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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평점 :
-20210123 루시아 벌린.
루시아 벌린의 큰아들 제프 벌린이 쓴 서문을 읽자마자 짐작했다. 이건 루시아 벌린 죽은 뒤 남은 원고들 중 무리해서 낸 책이 아닐까. 예감은 적중해서 집중해서 읽는 도중, 루시아가 30살쯤 되었을 때 남미 가족 여행 중 퍼붓는 빗속에 가족이 온통 병에 걸리고 남편 버디가 금단 현상에 시달리는 장면에서 뚝 글이 끝나 버린다. 육십대 후반의 루시아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걸 미리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런 글을 쓰기 시작했을테고, 삶의 절반도 정리를 못했다.
그렇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는 게, 그녀가 남긴 소설을 묶은 소설집 읽으면 충분하다. 나는 두 권의 소설집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었는데, 그게 맞는 순서인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건 그냥 자기 삶을 갈아 넣어 쓰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글인데. 그런데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겪으며 살았다면 진짜 어마무시한데. 그냥 겪은 일 쓰면 소설이 되어버리는 삶은 축복일까 고통일까. 고통인 중에 쓸 수 있는 게 그나마 축복인 걸까. 그러고나서 그녀의 (인생 초반 절반만 남긴) 회고록을 읽으면서 아, 왜 내 예감 맞았어...더 슬프잖아… 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도 소설로 만날 수 있어서 나한테는 다행이고, 만약 쓰여졌다면 나머지 인생 후반부 절반의 삶은 진짜 눈물 없이는 못 읽었겠다 그냥 소설로 남기길 잘했어요 루시아, 싶었다.
책의 나머지 절반은 루시아가 주고받은 편지를 묶었다. 편지를 출판하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사적이고 내밀한 글을 훔쳐보는 이들이나 그걸 팔아 돈을 벌게 될 후손이야 즐겁겠지만 편지를 쓴 당사자라면 굉장히 부끄럽고 기분이 나쁠 것 같다. 물론 죽어서 모르니 그나마 다행인가… 언젠가 주고받은 수백통의 이메일을 전부 지웠다 다시 살렸다 또다시 지웠다 아 괜히 지웠어 하다가 어딘가 일부 백업이 남은 걸 보고 또 기뻐하다 반복했는데. 나중에 유명 작가 되면 다 지워버려야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1980년대에 루시아 벌린이 자기가 그동안 살았던 집의 문제점을 나열한 글이 첨부되어 있는데, 그거 나도 해보고 싶어졌다. (개인사 TMI니까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좋습니다 ㅋㅋㅋ그냥 정리해보고 싶어서 썼는데 길어져 버림…)
수원, 지동(0-5세):방 하나 넓긴 한데 반지하라 볕이 안 듦. 화장실 밖에 있어서 가본 적 없음(애기변기랑 요강 씀). 부엌도 밖에 있음. 일 안 하고 돈 안 벌어오고 술 마시고 엄마 괴롭히는 아빠.
용인, 김량장리1(5-7세):1층 방 하나에 수원 살던 곳보다 방 절반도 안 됨. 역시나 화장실 밖에 있어서 가본 적 없음. 여름에는 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씻고 겨울에는 엄마가 세숫물 데워서 방안에서 씻겨줌. 저녁에 동생하고 떠들고 놀면 옆집 아줌마가 시끄럽다고 소리질러서 아빠가 창밖으로 아줌마한테 욕하고 싸움. 주인집 오빠가 자꾸 놀리고 괴롭히고 지우개 따먹기하자 그러고 지우개 빼앗아서 울림. 술 마시고 엄마 때리는 아빠.
용인, 김량장동2(7-23세): 1층 방 두 개에 가장 오래 살던 곳이라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옴. 상수도 연결 안 되어 있어 지하수 펌프로 퍼서 써서 가끔 광물질 때문에 우물막히면 아빠가 굴착 작업 하는 거 옆에서 거들어야 함. 나랑 동생 자던 방 벽에 곰팡이 겁나 핌. 이사가서 방 생겼다고 신났는데 곧바로 삼촌 쳐들어와서 몇 년 간 살다가서 방 없어서 서운함. 옆집 살던 우리 자매랑 동갑인 자매가 거짓말킹에 도둑질킹이어서 맨날 뭐 훔쳐감(크레파스, 샤프, 거북이, 이런 건 훔쳐갔다가 마당에서 주웠다고 돌려주며 몇 년간 절도 연습하다 나중엔 지폐 꺼내가고 그건 안 돌려줌…심지어 집열쇠 훔쳐서 따고 들어오다 식구들이랑 마주친 후에야 절교함). 위층 살던 아줌마 성격이 지랄 같아서 맨날 시비검. 거실에서 컴퓨터하다가 맨날 엄마아빠한테 혼남. 술 마시고 조현병 발작와서 입원하고 우울증에 자살시도해서 입원하고 현관 유리 문짝 망치로 부수고 엄마 때리는 아빠.
서울, 신림2동1(20-21세): 엄마랑 집 나와서 머물던 방 하나. 고시원 개조했는지 화장실은 있는데 부엌은 복도 끝에 공동이라 밥 해먹기 힘듦. 창 열면 옆 건물 벽 보이는 빛 안 드는 방이라 맨날 오전 수업 놓침. 나중에 같은 라인에서 조금 높은 층으로 옮겨주긴 했는데 월세도 비싸서 엄마 용인 돌아가고 나서 같은 동아리 언니랑 살기로 함.
서울, 신림2동2(21-22세): 언니랑 월세도 아끼고 같이 살려고 투룸 구했는데 방 크기가 하나는 엄청 크고 하나는 너무 작음. 누가 어떤 방 쓰나로 갈등. 처음에는 큰 방에서 같이 자고 작은 방은 다른 용도 쓰자 했는데 둘다 남자친구 있어서 가능하지 않은 선택지였고 내가 못되서 큰 방 독차지 함. 바로 앞으로 마을버스 지나가면 방이 막 덜컹덜컹 심지어 남자친구랑 흔들흔들만 해도 집 덜컹덜컹 완전 잘못 지음. 주인 할아버지가 온동네 쓰레기랑 고물 다 주워다 쌓아놔서 음침하고 안 좋은 기운 가득. 실제로 집 사는 동안 언니랑 나랑 안 좋은 일만 가득함. 둘다 몸 아프고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둘이 사이 안 좋아지기까지 해서 얼마 못 살고 갈라짐. ㅋㅋㅋㅋㅋ
서울, 신림9동1(22-23세): 아주아주 작은 리모델링한 원룸. 산꼭대기 밭 옆에 있음. 아토피 때문에 다리 피부 다 찢어졌는데 학교가는 셔틀까지 걸어내려가기엔 좀 멀어서 곳통ㅋㅋㅋ방이 너무 작음. 공사 잘 못했는지 벽에 결로랑 곰팡이 생김. 그걸로 나중에 방빼고 나갈 때 집주인 아줌마가 트집 잡고 보증금 안 돌려줘서 싸움ㅋㅋㅋ겨우 돌려받은 보증금(내가 장학금 받고 과외비 모은 건데) 아빠한테 다 털림 ㅋㅋㅋㅋㅋ
용인, 동백동(23-24세): 아빠가 집 나간 엄마 다시 꼬셔서 들어오게 하려고 빚내서 분양 받은 새 아파트. 엄청 넓고 깨끗한데 살았지만 사는 내내 좋았던 적이 없음. 졸업학기 서울 통학하기 너무 멀고 교통 나쁨. 이전보다 훨씬 심해진 강도와 빈도로 주사와 폭력 행사하는 아빠와 진짜 이러다 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 속에 사는 날들. 안 되겠어서 그냥 도망 나옴 ㅋㅋ
서울, 신림9동2(24-25세): 가진 돈 다 털어서 구할 수 있던 보증금 100에 월세 30, 2/3이 지하인 반지하. 여름에 더움. 겨울에 벽에 물흐르고 벽지에 곰팡이 미친 듯이 펴서 아토피 재발ㅋㅋㅋㅋ 인터넷이나 유선방송 달 돈 없어서 피씨방 가서 외장하드에 영화 받아다 집 와서 봄 ㅋㅋ엄마는 누가 자꾸 창밖에서 들여다보는 망상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쩔어 있음ㅋㅋㅋ
서울, 상도동(25세): 취직해서 신나서 이모한테 돈 조금 빌려서 500에 40 지상4층으로 옮김. 계단 겁나 높아서 올라오기 힘들고 배달기사님들이 문 밖에서 휴 씨발 하는 소리 맨날 들림ㅋㅋㅋ. 방 하나인데 막 좁고 길쭉한 희안한 구조임. 몇 달 안 살다가 외숙모가 돈 빌려줄테니 더 좋은 전셋집으로 구하라고 해서 믿고 계약했으나…
서울, 봉천동1(25-27세): 리모델링한 1.5룸?베란다에까지 장판 깔아서 길쭉하고 좁은 방 같지 않은 공간 추가된 곳 공사하는 것만 보고 계약했는데, 갑자기 외숙모 외삼촌 태도 돌변해서 왜 맘대로 집구하고 돈 빌려달래냐고 마통 이자 내면 빌려주든가 하겠다 해서 인연 끊김 ㅋㅋㅋ 다행히 직장에 은행에서 갑자기 대출 홍보하러 왔길래 7퍼센트 이자(...그땐 그렇게 고금리 시대였다)로 첫 빚쟁이 시대가 열려 겨우 입주함. 집 앞:모텔, 집 왼편: 모텔, 집 오른편: 모텔이었다가 원룸 개조 공사중, 집 뒤: 아마도 모텔인 모텔촌이었고, 사는 내내 주변 공사 소음 시달림. 8층이라 볕은 잘드는데 이때 우울증 오지게 와서 자꾸 창문 통해 1층 내려가고 싶은 충동 참다가 결국 병원 다님ㅋㅋㅋ 집주인 아줌마가 까칠해서 입주할 때 보일러 공사 잘못 됐는데 안 고쳐줘서 오래 난방 온수 못 쓰고 퇴거할 때 돈 요구해서 좀 힘들었음ㅋㅋㅋㅋㅋ
서울, 대학동(27세. 신림9동3인데 그 사이 동 이름 바뀜 ㅋㅋ): 돈 떨어져서 다시 신림동 들어감...직장까지 많이 갈아타야 하고 교통 나쁨. 집주인 성격 고약함. 집이 길 옆이 아니라 골목 안 쪽이라 이사할 때 차 못 들어와서 개고생함. 가을인데 얼어죽을 만큼 바람 들어오고 개추움. 여기 살 때 우울증에 수면장애에 성대결절까지 와서 휴직하고 방황하다가 임신까지 함.
서울, 대학동2(28-30세): 아기 낳자고 엄마랑 남자친구랑 설득해서 신혼집구함. 가진 돈 직전 이사 때 다 털어서 돈 없어서 4300만원 대출 땡겨서 6000만원 전세 구함. 이사 오고 두 달만에 남편 군대(연구요원이라 한달 훈련소)갔는데 집에 문제 있다고 공사한다고 나가 있으래서 만삭으로 엄마 집 가 있음 ㅋㅋ살면서 심심하면 고장나고 공사. 심지어 아기 낳고 몇 달 후 겨울에 벽에 결로랑 곰팡이 심해서 아기 아토피로 난리 나서 엄마집 대피가고 단열 공사ㅋㅋㅋ집주인 아줌마 엄청 신경질적이고 징징대고 사람 괴롭혀서 사는 내내 힘들었음 ㅋㅋㅋ다행히 직장을 근처로 옮겨서 뛰어 내려가면 10분도 안 걸리는 건 좋았음 ㅋㅋㅋ그런데 직장 가까워지니 출퇴근할 시간에도 일 더 하고 맨날 더 늦게 퇴근하는 함정 ㅋㅋㅋ
서울, 삼성동(30-32세): 네 강남구 아니고 관악구 삼성동 ㅋㅋㅋ삼성산 아래. 완전 산꼭대기. 어마어마한 각도의 비탈 올라가고 다 왔나 하는 순간 더 가파른 비탈 올라가는 구조. 집 바로 뒤가 산 ㅋㅋㅋ옥상에서 딱따구리 꿩 오소리 같은 거 보임ㅋㅋㅋ 아래층 할머니 4살 아기 층간 소음 항의하며 맨날 쳐들어와서 혼내고 감(4센티 매트 깔아도 집 잘못 지어서 엄청 시끄러움 ㅋㅋ). 동네 길바닥에 개똥천지. 개 너무 많이 키우고 주민들이 산책 시키면서 길에 똥 싸게 하고 절대 안 치움 ㅋㅋㅋ밤에 귀가하면 맨날 똥에 당함… 집주인이 상습 체납자에 채무자라 집이 심심하면 가압류 근저당 난리남. 보일러 고장났는데 주인이 잠수타서 겨울에 고장 안 난 조그만 방에 다 모여 웅크리고 잠 ㅋㅋㅋ퇴거 즈음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집을 교회에 증여해 버림 ㅋㅋㅋㅋ교회에서는 목사님 사택 쓸 거라고 해서 얼른 탈출해야 했고…
서울, 봉천동2(32세-현재): 전세금 뺀 1억에 3억 빚져서 그냥 집 사버림ㅋㅋㅋㅋ남편 아직 졸업도 취직도 못했는데 어케 되겠지 하고 ㅋㅋㅋ빚 아직 다 못 갚음. 3층 저층, 옹벽 바로 아래라 햇볕은 하루에 1시간 쯤 듬 ㅋㅋㅋ 역시나 등기 갑구에 이상한거 막 써 있는 소유관계 복잡한 집이었는데 어케 해결해서 입주. 단지 입구에서부터 에스컬레이터 타고…(혹은 고가도로를 비잉 돌아 올라와서) 스키장 슬로프 같은 비탈을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함. (바로 옆 동네 가파른 비탈에서 봉준호가 ‘옥자’에서 미자가 옥자야 소리지르면서 뛰어내려가는 장면 찍음. 그정도로 가차 없는 각도) 그래도 이사 안 다녀서 좋았음.
올봄에 가까운 곳으로 다시 이사 예정.
원 가정이 너무 힘들었어서 술담배 안 하고 다정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 만나는 게 소원이었는데 당장은 어느 정도 이룬 것 같다. 엄마가 나 어려서 너무 우울해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했는데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큰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웃긴 엄마긴 한데 화 좀 안 냈으면 좋겠다고 하고 ㅋㅋㅋ내가 태어나고서 우리집 점점 형편이 나아진 거지?하고 묻고 그럼그럼-하는 대답 듣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를 웰컴-해주는 홈-이 생겼는데 루시아 벌린을 보면 그게 영원하고 고정적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슬프고 더 소중하고 감사해야지, 하면서 그럭저럭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