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면서 한동안 떠들썩했던 천명관의 <고래>를 드디어 읽었다. 예약이 워낙 많이 밀려있어야 말이지. 그렇다고 사 읽기는 뭔가 거시기해서 암튼 오래도 걸렸다. 사실 이 작품은 호랑이 금연하던 시절부터 유명하긴 했었는데,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고래>만큼은 읽어줘야 한다느니, 김훈보다는 천명관이라느니 하는 첨언이 참 많기도 했다. 나는 그런 호들갑들에 오히려 거부감만 생기는데 이유인즉슨 대단하대서 읽었다가 낭패본 게 셀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이 먹고 여성호르몬이 늘면서 손발톱에 이빨까지 다 빠지고 나니까 좋고 싫고를 따지는 일이 뭐 대수냐 싶어 날름 읽어보았다. 만인이 극찬해도 난 절대 만점을 주지 않으리라 했거늘 얼마 못 가서 백기를 흔들고 말았다지. 완패다.
화자의 능글맞은 문체가 감점 요소였다. 아무리 구전 설화의 자유 형식이라지만 과하긴 했다. 허나 이런 단점을 완전히 압도하는 스토리텔링 앞에 고개가 절로 끄덕거렸다. <고령화 가족>에서는 몰랐는데 이 분도 타고난 꾼이셨군, 그래. 그나저나 금복 인생에 어찌나 굴곡이 많았는지 자세한 야기를 듣기도 전에 다음으로 훌렁훌렁 넘어가기 바쁜, 그러면서도 핵심만 콕콕 집어주어 감칠맛깔나는 썰들의 연속이었다. 금복은 생선 장수를 따라 가출한 뒤로 거처도 자주 옮기고 남자도 많이 만나고 이런저런 사업에 손대면서 정말 열심히도 살았다. 사업가의 재능도 있는 데다가 남정네들을 맘대로 주무르는 매력까지 갖춘, 시대와 참 맞지 않는 오버 스펙의 캐릭터라 할 수 있는데, 이미 소설의 형식을 한참 벗어나있기 때문에 어이가 없지만 어디 들어나 보자 했다가 어느새 과몰입되어 그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재밌으면 장땡 아니냐 하게 된달까. 여하간 걸작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책을 진지하게 리뷰하는 건 어쩐지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손가락 가는 대로 끄적이는 중이다. 일단은 계속해 보겠다.
남녀의 도킹 장면이 너무 잦아서 자연스럽게 하루키가 생각이 나더랬다. 그 많은 섹스 신들이 전혀 납득도 수긍도 안 가는 하루키의 것보다야 훨씬 자연스럽고 그럴싸했다. 작중 많은 수컷들이 금복을 거쳐가는데, 어떤 식으로 퇴장하든지 간에 나중 가서 재등장하여 금복에게 영향을 미치곤 한다. 질투에 눈이 먼 남자들의 못 볼 꼴 잔뜩 보고 사는 금복은 사람이 무섭고 삶에 지쳐서 또는 복잡다단한 이유로 살 곳을 계속 옮겨 다닌다. 그리고 매번 새로운 일거리를 구하는데 그녀가 맡은 장사마다 대박을 쳐댔으니 제아무리 순수한 사람이라도 돈맛에 결국 길들여지는 법이다. 그게 뭐 어떤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제 인생을 언제나 정면으로 바라볼 줄 아는 금복이 짠하긴커녕 오히려 인간미가 있어 보였다. 오래 정착하는 성격이 못돼서 그렇지, 그녀는 사랑과 의리에 파이팅 넘치는 면모도 여럿 보여주었다. 다만 투자가 욕심이 되면서 주변인들과의 마찰로 서서히 고립되어가는 사실을 몰랐을 뿐. 그러나 매번 홀로서기에 성공했던 그녀라서 아쉬울 것도 없었으니 거참 이런 만렙 캐릭터를 갖다 쓰는데 재미없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힘들겠다.
서브 주인공이자 금복이 낳은 딸인 춘희의 존재감도 잊을 수 없다. 아무리 슈퍼 유전자라도 그렇지, 돌도 안돼서 몸무게가 30kg를 찍었다니, 뻥카도 정도껏 하시지 작가 양반... 아니 화자 양반아. 드디어 야기가 산으로 가나 보다 했더니 어랍쇼, 진짜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금복은 ‘평대‘라는 오지에 정착하고, 남정네 하나 잡아다 벽돌 공장을 세우게 한 뒤 벽돌 사업에 뛰어든다. 쪼매 시간은 걸렸지만 이 사업도 결국 성공하는데, 말도 못 하고 지능도 낮지만 피지컬만은 강호동의 전성기 시절을 방불케하는 금복의 딸 춘희가 인부들을 따라 벽돌 만드는 일에 재능을 보인다. <고래>의 원제가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는데 그렇다면 진짜 주인공은 금복이 아니라 춘희인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금복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말이지. 뭐 그건 됐고, 자신의 벽돌로 금복은 고래 모양의 극장을 세워 또 한 번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불미스러운 화재로 금복과 지역민들이 전부 타죽고 춘희만 살아남는다. 방화범으로 찍힌 춘희는 교도소로 끌려가 10년 뒤에 출소하여 벽돌 공장을 찾아간다. 텅 비어있는 공장과 마을. 죽음의 개념이 없었던 춘희는, 공장을 가동하면 떠나간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예전 같은 활기를 되찾겠지 하며 홀로 벽돌을 찍어낸다. 그 외로운 작업은 그녀가 세상을 뜰 때까지 계속된다. 내내 울고 웃고 탄식하다가 끝에 와서 이만한 먹먹함이라니, 밀당의 귀재가 따로 없네 증말.
생략해서 그렇지, 비중 있는 인물들이 모녀 외에도 많이 있다. 각자의 서사와 배경들이 주인공들과도 엮이기 때문에 잘 입력해두면 재미가 배나 더 할 것이다. 끊임없는 개척 정신을 보여주었던 금복은 끝내 욕망에 삼켜지고 말았다. 춘희도 오지 않을 사람들을 기다리며 벽돌 만드는 일에 정신을 뺏겨 버린다. 결국 어미의 운명을 딸도 밟은 것일까. 이 작품은 금복이 생선 장사를 하던 때로부터 극장을 만들기까지, 나날이 발전하는 사회의 문명화를 그리고 있어 시대적 배경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두 명분의 인생과 동행하면서 얻은 게 무엇이고 놓친 게 무언지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더 쓰고 싶지만 졸려서 안되겠다. 요즘은 자기 전에 글을 쓰다 보니 꼭 마무리가 이렇네. 이해바라바라바라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