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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평점 :
-20210603 김금희.
작년 이맘쯤엔 문화센터에서 소설쓰기 강좌를 머리털 나고 처음 수강해 보았다. 첫 시간에는 선생님이 수강생들에게 좋아하는 작가를 물었는데 나는 밀란 쿤데라, 그리고 김금희요, 해서 전혀 다른 작가들을 좋아하는 군요,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지 나는 된장국에 모짜렐라 치즈 넣어 먹는 짓 같은 걸 잘한다.
내 안에서 밀란 쿤데라와 김금희는 어떤 화학작용을 하며 뒤섞이고 있을까. 읽었다는 사실만 남았을 뿐 이미 한 톨도 남지 않고 몸 밖으로 다 배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밀란 쿤데라는 아직 철도 안 난 십대 후반부터 멋도 모르고 좋아하다가 이제 철이 들 쯤 되니 에잇 빻은 할배야 너 노벨상 안 준대니까 그냥 편히 쉬어라, 하면서도 그래도 잘 쓰지 하면서 여태 찾아보는 중이다. 김금희는 읽은 지 겨우 2년 쯤 되었는데 그 사이 나온 책은 다 읽어 버렸다. 나의 한국문학 최애 작가를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꼽을 작가가 하나 있어 행복합니다. 헤헤헤.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을 내내 읽다 보면 왠지 그 작가들의 소설이 넘어야 할, 그러나 넘을 수 없을 산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나는 아마 이번 생에는 이 글 속눈썹 만큼도 못 쓸 거야. 이제는 봉우리 넘을 생각보다는 산허리 둘레길을 둘러둘러 천천히 걷기만 해도 마냥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마에 땀이 배면 걸음을 늦추고, 산길 옆에 핀 쪼끄만 꽃도 보고, 계곡물 쫄쫄 내려오는 것도 보고, 같이 걸을 사람이 있다면 야, 여기 정말 대단하지. 그치 대단해. 네가 더 대단해. 그렇게 지치지 않고 오래도록 마냥 걷듯이 읽고 독후감이나 써도 행복하지 싶네요.
먼저 읽은 이웃님이 작가님이 꽂힌 단어를 언급한 게 기억나서 나도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다. 내가 찾은 희부윰은 세 개. 앗 하나 더 네 개.
단어의 기본형이 궁금해 검색해 보니 2007년 국립국어원은 단호하게 말한다.
-‘희부윰’은 잘못된 형태이며 제시하신 문장을 보니 그 사용도 바르지 않습니다. ‘희부옇게 날이 밝았다.’ 정도로 쓰시기 바랍니다.
꺼져 버려, 냉혈 인간,(116) 국립국어원 놈들. 말이야 만들고 쓰면 있는 거지 뭐. 막상 써 먹으려니 어따가 쓸지 감이 안 오네. 희부윰한 내 머릿속…
+밑줄 긋기
-그가 유키코에게서 마음이 정확히 왜, 어떻게 떠났는지는 끝내 다 설명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눈오는 풍경처럼 온통 환하고 완벽한, 압도적인 충일함에서 시작하지만 일단 지워지기 시작하면 또 눈이 녹는 것처럼 불규칙하게 얼룩이 연쇄되며 진행되니까. (108, ‘마지막 이기성’ 중)
-리애씨는 학생운동의 전통이 있는 독서회에서 활동했는데, 그곳의 여자 선배들이 얼마나 투철한 신념과 의식을 지녔든 간에 결혼 후에는 대개 비슷비슷한 불행에 빠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상한 얘기지만 남편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란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과 학생회장이었던 선배가 남편의 폭력을 피해 리애씨 집에서 자고 간 다음 날, 혁명의 날이 오더라도 거기에 여자들의 자리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노동자보다도, 노예보다도, 제3세계 식민지인들보다도 더 늦게, 어쩌면 영영 해방되지 못하겠구나. (203, ‘기괴의 탄생’ 중)
-가는 길에는 말 그대로 인파를 연속해서 맞았다. 섬에서 그곳이 파도에 파도를 더하는, 그만큼 물살이 센 바다라 죽은 사람도 많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것이 내게 해당하는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는데, 지하도를 걸으며 사람들로 만들어진 파고가 이렇게 끊임없이 내게 왔다가 무심하게 통과해 뒤편으로 사라지는구나 싶자 나의 어떤 것이 위태롭게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자꾸만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도 나를 식별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가는, 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 때문에 내가. (251-252, ‘깊이와 기울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