모르겠다, 하고 그냥 시험지를 다시 들여다보기 싫어서 채점은 안 하기로 했다. 수험 기간 내내 강의 딱 세 시간 들었던 한국사는 확실히 1등급이겠다. (특: 예전과 다르게 엄청 쉬움. 막 작년에는 세종대왕 이런 거 나와서 감독 갔다 와서 재미로 풀어봤는데 한 개 틀리고…올해는 그거보다는 덜 쉽지만 그래도 쉬웠다.) 내 점수는 딱 올해 들인 시간에 반비례해서 나올 예정이다. 12월에 성적표 나오고 기분 좋으면 공개하는 걸로…ㅋㅋㅋㅋ
와 뭔 독후감 쓰려고 하는데 어쩌다 보니 회고담이 되었다… 시험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첫 수능 때 줄줄 울던 것과 달리 그냥 끝났다는 사실만 너무 홀가분하고 기분이 좋았다. 시험 이틀 전에 저렴이 초밥집에 예약해둔 초밥을 휴가 낸 곁의 사람이 찾아와서 온 가족 모여 앉아 초밥을 맛있게 냠냠 먹었다. 다른 변고는 없는 시험이었는데 남고생 뭔 키 180 짜리가 앉던 자리인지 책상이랑 의자가 너무너무 높아서 종일 여덟 시간 가까이 발이 동동 뜬 채 높은 책상에 팔꿈치 얹고 고개 수그리고 문제를 풀었더니 저녁에 목이랑 위팔이랑 어깨랑 하여간에 상체 근육이 너무너무 아파서 고통스러웠다. 타이레놀 먹고 곁의 사람이 마사지해준 덕에 조금 풀려서 겨우 잠들긴 했는데 아직 목덜미가 많이 아프다. 여기서 나의 노화를 절감했다. ㅋㅋㅋㅋ겨우 하루 시험 보는 동안에도 작살이 나고 마는 나의 모가지여…
벌써부터 내년도 개념 강의를 듣겠다고 난리 칠까 두려운가 옆에서는 당분간 좀 쉬라고 미리부터 걱정하는 말을 해서 나도 뭘 하고 놀까 곰곰 생각했다. 박찬욱 영화를 보고 싶은데 음 어느 하드에 영화를 쟁여놨더라…브이오디 이런 거 사서 보면 되나 생각만 하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러다가 아직 헤어질 결심 상영하는 극장이 있길래 월요일에 또 보러 가자 하고 예매해놨다.
그러고는 그냥 책을 보자…모가지 아프긴 한데 나에게는 튼튼한 엘리베이터 독서대가 있잖아… 시험 끝나면 보겠다고 김연수랑 이미상 신작도 미리 모셔두고 그거 말고도 필립 로스 오찬호 이 책 저 책 예비 후보가 많았지만, 뭔가 그냥 통속적이고 쉬운 거 보고 싶어, 이미 아는 이야기, 하다가 책꽂이에 오래 묵혀 있던 박쥐를 꺼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irst 였던가…아 ㅋㅋㅋ피에 굶주린 흡혈귀마냥 나는 좀 낯간지럽긴 하지만 그래도 매 장면이 생생한 서사를 한 번 더 복습하듯 순식간에 읽었다. 박쥐의 소설 버전은 박찬욱과 정서경이 각본 써둔 것을 최인이라는 소설가에게 의뢰하여 소설화한 것이라 했다. 인물 내면 묘사를 직접 자세히 해주니까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이번에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강우가 상현도 태주도 그렇게 좋아하는데 죽이지 말고 셋이 사이좋게 살면 안 됐니…테레즈 라캥도 그렇고 뉴스에 나오던 범죄도 그렇고 누가 자꾸 물에 빠뜨리래… 테레즈 라캥 책과 영화도 본지 아주 오래되었다. 그냥 슬픈 일들이다. 사랑이 식는 순간 그래서 서로 미워하다 죽여버리기까지 하는 걸 지켜보는 일은… 영원한 젊음과 생명과 활기를 얻자고 남들을 죽이는 삶을 기꺼워할 순 없겠다. 다들 그냥 조금 덜 불행하고 더 행복하고 따뜻한 온기에 위로받고 싶었을 것이다. 누구도 물에 빠져 죽고 피 빨려죽고 햇볕에 타죽고 바닷가 구덩이 속에 가라앉아 죽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끝까지 사랑받고 싶었을 거야…
어쨌거나 가벼운 공부 이유기, 독서 회복기(?)로 하루를 보내고, 내일도 또 놀아야지, 공부 안 해도 되지, 하는 생각만으로도 신이 난다. 헤헤. 뭘 잘했다고 신남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