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이리 을유세계문학전집 104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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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은 아무래도 헤세 문학을 말할 때 mbti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한심하단 건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 말고는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INFJ는 16가지 유형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알기 힘든 유형으로 알려져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 INFJ를 ‘예수 아니면 히틀러‘라고 말하더라. INFJ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골칫거리라면 모든 만물에서 선과 악을 동시에 들여다본다는 것. 그러니까 양측의 상황을 판단하고 몇 수 앞을 내다보기까지 하는 시뮬레이션들이 한꺼번에 작동한다고 보면 된다. 어찌 보면 참 피곤 답답한 이 시스템은 내가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훈련으로 얻어진 기능도 아니다. 아무튼 나의 감정과 욕구보다 보편적인 관점과 입장에서 판단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느 한쪽 편을 들기가 불가하여 정말 어쩔 수 없이 중립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세상을 겉도는 ‘황야의 이리‘가 탄생하게 된다. 헤세는 이중인격자로 낙인이 찍혀버린 INFJ들의 모순된 삶과 자기 연민의 종결을 위해 <황야의 이리>를 써냈다. 이 책은 나 같은 극 소수파에게는 바이블이나 다름없지만 그 외 분들은 딱히 뽑아먹을게 있을까 싶다.


황야의 이리들을 가리켜 원래 혼자가 편한 사람, 남들과 잘 못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여기에 당사자들은 일일이 해명하려 들지도 않으니 더욱 그런 캐릭터로 굳혀져버린다. 도리어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를 포용하지 않는 타인을 헤아리기에 바쁜 이리들이다. 단언컨대 이리는 절대 고립되기를 바란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두와 잘 지내고 싶어서 늘 다가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리들의 어정쩡한 스탠스를 감지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애매한 거리 두기를 하게 되고, 예민한 이리들은 그 분위기를 읽고서 남몰래 절규한다. 왜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것일까 거듭 자책하면서. 근데 또 애정결핍처럼 보여지고 싶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척, 오늘도 내일도 스마일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정말 매일 매 순간이 모순과의 정면충돌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타고나길 몸 사리는 게 있어서 겉과 속이 다른 음침한 최약체라는 오해를 많이도 받는다. 이것 또한 같은 이유로 해명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보는 게 서로가 편한 길임을 잘 아니까. 헤세는 이 방황하는 예술가 기질의 영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심층 분석하였다.


다시 말해 이들의 삶은 실체가 없고 어떤 형태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보통 판사, 의사, 제화공, 교사들 같은 부류의 영웅이나 사상가 또는 예술가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들의 삶은 영원히 떠다니는 고통스러운 움직임이고, 부서지는 파도처럼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찢어져있다. 만약 삶의 이런 혼돈에서 빛을 발하는 저들의 독특한 행위와 사고방식,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없다면, 저들의 삶은 끔찍하고 무의미할 것이다.(65p)


이들은 대체로 자극적인 세상사에 썩 흥미를 갖지 못하는데, 그렇기에 온갖 유희와 쾌락과 부를 쫓는 일반 시민들과의 유대관계가 결코 쉽지 않다.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껴 아예 돌아선다면 차라리 나을 것이나 하필이면 또 이상주의자라서 인류애가 충만하다는 게 문제다. 아무튼 다시 mbti 얘기로 돌아오면, 나 자신을 고정틀에 가둔다거나 일종의 가스라이팅하고 다를 바 없다는 주장도 십분 이해한다. 그렇지만 자신을 발견치 못하고 평생 방황하며 살아온 나 같은 이방인들은, 스몰토크 용도에 불과한 mbti가 나를 알기 쉽게 정의해 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헤세도 그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자기복제의 글들을 연거푸 써왔을 터. 그토록 오래 연구해도 늘 제자리걸음인 자신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아내서 발 뻗고 맘 편히 잠들어보고 싶었을 것이리라.


나는 이 작품을 헤세의 베스트로 꼽는다. 심사숙고하던 평생 숙제를 이 한 권에 전부 집약했다는 점에서 가히 마스터피스라 하겠다. 정말이지 <황야의 이리>에서는 질문하기에 바빴던 지난날들과 달리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이질성과 시민 사회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과 조화가 중요함을 수차례 강조하는데, 그중 내가 놀란 포인트는 이것이었다.


... 이들에게는 고통 속에서 정신이 강해지고 유연해지는 경우 유머로 나아가는 화해적인 탈출구가 남아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민은 유머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없지만, 유머는 늘 어떻게든 시민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모든 황야의 이리가 자신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유머라는 상상의 영역에서다.(79~80p)


바로 이리들의 유일한 탈출구가 유머라고 언급한 점이다. 이것은 줄곧 이방인으로 살아오면서 내 나름 내렸던 버팀의 방편이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도 꼭 유머를 넣어 환기시키곤 했던 건데, 그동안의 여정이 헛걸음한 게 아니어서 아무튼 천만다행이다. 솔직히 사는 게 힘들다 보면 탈출구를 생각하긴커녕 다 운명이고 팔자려니 하며 체념해버린다. 그러다 자연스레 죽음의 세계를 그려보기도 한다. 헤세 또한 삶에 대한 갈망에서 고통이라는 죄를 추구하는 자신을 발견했고, 참회하며 살아가야 할 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겨왔다. 하여 그 속죄의 굴레를 바라기까지 하는, 자기 연민의 끝을 보여주는 것이 이리들이다. 마치 그런 배역을 맡은 배우가 제 역할 소화에 최선을 다하듯 말이다.


주인공이 술집에서 만난 여성과의 대화에서 온갖 뼈 때리는 말들이 오고 간다. 사는 게 어려운 일이라던 그에게, 더러워진 안경과 신발을 닦은 뒤 춤이나 추자는 그녀. 춤은 절대 못 춘다는 그에게, 살면서 어렵고 복잡한 일들은 다 해놓고 정작 단순한 일들은 못 배웠느냐고 타박한다. 그렇다. 그저 숲 밖에 볼 줄 모르는 이리들은 눈앞에 있는 나무부터 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헌데 그게 다 큰 어른이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창피하고 한심하게 느껴져 계속 회피한다는 게 문제다.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옳지 못한 일, 나와 맞지 않는 일이라며 속단해버리는 나쁜 습관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곧 이리들을 소외와 배제에서 해방시키는 첫걸음이다. 여튼 그녀와의 달콤살벌한 대화들을 한 줄로 압축하자면 ‘별것도 아니면서 착각 좀 하지 말라‘ 되시겠다. 결국 이리도 남들과 같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얘긴데, 아 진짜 제대로 뼈 맞았다.


이 팩트 폭력은 꿈속에서 만난 괴테와의 대화로 이어진다. 괴테를 동경해온 주인공은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다른 괴테의 태도에 비아냥거린다. 막말로 예술병에 걸린 그에게 너무 진지하게 살지 좀 말라는 괴테의 이 답변은, 나 같은 극 소수파들에게 꼭 필요한 처방전이었다. 이것은 앞서 유머의 중요성과도 연결된다. 이상주의자는 현실주의자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날개를 접고 우주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야 한다. 겁이 많을수록 더 부딪혀보고 투쟁해서 뭐든 체험해 버릇 해야 한다. 이제껏 나랑 맞지 않는다며 멀리했었던 것들이 사실 시도해 볼 용기가 없어서였음을 몸소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만 알아두어도 다시는 뼈 맞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나의 관심사는 대개 평범하고 대중적이지 않음을 알기에 어떤 분야의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해낸들 그와 별개로 자존감은 항상 낮은 상태이다. 다만 그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아서 친절과 겸손의 덕목으로 감추곤 하는데, 이같은 강박적인 반듯함이 (찐) INFJ들의 디폴트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곧 이리들의 고질병이자 난제임을 알고서 헤세는 금단의 세계로 나를 계속 끌어들인다. 춤과 마약, 섹스 등 주인공이 겪는 체험은 온통 향락에 관한 것들인데 이런 자극을 줘서라도 ‘웃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 싶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모든 사람의 눈에서 파괴 욕망과 살인 욕망이 너무나 밝고 솔직한 모습으로 웃는 것을 보았다. 내 안에서도 이처럼 붉고 투박한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나 활짝 웃고 있었다.(268p)‘ 이렇듯 이리의 광기가 어디로 어떻게 튀어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 아니면 히틀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깐.


헤세가 거듭 강조하는 그놈의 체험. 당연히 중요하고 나도 물론 그러고 싶지만, 정작 그 길로 안내해 줄 가이드가 없다는 게 문제다. 주인공을 체험의 세계로 인도한 헤르미네나 마리아 같은 동료를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현실은 소설과 달라서 정답을 알려줘도 실행이 어려워 금방 좌절하고 만다. 무엇보다 관계와 협동 없이 홀로 하는 체험들은 어떤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반드시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있어야만 한다. 하여 무도회장을 찾은 주인공처럼 나도 사람들을 여럿 만나는 장소를 종종 가보곤 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있을 곳은 아니라는 생각에 조용히 물러나버린다. 기 빨리는 기분도 싫지만 그보다도 소외되는 기분이 싫은 이유에서다. 아무튼 작품의 진행형 결말처럼 우리 이방인들은 마음을 수양하며 묵묵히 오늘을 걸어가야만 하리라.


언젠가 한번은 내 속 깊은 이야기를 남김없이 털어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겨서 너무 감사한 독서와 글쓰기였다. 정말 속이 다 후련하다. 이 글로 고구마를 잔뜩 먹었을 당신에게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But 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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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0-23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세가 오늘날 MBTI 하면 INFJ 가 나올까요? INFJ가 매력적인 MBTI인거 같습니다~!! 이 책 헤세책 중에서 좀 거친편인거 같아요 ㅋ


물감 2023-10-23 23:57   좋아요 1 | URL
네, 새파랑님. 헤세는 확신의 INFJ입니다. 저와 이 정도로 겹치고 공명하는 걸 보면요ㅎㅎ
저는 이 책이 거칠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는데, 그렇게 느낄 수도 있군요! 아무튼 최고였습니다. 로쟈 이현우 님도 <황야의 이리>가 헤세의 대표작이라고 하셨슴다🙂

잠자냥 2023-10-24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물 좀 줘요. 이리 물감 님 ㅋㅋㅋㅋㅋㅋㅋ
제가 F가 아니라 T여서 이 작품에 크게 공명을 못했나 봅니다.
무튼 이리 물감 님 리뷰 읽으니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기도 하는데....T라서 모르겠네요.

이상 유머의 중요성을 아는 INTJ 올림. 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10-24 13:56   좋아요 1 | URL
??? : 나를 황야의 물감이라 부르라... (모비딕 VER.)

이왕 과몰입한 김에 좀 더 오바 떨자면, 이 책은 INFJ에 대한 고찰록이라 다른 유형들은 얻어갈 게 없겠다 싶어요. 그나저나 유머의 중요성을 알고 계시다니, 자냥 님은 배우신 분이 틀림없군요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