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문학동네 30주년 기념 특별판) 문학동네 30주년 기념 특별판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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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면서 한동안 떠들썩했던 천명관의 <고래>를 드디어 읽었다. 예약이 워낙 많이 밀려있어야 말이지. 그렇다고 사 읽기는 뭔가 거시기해서 암튼 오래도 걸렸다. 사실 이 작품은 호랑이 금연하던 시절부터 유명하긴 했었는데,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고래>만큼은 읽어줘야 한다느니, 김훈보다는 천명관이라느니 하는 첨언이 참 많기도 했다. 나는 그런 호들갑들에 오히려 거부감만 생기는데 이유인즉슨 대단하대서 읽었다가 낭패본 게 셀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이 먹고 여성호르몬이 늘면서 손발톱에 이빨까지 다 빠지고 나니까 좋고 싫고를 따지는 일이 뭐 대수냐 싶어 날름 읽어보았다. 만인이 극찬해도 난 절대 만점을 주지 않으리라 했거늘 얼마 못 가서 백기를 흔들고 말았다지. 완패다.


화자의 능글맞은 문체가 감점 요소였다. 아무리 구전 설화의 자유 형식이라지만 과하긴 했다. 허나 이런 단점을 완전히 압도하는 스토리텔링 앞에 고개가 절로 끄덕거렸다. <고령화 가족>에서는 몰랐는데 이 분도 타고난 꾼이셨군, 그래. 그나저나 금복 인생에 어찌나 굴곡이 많았는지 자세한 야기를 듣기도 전에 다음으로 훌렁훌렁 넘어가기 바쁜, 그러면서도 핵심만 콕콕 집어주어 감칠맛깔나는 썰들의 연속이었다. 금복은 생선 장수를 따라 가출한 뒤로 거처도 자주 옮기고 남자도 많이 만나고 이런저런 사업에 손대면서 정말 열심히도 살았다. 사업가의 재능도 있는 데다가 남정네들을 맘대로 주무르는 매력까지 갖춘, 시대와 참 맞지 않는 오버 스펙의 캐릭터라 할 수 있는데, 이미 소설의 형식을 한참 벗어나있기 때문에 어이가 없지만 어디 들어나 보자 했다가 어느새 과몰입되어 그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재밌으면 장땡 아니냐 하게 된달까. 여하간 걸작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책을 진지하게 리뷰하는 건 어쩐지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손가락 가는 대로 끄적이는 중이다. 일단은 계속해 보겠다.


남녀의 도킹 장면이 너무 잦아서 자연스럽게 하루키가 생각이 나더랬다. 그 많은 섹스 신들이 전혀 납득도 수긍도 안 가는 하루키의 것보다야 훨씬 자연스럽고 그럴싸했다. 작중 많은 수컷들이 금복을 거쳐가는데, 어떤 식으로 퇴장하든지 간에 나중 가서 재등장하여 금복에게 영향을 미치곤 한다. 질투에 눈이 먼 남자들의 못 볼 꼴 잔뜩 보고 사는 금복은 사람이 무섭고 삶에 지쳐서 또는 복잡다단한 이유로 살 곳을 계속 옮겨 다닌다. 그리고 매번 새로운 일거리를 구하는데 그녀가 맡은 장사마다 대박을 쳐댔으니 제아무리 순수한 사람이라도 돈맛에 결국 길들여지는 법이다. 그게 뭐 어떤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제 인생을 언제나 정면으로 바라볼 줄 아는 금복이 짠하긴커녕 오히려 인간미가 있어 보였다. 오래 정착하는 성격이 못돼서 그렇지, 그녀는 사랑과 의리에 파이팅 넘치는 면모도 여럿 보여주었다. 다만 투자가 욕심이 되면서 주변인들과의 마찰로 서서히 고립되어가는 사실을 몰랐을 뿐. 그러나 매번 홀로서기에 성공했던 그녀라서 아쉬울 것도 없었으니 거참 이런 만렙 캐릭터를 갖다 쓰는데 재미없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힘들겠다.


서브 주인공이자 금복이 낳은 딸인 춘희의 존재감도 잊을 수 없다. 아무리 슈퍼 유전자라도 그렇지, 돌도 안돼서 몸무게가 30kg를 찍었다니, 뻥카도 정도껏 하시지 작가 양반... 아니 화자 양반아. 드디어 야기가 산으로 가나 보다 했더니 어랍쇼, 진짜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금복은 ‘평대‘라는 오지에 정착하고, 남정네 하나 잡아다 벽돌 공장을 세우게 한 뒤 벽돌 사업에 뛰어든다. 쪼매 시간은 걸렸지만 이 사업도 결국 성공하는데, 말도 못 하고 지능도 낮지만 피지컬만은 강호동의 전성기 시절을 방불케하는 금복의 딸 춘희가 인부들을 따라 벽돌 만드는 일에 재능을 보인다. <고래>의 원제가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는데 그렇다면 진짜 주인공은 금복이 아니라 춘희인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금복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말이지. 뭐 그건 됐고, 자신의 벽돌로 금복은 고래 모양의 극장을 세워 또 한 번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불미스러운 화재로 금복과 지역민들이 전부 타죽고 춘희만 살아남는다. 방화범으로 찍힌 춘희는 교도소로 끌려가 10년 뒤에 출소하여 벽돌 공장을 찾아간다. 텅 비어있는 공장과 마을. 죽음의 개념이 없었던 춘희는, 공장을 가동하면 떠나간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예전 같은 활기를 되찾겠지 하며 홀로 벽돌을 찍어낸다. 그 외로운 작업은 그녀가 세상을 뜰 때까지 계속된다. 내내 울고 웃고 탄식하다가 끝에 와서 이만한 먹먹함이라니, 밀당의 귀재가 따로 없네 증말.


생략해서 그렇지, 비중 있는 인물들이 모녀 외에도 많이 있다. 각자의 서사와 배경들이 주인공들과도 엮이기 때문에 잘 입력해두면 재미가 배나 더 할 것이다. 끊임없는 개척 정신을 보여주었던 금복은 끝내 욕망에 삼켜지고 말았다. 춘희도 오지 않을 사람들을 기다리며 벽돌 만드는 일에 정신을 뺏겨 버린다. 결국 어미의 운명을 딸도 밟은 것일까. 이 작품은 금복이 생선 장사를 하던 때로부터 극장을 만들기까지, 나날이 발전하는 사회의 문명화를 그리고 있어 시대적 배경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두 명분의 인생과 동행하면서 얻은 게 무엇이고 놓친 게 무언지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더 쓰고 싶지만 졸려서 안되겠다. 요즘은 자기 전에 글을 쓰다 보니 꼭 마무리가 이렇네. 이해바라바라바라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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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0-29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호르몬이 늘어났다고 해서 웃음 났어요.ㅋ(꼭 한 번 이상은 웃겨 주시는 센스! 그리고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는 듯한 ‘맘대로 문장‘을 곳곳에 배치하는 센스! 마치 쉬어가는 듯한...)
이 책 5백 쪽이 넘던데 완독하신 것 축하드려요. 요즘 3백 쪽 이내로 출간되는 책이 많은 추세인 듯한데 5백 쪽이 넘으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책이라는 게 작가가 존경스러운 점이네요.
금복과 춘희의 이야기가 맛깔스럽게 요리되고 있는 것 같네요. 모녀의 삶 이야기를 읽고 싶게 만드는 리뷰였어요! 파이팅!!!

물감 2023-10-29 21:35   좋아요 1 | URL
알아봐주시니 다행입니다ㅋㅋ 5백쪽이 진짜 후딱 읽혀요. 가독성과 흡인력이 대단하네요. 문체가 인상깊어서 리뷰에다 적용해봤어요. 그랬더니 막히지 않고 글이 쑥쑥 써지는거 있죠? 신기한 경험했습니다ㅋㅋㅋ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은경의 톡톡 칼럼 - 블로거 페크의 생활칼럼집
피은경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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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이웃인 페크 님의 칼럼집을 이제야 읽었다(죄송합니다). 내가 글쓰기 하수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글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참 고마운 분이시다. 따라서 이번 글은 사심이 100% 담긴 것이므로 그러려니 하셔도 되고, 관심 없는 분들은 그냥 패스하셔도 된다. 근데 나의 사심과 별개로 좋은 글들과 사유 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니 뇌가 좀 딱딱해졌다 싶으면 이런 발상의 전환을 심어주는 책들도 좀 읽어주고 그래야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이 글은 손가락 가는 대로 막 쓸 거라 두서도 형식도 없을 예정이다(죄송함다). 아 그전에 이 얘기를 좀 해야 쓰겄다. 독서가들(거기다 글까지 쓰는) 중에는 소위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분들이 꽤 많은데 나는 이 부류를 매우 싫어한다. 일반화하면 안 되겠지만 지식인들은 대개 오만하고 편협하고 다분히 정치적이라서 그렇다. 그들 바탕에 깔려있는 우월의식이 담긴 글을 보노라면 불쾌지수가 팍팍 오른다. 반면 온화함 속에 위트 한 방울 넣는 분들이 아주 간혹 있는데 난 그들을 일명 ‘지혜자‘라고 분류한다. 지혜자의 특징은 선비나 양반처럼 차분하기만 한 게 아니라 유머러스함을 겸비했다는 데에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이기도 한데 간혹 터져 나오는 까칠함 때문에 잘 안된다(그래서 나는 시니컬함+유머 조합으로 간다). 아무튼 나에게 페크 님은 지혜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분이 쓰신 칼럼을 읽어본다면 내 말을 금방 이해할 것이다. 생활 칼럼이라는 분야의 성격도 있겠지만, 필자만의 부드러움이 (민감할 수도 있을)관전포인트를 지혜롭게 접근하고 받아들이게 해준다. 그래, 이런 점이 내가 지혜자들을 선호하는 이유이다. 뭐 어디까지나 내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취향 존중의 시대 아닙니까~ 그리고 잠시 ‘책 리뷰‘에 대해 좀 말하자면, 전공서나 실용서 같은 비문학은 몰라도, 문학을 리뷰할 때에 너~~~무 그 책에 대한 얘기만 쏟아내는 것도 좀 그렇더라. 리뷰의 컨셉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런저런 곁가지를 붙인 글들이 진짜 내 스타일인데, 그러고 보니 칼럼을 쓰는 페크 님의 글이 딱 내 취향이었네? 어쩐지 좋드라(저 잘하고 있습니까, 페크님?). N성향이 강한 나님은 질문 던지기와 사유 등등 다양한 코멘트가 붙는 글을 좋아한다(그래서 내가 대중적이지 않은 걸까). 아무튼 이런 나의 족보 없는 글과 문체를 부럽다고까지 해주신 페크님의 글은 내 것과 정반대의 느낌이지만 사고의 결은 항상 비슷했었다. 이렇게 책으로 연달아 읽어보니 더욱 분명해진다.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그나저나 평소에 글 좀 써본 사람들은 잘 알 텐데, 내 생각들이 그럴듯한 설득력을 얻으려면 짱구를 무지막지하게 굴려야 한다. 페크 님의 글에는 그런 수고와 노력들이 곳곳에 묻어있다. 예를 들면, ‘나의 베풂이 상대방에게 부담일 수도 있다(61p)‘는 본인의 깨달음이 설득력이 없으면, 그런가 보다 하거나 잘 모르겠다며 무심하게 넘길 독자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의미를 잘 전달하기 위해 서두에 ‘자신의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인식(59p)‘을 미리 언급해둔 것이다. 글이란 것이 참 그렇다. 정석으로 배워 기본기 탄탄하고 논리적인 글도 좋지만, 아마추어의 부족하지만 진정 어린 글이 훨씬 더 대중적이고 호소력을 지닌다. 글쟁이라면 다들 한 번쯤 이 글쓰기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오는데, 그랬다가 괜히 개성도 잃고 글쓰기에 흥미가 없어진 경우를 많이 봐서 그런지 생 초보자가 아니면 나는 말려주고 싶다. 좀 시간이 걸리고 빙빙 돌아가더라도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이 책의 ‘결핍의 힘(136p)‘이라는 장에서는 열등감이 내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비전공자, 그러니까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느끼는 장벽과 현타와 자격지심을 너무 안 좋게 보지 말자. 그런 게 있어준 덕분에 나도 이런 글 한편을 작성할 수가 있는 거고, 다양한 예술 문화가 탄생하는 것이니까. 그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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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8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28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야의 이리 을유세계문학전집 104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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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은 아무래도 헤세 문학을 말할 때 mbti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한심하단 건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 말고는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INFJ는 16가지 유형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알기 힘든 유형으로 알려져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 INFJ를 ‘예수 아니면 히틀러‘라고 말하더라. INFJ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골칫거리라면 모든 만물에서 선과 악을 동시에 들여다본다는 것. 그러니까 양측의 상황을 판단하고 몇 수 앞을 내다보기까지 하는 시뮬레이션들이 한꺼번에 작동한다고 보면 된다. 어찌 보면 참 피곤 답답한 이 시스템은 내가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훈련으로 얻어진 기능도 아니다. 아무튼 나의 감정과 욕구보다 보편적인 관점과 입장에서 판단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느 한쪽 편을 들기가 불가하여 정말 어쩔 수 없이 중립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세상을 겉도는 ‘황야의 이리‘가 탄생하게 된다. 헤세는 이중인격자로 낙인이 찍혀버린 INFJ들의 모순된 삶과 자기 연민의 종결을 위해 <황야의 이리>를 써냈다. 이 책은 나 같은 극 소수파에게는 바이블이나 다름없지만 그 외 분들은 딱히 뽑아먹을게 있을까 싶다.


황야의 이리들을 가리켜 원래 혼자가 편한 사람, 남들과 잘 못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여기에 당사자들은 일일이 해명하려 들지도 않으니 더욱 그런 캐릭터로 굳혀져버린다. 도리어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를 포용하지 않는 타인을 헤아리기에 바쁜 이리들이다. 단언컨대 이리는 절대 고립되기를 바란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두와 잘 지내고 싶어서 늘 다가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리들의 어정쩡한 스탠스를 감지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애매한 거리 두기를 하게 되고, 예민한 이리들은 그 분위기를 읽고서 남몰래 절규한다. 왜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것일까 거듭 자책하면서. 근데 또 애정결핍처럼 보여지고 싶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척, 오늘도 내일도 스마일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정말 매일 매 순간이 모순과의 정면충돌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타고나길 몸 사리는 게 있어서 겉과 속이 다른 음침한 최약체라는 오해를 많이도 받는다. 이것 또한 같은 이유로 해명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보는 게 서로가 편한 길임을 잘 아니까. 헤세는 이 방황하는 예술가 기질의 영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심층 분석하였다.


다시 말해 이들의 삶은 실체가 없고 어떤 형태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보통 판사, 의사, 제화공, 교사들 같은 부류의 영웅이나 사상가 또는 예술가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들의 삶은 영원히 떠다니는 고통스러운 움직임이고, 부서지는 파도처럼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찢어져있다. 만약 삶의 이런 혼돈에서 빛을 발하는 저들의 독특한 행위와 사고방식,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없다면, 저들의 삶은 끔찍하고 무의미할 것이다.(65p)


이들은 대체로 자극적인 세상사에 썩 흥미를 갖지 못하는데, 그렇기에 온갖 유희와 쾌락과 부를 쫓는 일반 시민들과의 유대관계가 결코 쉽지 않다.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껴 아예 돌아선다면 차라리 나을 것이나 하필이면 또 이상주의자라서 인류애가 충만하다는 게 문제다. 아무튼 다시 mbti 얘기로 돌아오면, 나 자신을 고정틀에 가둔다거나 일종의 가스라이팅하고 다를 바 없다는 주장도 십분 이해한다. 그렇지만 자신을 발견치 못하고 평생 방황하며 살아온 나 같은 이방인들은, 스몰토크 용도에 불과한 mbti가 나를 알기 쉽게 정의해 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헤세도 그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자기복제의 글들을 연거푸 써왔을 터. 그토록 오래 연구해도 늘 제자리걸음인 자신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아내서 발 뻗고 맘 편히 잠들어보고 싶었을 것이리라.


나는 이 작품을 헤세의 베스트로 꼽는다. 심사숙고하던 평생 숙제를 이 한 권에 전부 집약했다는 점에서 가히 마스터피스라 하겠다. 정말이지 <황야의 이리>에서는 질문하기에 바빴던 지난날들과 달리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이질성과 시민 사회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과 조화가 중요함을 수차례 강조하는데, 그중 내가 놀란 포인트는 이것이었다.


... 이들에게는 고통 속에서 정신이 강해지고 유연해지는 경우 유머로 나아가는 화해적인 탈출구가 남아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민은 유머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없지만, 유머는 늘 어떻게든 시민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모든 황야의 이리가 자신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유머라는 상상의 영역에서다.(79~80p)


바로 이리들의 유일한 탈출구가 유머라고 언급한 점이다. 이것은 줄곧 이방인으로 살아오면서 내 나름 내렸던 버팀의 방편이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도 꼭 유머를 넣어 환기시키곤 했던 건데, 그동안의 여정이 헛걸음한 게 아니어서 아무튼 천만다행이다. 솔직히 사는 게 힘들다 보면 탈출구를 생각하긴커녕 다 운명이고 팔자려니 하며 체념해버린다. 그러다 자연스레 죽음의 세계를 그려보기도 한다. 헤세 또한 삶에 대한 갈망에서 고통이라는 죄를 추구하는 자신을 발견했고, 참회하며 살아가야 할 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겨왔다. 하여 그 속죄의 굴레를 바라기까지 하는, 자기 연민의 끝을 보여주는 것이 이리들이다. 마치 그런 배역을 맡은 배우가 제 역할 소화에 최선을 다하듯 말이다.


주인공이 술집에서 만난 여성과의 대화에서 온갖 뼈 때리는 말들이 오고 간다. 사는 게 어려운 일이라던 그에게, 더러워진 안경과 신발을 닦은 뒤 춤이나 추자는 그녀. 춤은 절대 못 춘다는 그에게, 살면서 어렵고 복잡한 일들은 다 해놓고 정작 단순한 일들은 못 배웠느냐고 타박한다. 그렇다. 그저 숲 밖에 볼 줄 모르는 이리들은 눈앞에 있는 나무부터 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헌데 그게 다 큰 어른이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창피하고 한심하게 느껴져 계속 회피한다는 게 문제다.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옳지 못한 일, 나와 맞지 않는 일이라며 속단해버리는 나쁜 습관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곧 이리들을 소외와 배제에서 해방시키는 첫걸음이다. 여튼 그녀와의 달콤살벌한 대화들을 한 줄로 압축하자면 ‘별것도 아니면서 착각 좀 하지 말라‘ 되시겠다. 결국 이리도 남들과 같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얘긴데, 아 진짜 제대로 뼈 맞았다.


이 팩트 폭력은 꿈속에서 만난 괴테와의 대화로 이어진다. 괴테를 동경해온 주인공은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다른 괴테의 태도에 비아냥거린다. 막말로 예술병에 걸린 그에게 너무 진지하게 살지 좀 말라는 괴테의 이 답변은, 나 같은 극 소수파들에게 꼭 필요한 처방전이었다. 이것은 앞서 유머의 중요성과도 연결된다. 이상주의자는 현실주의자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날개를 접고 우주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야 한다. 겁이 많을수록 더 부딪혀보고 투쟁해서 뭐든 체험해 버릇 해야 한다. 이제껏 나랑 맞지 않는다며 멀리했었던 것들이 사실 시도해 볼 용기가 없어서였음을 몸소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만 알아두어도 다시는 뼈 맞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나의 관심사는 대개 평범하고 대중적이지 않음을 알기에 어떤 분야의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해낸들 그와 별개로 자존감은 항상 낮은 상태이다. 다만 그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아서 친절과 겸손의 덕목으로 감추곤 하는데, 이같은 강박적인 반듯함이 (찐) INFJ들의 디폴트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곧 이리들의 고질병이자 난제임을 알고서 헤세는 금단의 세계로 나를 계속 끌어들인다. 춤과 마약, 섹스 등 주인공이 겪는 체험은 온통 향락에 관한 것들인데 이런 자극을 줘서라도 ‘웃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 싶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모든 사람의 눈에서 파괴 욕망과 살인 욕망이 너무나 밝고 솔직한 모습으로 웃는 것을 보았다. 내 안에서도 이처럼 붉고 투박한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나 활짝 웃고 있었다.(268p)‘ 이렇듯 이리의 광기가 어디로 어떻게 튀어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 아니면 히틀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깐.


헤세가 거듭 강조하는 그놈의 체험. 당연히 중요하고 나도 물론 그러고 싶지만, 정작 그 길로 안내해 줄 가이드가 없다는 게 문제다. 주인공을 체험의 세계로 인도한 헤르미네나 마리아 같은 동료를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현실은 소설과 달라서 정답을 알려줘도 실행이 어려워 금방 좌절하고 만다. 무엇보다 관계와 협동 없이 홀로 하는 체험들은 어떤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반드시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있어야만 한다. 하여 무도회장을 찾은 주인공처럼 나도 사람들을 여럿 만나는 장소를 종종 가보곤 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있을 곳은 아니라는 생각에 조용히 물러나버린다. 기 빨리는 기분도 싫지만 그보다도 소외되는 기분이 싫은 이유에서다. 아무튼 작품의 진행형 결말처럼 우리 이방인들은 마음을 수양하며 묵묵히 오늘을 걸어가야만 하리라.


언젠가 한번은 내 속 깊은 이야기를 남김없이 털어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겨서 너무 감사한 독서와 글쓰기였다. 정말 속이 다 후련하다. 이 글로 고구마를 잔뜩 먹었을 당신에게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But 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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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0-23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세가 오늘날 MBTI 하면 INFJ 가 나올까요? INFJ가 매력적인 MBTI인거 같습니다~!! 이 책 헤세책 중에서 좀 거친편인거 같아요 ㅋ


물감 2023-10-23 23:57   좋아요 1 | URL
네, 새파랑님. 헤세는 확신의 INFJ입니다. 저와 이 정도로 겹치고 공명하는 걸 보면요ㅎㅎ
저는 이 책이 거칠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는데, 그렇게 느낄 수도 있군요! 아무튼 최고였습니다. 로쟈 이현우 님도 <황야의 이리>가 헤세의 대표작이라고 하셨슴다🙂

잠자냥 2023-10-24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물 좀 줘요. 이리 물감 님 ㅋㅋㅋㅋㅋㅋㅋ
제가 F가 아니라 T여서 이 작품에 크게 공명을 못했나 봅니다.
무튼 이리 물감 님 리뷰 읽으니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기도 하는데....T라서 모르겠네요.

이상 유머의 중요성을 아는 INTJ 올림. 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10-24 13:56   좋아요 1 | URL
??? : 나를 황야의 물감이라 부르라... (모비딕 VER.)

이왕 과몰입한 김에 좀 더 오바 떨자면, 이 책은 INFJ에 대한 고찰록이라 다른 유형들은 얻어갈 게 없겠다 싶어요. 그나저나 유머의 중요성을 알고 계시다니, 자냥 님은 배우신 분이 틀림없군요 ㅋㅋㅋㅋㅋ
 
가난한 사람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선영 옮김 / 새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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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등한시했던 러시아 문학도 슬슬 읽어볼 생각이다. 입문작으로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랐는데 과연 듣던 대로 상당히 골 때린다.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바치고 싶어 안달이 난 두 남녀의 서간체 소설인데, 주인공의 찌질한 감성과 나사 풀린 문체가 전혀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있어 묘하게 매력적이다. 오로지 생계를 위한 글쓰기였기에 기존의 교양 있고 점잔 빼는 스타일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워낙 거칠고 날것의 느낌이라 혹평이 쏟아질 법도 한데, 이 문화충격 MSG 덩어리에 모든 이들이 무릎 꿇고 찬양했다 하니 진정 타고난 이야기꾼이 틀림없다.


문학의 세계에는 참으로 온갖 캐릭터가 다 있다. 순화해서 말하면 좀 이상한 사람이고, 직설적인 표현으로는 정상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여기에는 그렇게 타고난 유형과 후천적으로 이상해진 유형이 있는데, 주인공 마카르는 둘 다 해당하는 제3의 유형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야생적인 사고가 인물에 녹아든 데다, 가난 속에 찾아온 말년의 사랑으로 살짝 맛이 가 있어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순애보가 너무나 투명해서 불편하긴커녕 간절한 사랑은 가난할 때라야 나오는 법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뭔 헛소리냐 싶겠지만 원래 사랑이란 게 사람 바보 만들기에 일등 공신 아니었던가.


47세 중년 아재인 마카르는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17세 고아 소녀 바르바나의 후원자를 맡는다. 갑자기 생긴 여자 인맥에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던 마카르는 간이고 쓸개고 다 갖다 바칠 분위기다. 정작 그의 주머니 사정은 말 안 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없는 돈 쥐어짜서 이것저것 선물해대니 소녀는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면서도 좋아해 주니까 마카르는 무리해서라도 물질 공세를 해가며 소녀의 미소를 보고 싶어 한다. 그는 이 모든 과정에서 연애 초보자들이 겪는 오류들을 범하게 된다. 늘 그렇듯 의도만 좋았을 뿐인 상황이 반복되자 나이 먹고서 이 무슨 추태냐는 말이 목밑까지 차올랐지만 그 나이까지 연애 한 번 못해봤다고 생각하니 뭐 이해는 된다. 사실 마카르가 모태솔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위기상 확실해 보인다.


아무튼 마카르의 부담스러운 직진도 썩 싫지만은 않았던 바르바나. 어차피 친구도 없고 할 일도 없었으니 답장 편지를 쓰는 재미에 푹 빠진 그녀였다. 말로는 친척 관계라곤 하나, 이들의 편지는 연인 사이의 비스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어느새 아슬아슬한 썸 타는 기분을 두 사람도 느낀 것이다. 종종 방문 와달라는 소녀에게, 관계가 들켜서 좋을 게 없다는 마카르. 그러니까 본인도 스스로의 문제를 알고는 있으나 지독한 빨간 맛의 노예가 되어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과 형편을 걱정하는 바르바나에게 허세를 부리고 자존심을 세우는 등 둘도 없는 상남자를 연기하기에 이르렀다. 알았으니까 제발 멀쩡한 옷 좀 사 입고 다니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해줘도 대체 들어먹지를 않는다. 언제는 그녀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고 하더니 말이다.


마카르는 본인의 열렬한 사랑꾼 모습에 잔뜩 취해 있었다. 어쩌다 그녀가 생활비나 건강 문제에 시달릴 때면 정신이 들기도 했지만 그의 순애보는 이제 투명성을 잃어버렸다. 언뜻 보면 사랑꾼의 대명사인 돈키호테와도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달랐다. 돈키호테는 사랑 말고도 명예가 있었기에 초라한 행색에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마카르는 남들이 자신의 가난을 어떻게 생각하든 관여치 않는 듯했다. 단지 내가 나를 어떻게 여기는 지가 중요했을 뿐. 그런 믿음과 마인드가 잘못인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불편을 겪는데도 고집을 부리는 태도가 문제 되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가난한 사람끼리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제목답게 작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 여러 모양의 가난함이 나중 가서는 하나의 불행으로 귀결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서 가난은 지겹도록 구경할 테니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평론가 이현우는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아우르는 주제와,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핵심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라고 했다. 저자는 인간의 존재를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가지와, 공통된 하나의 뿌리 중 어느 쪽으로 보았을까. 자칭 인류학자인 나님은 이 질문의 해답을 찾고자 도스토옙스키를 파헤쳐 볼 생각이다. 투 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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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23-10-13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리뷰 기다립니다 ㅋㅋㅋㅋ

물감 2023-10-14 13:27   좋아요 0 | URL
에고고 말만이라도 감사함다 ㅎㅎㅎ

새파랑 2023-10-14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사 풀린 문체‘ 딱 맞네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은 정말 리얼한거 같습니다 ㅋ

물감 2023-10-14 13:29   좋아요 1 | URL
도스토옙스키와 에밀 졸라 중에 누가 더 가난 묘사의 끝판왕일까 궁금해지더라고요ㅎㅎㅎ

새파랑 2023-10-14 13:45   좋아요 0 | URL
전 도스토예프스키에 한표입니다~!!
 
스완 송 1 - 운명의 바퀴가 돌다
로버트 매캐먼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엊그제는 아프간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올해는 정말 TV만 켰다 하면 재난 피해 소식이 들려온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난 자연재해로 전 세계가 매일같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마침 이같은 재앙들을 다룬 다큐 한 편을 보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끔찍했던 건 재앙이 지나간 뒤 생존자 간에 일어난 폭동이었다. 약탈과 폭력, 살육이 끊이질 않는 그것은 정녕 절망이 세상을 지배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혹여 이런 일이 한국에서 발생한다면 미국보다 더한 야만국가가 될 것이다. 안 그래도 한국인들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니까.


1987년에 출간된 <스완 송>은 미국과 러시아의 핵 전쟁 직후를 그린 세기말 감성의 재난물이다. 이 방대한 분량의 작품은 핵폭발 이후 생존한 자들이 겪게 될 모든 상황들을 차례대로 나열한다. 방사능에 노출된 피부의 변형부터 각종 기형 짐승들의 공습과 기후변화로 생긴 핵 겨울 등, 온갖 악조건 가운데 살아남기 위한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볼 수 있다. 물론 땅덩이가 넓은 미국이라서 가능한 내용이긴 했어도 작품이 주는 위기와 공포는 충분히 수긍할만했다.


스티븐 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매캐먼은 <스완 송>으로 브램 스토커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얻었단다. 매캐먼의 스타일은 장르문학에다 휴머니즘을 녹여내는 게 특징인데, <스완 송>에서는 그 기교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플하게는 인간의 선악에 대한 내용이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종말의 바람이 불고 난 후 살아남은 세 일행의 시점이 교차하는데, 먼저는 핵폭발 당시 지하로 대피한 소녀 ‘스완‘과 프로 레슬러 ‘조시‘의 장면이다. 바깥세상은 이미 초토화가 되었지만 조시는 목숨을 걸고 곁에 있는 소녀를 지킬 생각이다. 스완이 지닌 기이한 생명의 기운을 못 본 체할 수가 없는 그였다.


다음은 도심 터널에서 겨우 죽음을 면한 부랑자 ‘시스터‘의 장면이다. 부서진 뉴욕 거리를 떠돌던 그녀는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를 만나 공격을 받고서 도망친다. 그러다 어느 잔해더미에서 보석들이 녹아 붙은 유리 고리를 줍게 되는데, 이걸 만지는 자는 미래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게 된다. 시스터는 유리 고리가 보여주는 환상을 따라 정처 없이 대륙을 횡단하게 되고, 악마는 유리 고리를 파괴하기 위해 시스터를 추격한다.


마지막으로 산속 벙커에서 다 죽고 살아난 두 사람, 소년 ‘롤런드‘와 공군 대령 ‘매클린‘의 장면. 군인을 동경해오던 소년은 손을 다친 대령의 오른팔이 된다. 이후 벙커 밖으로 나와 생존게임에 참가하면서 병사 놀이에 푹 빠진 소년의 잔학성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급결성된 이 인조는 무력으로 생존자들을 굴복시키며 세력을 키워간다. 이렇듯 멸망한 세상 중에도 악의 꽃은 저절로 피어나고 혼돈의 열매를 맺고 있었다.


판타지 요소가 들어있지만 작품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풀어가서 기승전결이 딱 맞아떨어지니 다행이랄까. 모든 생존자들은 위기를 맞을 때마다 각자의 방식과 신념대로 해결하고 살아남는다. 혹 그 방식이 잔인하고 흉포하다 해도 결코 비난할 수가 없는 세상이었다. 서로가 경계하는 가운데 친절과 봉사로 마음을 여는 쪽과 힘으로 제압하는 쪽으로 나뉘었지만 서바이벌에 정답이란 없었다. 선을 지켜서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악하게 산다 해서 천벌을 받는 것도 아니었으니.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다 무슨 소용이랴.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만큼 한심한 일도 없을 것이다.


방사능에 노출된 인간들의 피부는 말벌집 모양같이 변해버렸다. 그 흉측한 얼굴은 타인들 특히 정상인과의 소통을 가로막았고, 누가 죽기라도 하면 피부병 탓이라면서 더욱 서로를 멀리하였다. 그렇게 모두가 원치 않는 고립 속에 살아간다. 협조해 주지 않는 세상에 선을 행하고 마음을 전하기란 정말 쉽지가 않다.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타인에게 식량이나 물품을 나눠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은 없다. 평상시의 내 모습은 선이지만 종말이 닥치고도 선을 유지할지는... 아니다. 혼자 살아가느니 그냥 나도 죽고 말란다.


한편 대령과 소년은 피부병에 걸린 자들을 학살하고 정상인들은 군 입대를 시켰다. 자신들의 피부병은 보호구로 가린 채. 자유를 뺏는 대신 안전을 책임지는 대령의 방식이 무질서한 세상에서는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의미나 가치 따위를 찾는 나 같은 사람들은 얼마 못 가서 튕겨져 나올 것이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끼리 세운 사상은 과연 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모양새는 달라도 서로가 추구하는 건 같은데 말이다. 어째 리뷰가 딥해지는 듯한데 종말 소설이라서 어쩔 수가 없음.


핵전쟁 후 7년이 지났다. 스완과 조시는 떠돌던 끝에 작은 마을에 정착하게 되고, 시스터는 유리 고리의 환상을 따라 마침내 스완하고 만난다. 어느 날 스완의 말벌집 같은 가면이 쩍 갈라지더니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고, 이어서 조시와 시스터도 같은 현상과 같은 결과를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령과 롤런드의 가면도 벗겨졌으나 두 사람은 괴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각자의 내면에 있던 것들이 겉으로 형상화가 된 셈인데, 이제껏 모호했던 선악의 기준을 작가는 변화된 얼굴로 구분 지었다. 이제 스완은 작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재능을 힘껏 발휘하여 무너진 세상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스완의 능력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매캐먼이 바라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 것도 같았다.


한참 분위기 좋은 와중에 시스터를 쫓던 악마가 마을을 방문한다. 스완의 기운에 못이긴 악마는 대령의 군대를 동원하여 스완과 마을을 공격해온다. 이날 이때까지 고생한 게 다 전쟁 때문인데 어째서 또 전쟁을 선포하는가. 그것도 원인을 제공한 러시아가 아닌 자국민끼리 싸워대는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제 반복되는 살육 아래 본래의 목적과 사상은 퇴색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모순을 볼 때마다 차라리 세상은 전멸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이야기는 세계 멸망으로 흘러간다. 결국 악마의 승리인가 싶더니 자칭 ‘신‘이라는 남자가 등장하여 종말 버튼을 누른다. 세상의 재건을 위해 현재의 선악은 사라져야 한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자기모순을 정당화하려 들 것이다. 여기에는 끝까지 인도주의를 고수하는 스완조차도 예외가 없다. 이 작품은 접근 방식에 따라 극과 극의 평으로 갈릴듯한데, 주제를 떠나서 경종을 울리는 것만으로도 목적은 달성했다고 본다. 죽기 직전의 백조가 부른다는 진혼곡. 죽음과 맞바꾼 그 찰나의 아름다움이 오염된 세상을 정화해 준다. 어쩌면 누군가의 스완송 덕분에 오늘의 내가 현실을 버틸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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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0-10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요즘 왤케 뜸하십니까?

물감 2023-10-11 10:3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전 사실 요즘 서재 분위기가 많이 어색해요. 제가 아싸에다 비주류여서 그런지 소통할 사람이 점점 줄어드네요. 어쩐지 알라딘을 떠난 분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고요.

은오 2023-10-11 17:52   좋아요 1 | URL
그래도 떠나진 마세요.. 물감님 없는 알라딘은 물감 없는 팔레트.. 그림 없는 스케치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