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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선영 옮김 / 새움 / 2021년 9월
평점 :
그동안 등한시했던 러시아 문학도 슬슬 읽어볼 생각이다. 입문작으로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랐는데 과연 듣던 대로 상당히 골 때린다.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바치고 싶어 안달이 난 두 남녀의 서간체 소설인데, 주인공의 찌질한 감성과 나사 풀린 문체가 전혀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있어 묘하게 매력적이다. 오로지 생계를 위한 글쓰기였기에 기존의 교양 있고 점잔 빼는 스타일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워낙 거칠고 날것의 느낌이라 혹평이 쏟아질 법도 한데, 이 문화충격 MSG 덩어리에 모든 이들이 무릎 꿇고 찬양했다 하니 진정 타고난 이야기꾼이 틀림없다.
문학의 세계에는 참으로 온갖 캐릭터가 다 있다. 순화해서 말하면 좀 이상한 사람이고, 직설적인 표현으로는 정상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여기에는 그렇게 타고난 유형과 후천적으로 이상해진 유형이 있는데, 주인공 마카르는 둘 다 해당하는 제3의 유형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야생적인 사고가 인물에 녹아든 데다, 가난 속에 찾아온 말년의 사랑으로 살짝 맛이 가 있어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순애보가 너무나 투명해서 불편하긴커녕 간절한 사랑은 가난할 때라야 나오는 법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뭔 헛소리냐 싶겠지만 원래 사랑이란 게 사람 바보 만들기에 일등 공신 아니었던가.
47세 중년 아재인 마카르는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17세 고아 소녀 바르바나의 후원자를 맡는다. 갑자기 생긴 여자 인맥에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던 마카르는 간이고 쓸개고 다 갖다 바칠 분위기다. 정작 그의 주머니 사정은 말 안 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없는 돈 쥐어짜서 이것저것 선물해대니 소녀는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면서도 좋아해 주니까 마카르는 무리해서라도 물질 공세를 해가며 소녀의 미소를 보고 싶어 한다. 그는 이 모든 과정에서 연애 초보자들이 겪는 오류들을 범하게 된다. 늘 그렇듯 의도만 좋았을 뿐인 상황이 반복되자 나이 먹고서 이 무슨 추태냐는 말이 목밑까지 차올랐지만 그 나이까지 연애 한 번 못해봤다고 생각하니 뭐 이해는 된다. 사실 마카르가 모태솔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위기상 확실해 보인다.
아무튼 마카르의 부담스러운 직진도 썩 싫지만은 않았던 바르바나. 어차피 친구도 없고 할 일도 없었으니 답장 편지를 쓰는 재미에 푹 빠진 그녀였다. 말로는 친척 관계라곤 하나, 이들의 편지는 연인 사이의 비스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어느새 아슬아슬한 썸 타는 기분을 두 사람도 느낀 것이다. 종종 방문 와달라는 소녀에게, 관계가 들켜서 좋을 게 없다는 마카르. 그러니까 본인도 스스로의 문제를 알고는 있으나 지독한 빨간 맛의 노예가 되어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과 형편을 걱정하는 바르바나에게 허세를 부리고 자존심을 세우는 등 둘도 없는 상남자를 연기하기에 이르렀다. 알았으니까 제발 멀쩡한 옷 좀 사 입고 다니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해줘도 대체 들어먹지를 않는다. 언제는 그녀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고 하더니 말이다.
마카르는 본인의 열렬한 사랑꾼 모습에 잔뜩 취해 있었다. 어쩌다 그녀가 생활비나 건강 문제에 시달릴 때면 정신이 들기도 했지만 그의 순애보는 이제 투명성을 잃어버렸다. 언뜻 보면 사랑꾼의 대명사인 돈키호테와도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달랐다. 돈키호테는 사랑 말고도 명예가 있었기에 초라한 행색에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마카르는 남들이 자신의 가난을 어떻게 생각하든 관여치 않는 듯했다. 단지 내가 나를 어떻게 여기는 지가 중요했을 뿐. 그런 믿음과 마인드가 잘못인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불편을 겪는데도 고집을 부리는 태도가 문제 되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가난한 사람끼리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제목답게 작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 여러 모양의 가난함이 나중 가서는 하나의 불행으로 귀결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서 가난은 지겹도록 구경할 테니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평론가 이현우는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아우르는 주제와,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핵심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라고 했다. 저자는 인간의 존재를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가지와, 공통된 하나의 뿌리 중 어느 쪽으로 보았을까. 자칭 인류학자인 나님은 이 질문의 해답을 찾고자 도스토옙스키를 파헤쳐 볼 생각이다. 투 비 컨티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