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 직전 신발장을 열어 몇 년 안 신던 샌들을 꺼냈다. 플랫이나 운동화만 신던 내가 백만년만에 크록스 8센티미터 굽의 스트랩 웨지 샌들을 사서 처음 신은 날, 소나기가 왕창 와서 비에 젖어 불은 피부살을 스트랩이 샥샥 벗겨 내어 버렸다. 문득 오래전에 산 샌들이 낮고 투박해도 발이 편했던 기억이 났다. 꺼내어 요리조리 살펴보니 캔버스 재질 밝은 색이지만 보관 전 세탁을 잘해놔서 겉보기도 깔끔하고 멀쩡했다. 그러니 이사 전 신발 왕창 버릴 때도 살아서 새 집 신발장에 안착한 거지. 오늘은 너로 정했다 피카츄! 신어보니 까진 부분과 하나도 안 닿고 푹신한 낮은 샌들, 역시 편했다.

조짐은 겨우 막 단지 입구를 벗어날 때부터 있었다. 오른쪽 발뒤꿈치에 이물감이 있어 뭐여, 뭐가 들어갔어, 하고 보니 신발 안쪽 바닥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이런, 오래 둬서 삭았구만. 오늘만 신고 안녕 해야 겠군. 하고 씩씩하게 걸었다.
몇십미터 더 가니 점점 이상했다. 왼쪽 발뒤꿈치도, 그리고 점점 발바닥 전체로 번져가는 부서지는 느낌. 그러나 출근 시간은 정해져 있고 돌아가서 갈아 신기엔 (아직 시간 있었다고!) 귀찮았다. 조금 불편해도 가서 실내용으로 신고 있는 크록스 슬리퍼로 갈아신자, 하고 계속 걸었다. 직장은 걸어서 삼십 분 거리에 있다.

절반쯤 왔더니, 이제는 표면 껍질만이 아니라 신바닥 자체가 우루루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안 돼…세상이 발 밑부터 무너져내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나를 받쳐 실은 작은 세상이 양쪽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제발…도착할 때까지만 버텨…할 때 오른발목을 고정하던 스트랩과 신바닥 연결 부위 한쪽이 툭 끊겨 덜렁거렸다. 다행히 반대쪽과 발목에 맨 끈이 겨우 붙잡고 있어서 벗겨지진 않았지만 걸음걸이가 이상해졌다. 천천히 부숴져라, 여차하면 남은 길을 맨발로 갈 걱정도 하다가, 왠일로 겨우 여덟시 넘은 시간에 열려 있는 수제화 가게 앞에서 또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고, 하기로 했다. 단신에 다리도 짧아, 그런데 성격은 또 급해 걸음걸이가 매우 빠른 편인데, 신발이 최대한 덜 망가지길 바라며 걸음 속도를 늦추고 보폭도 엉거주춤하며 가만가만가만 걸어 남은 거리를 뭔 정신인지도 모르고 직장에 겨우 도착했다.

슬리퍼로 갈아신고 샌들의 모양새를 보니 처참했다. 바지 밑단 자락엔 가루가 되도록 부서진 신발의 잔해가 허옇게 달라 붙어 있어 탁탁 털어냈다. 아니 분명 아침엔 멀쩡했는데, 그 매끈한 표면 아래 푹신한 쿠션의 세계는 시간과 노화를 버티지 못하고 안 보이는 속에서 다 삭아떨어지고 있었구나. 아니 혹시 내 몸무게가 그때보다 많이 늘어서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냐?

문득 멀쩡히 잘 돌아가는 듯, 더 나아지고 빨라지고 편리해지고 풍요로워진 듯 보이는 이 세계 또한 그 얇은 겉껍질만 들춰내도,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으로 폭 찌르기만 해도 우수수 폭삭 하고 주저앉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이고 공황장애 오겠네.
그리고 출근길에 겉은 멀쩡해 보여도 아직 서늘한 오전인데도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긴장한 표정으로 이상하게 걷는 누군가를 보신다면, 다 사정이 있는 겁니다. 혹시나 맨발로 걷기까지 한다면, 여분의 슬리퍼나 양말이 있으시면 하나 건네시던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모른 체 하고 갈 길 가시길 부탁드립니다.

가루가 된 샌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버리고 책을 빌렸다. 붕괴. 금융위기에 관한 책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녕, 샌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1-07-05 1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경험 있어요. 조리 샌들끈이 ‘단절’을 선언하고 실현해 내는 바람에, 큰길에서 깡깡이로 걸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7-05 10:41   좋아요 3 | URL
고생하신 경험이 있으시군요. 샌들끈 끊어지는 일은 잦은데, 겨울에도 별 생각 없이 신고 나간 방한 부츠 바닥이 닳아서 하필 폭설 오는 중간에 구멍이 나서 막 침수되고 안에 물이 차올라 새 부츠 사 신은 경험도 있긴 합니다…발바닥에 사포나 쇠가 달린 걸까요…

아침에혹은저녁에☔ 2021-07-05 1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신어나 봤으니 다행이네요. 우리딸 저녁에 주문온 샌들 밤에 댕댕이가 잘근잘근 씹어나서 신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습니다 가격이 저렴해서 그나마 다행이었죠

반유행열반인 2021-07-05 12:13   좋아요 3 | URL
댕댕이 개껌 3일 금지!!! ㅋㅋㅋ 물건이 너무 오래되면 가만히 두어도 저렇게 폭삭 삭는 걸 도어라는 소설에서 보긴 했는데 저한테도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자.

모나리자 2021-07-05 13: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에 신발장에 오래 두었던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던 중에 밑창이 떨어져서.. 갈아신고 간적 있어요.
사람의 기가 닿지 않으면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삭나봐요.

반유행열반인 2021-07-05 15:09   좋아요 3 | URL
비슷한 경험이 많네요ㅎㅎㅎ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 게 우리가 버린 것들도 저렇게 부서지고 썩어 분해되겠구나 싶어서요.

Yeagene 2021-07-05 1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신발 진짜 대단하네요..;;;
저도 멀쩡해보인 신발이 신었을 때 이상한 경우 있긴 했어요.ㅎㅎ
열반인님 다리 안다치셔서 다행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7-05 18:22   좋아요 2 | URL
그쵸 안 다치고 맨발로 안 간 걸로 감사하기로 합니다 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7-05 2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지금 회사 슬리퍼 신고 집에 오셨다는 그런 얘깁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7-05 21:42   좋아요 2 | URL
아니 내 슬리퍼가 내 가진 신발 중에 근 오년 간 산 중에 제일 비싸다 아입니꺼(3만5천원 짜리 고오급 크록스 쓰레빠임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7-05 21:45   좋아요 1 | URL
https://images.app.goo.gl/G9drjhnSL6dToCdGA
쓰레빠 부심 일터에서 신 신는 시간이 제일기니깐여 내 발꼬락은 소듕하니까 (그래봤쟈 쓰레빠…)

라로 2021-07-06 2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뜰하신 반열샘!! 반성하고 갑니다. 저 같으면 수제화가게 앞을 지날 때 샀어요. 그 순간을 모면하고자.ㅠㅠ

반유행열반인 2021-07-06 20:45   좋아요 0 | URL
아 그냥 그 가게 신발이 맘에 안 들었을 뿐 ㅋㅋㅋㅋ신발 버리고서 저 오늘 크록스 플랫 하나 더 샀어요 ㅋㅋㅋㅋ고무신을 좋아할 뿐 ㅋㅋㅋ

syo 2021-07-07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만나는 신박한 방법......
샌들이 붕괴하다니 그렇다면 나는 붕괴를 읽겠다!! ㅋㅋㅋㅋㅋㅋ 반님다워서 참 좋아요 😀

반유행열반인 2021-07-07 13:16   좋아요 0 | URL
책은 재미있어 보이는데 너무 두꺼워서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ㅋㅋㅋㅋ

2021-07-07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7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link123q34 2021-07-14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아니.. 위부터 내려오다가 금융위기 책 보신대서 뭘까 엄청 궁금했는데 저롷게 두껍고 어려워보이는 것을.... 응원만 하고 후기라던가 일기라던가만 기다려야겠어요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7-14 13:26   좋아요 1 | URL
잠이 솔솔 오는 멘탈 붕괴 책이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