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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처음 여자친구를 사귄 건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였다. 상대는 다른 학교의 두 살 연하였는데, 너도나도 공부에 매진하던 그 시기를 나는 연애하느라 정신없이 보내었다. 그러다 점점 다투는 일이 늘어났는데 이유인즉슨 그 애의 주변에는 항상 남자들이 있었다. 그렇게 나랑 싸우고 풀고를 반복하던 그 애는 어느새 나의 절친하고 눈이 맞아버렸다. 극소심했던 나는 주먹다짐 대신 싸이월드에다가 그들에 대한 맹비난의 글로 도배를 하였다. 우리를 모르는 제3자가 읽어도 욕 나오지 않을 수 없게끔 정성을 다해 저격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와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몇 년 뒤에는 결혼까지 하여 또다시 충격과 증오를 안겨주었다. 그 시절 나는 매일같이 거울 앞에 서서 온갖 저주를 퍼부었던 게 기억 난다. 그로부터 3년 뒤, 지인들이 그들의 이혼 소식을 들려주었다. 여자 쪽의 바람이었고, 그 내막은 여기에 담지 못할 만큼 추잡한 것이었다. 나는 수년간의 저주가 이루어진 기쁨에서 오는 복잡 미묘함을 꽤 오랫동안 느껴야 했다.
평소 사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나, 너무 내 것과 비슷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을 읽었다. 반스 행님의 대표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오래 묵혀둔 내 기억의 파편들을 사정없이 끄집어내어 이 야심한 밤에 나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 V가 절친 A와 사귀게 되자 이들에게 저주의 편지를 아주 정성스레 써주었던 것이다. 이후 영문을 모르는 A의 자살 소식이 들려오고, 그렇게 40년이 지나버린다. 이제 노인이 된 주인공 앞으로 V의 엄마가 남긴 소정의 돈과 A의 일기장이 상속된다. 그러나 V는 A의 일기장을 가로채어 절대 넘겨주지 않는다. 하여 토니는 V와 연락하고 만남을 가지지만, 그럴수록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너는 감을 전혀 못 잡는다‘라는 핀잔뿐이다. 그녀는 과거 토니가 남긴 저주의 편지를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는 자신이 썼던 저주의 내용대로 일어난 결과를 목도하며 기억의 왜곡과 균열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레 친구들과 멀어지면서 직장을 다니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다가 은퇴한, 남들 다 그렇듯 평범한 인생 대로를 밟아온 주인공. 그의 기억 속에 A는 언제나 훌륭한 철학자이자 진실의 탐구자로써 남아있었다. 그래서 A의 자살 또한 자신들과 다르게 논리적 사고로 도출된 행동이라 보았다. 그러니까 자신은 A를 좋게만 평가하고 있었고 그건 틀림없는 사실일진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이 낯 뜨거운 편지가 정녕 제 손으로 썼다는 게 얼마나 미치게 만들던지. 아무리 미화된 기억이라지만 긴긴 세월 동안 굳건히 믿고 지켜온 기억이 한순간에 부정당했으니 그 밖의 기억들도 안심할 수가 없게 돼버렸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남들의 인식 또한 내가 알던 것과 크게 다를지도 모른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삶의 정당성을 외면하고 편한 길을 택한 결과였을까. 일찍 생을 마감한 A가 맞았고, 여태까지 살아남은 토니는 틀린 것일까.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한들 뭔가가 편리해지지도 않고, 뭔가에 소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시해버린다.
111p - 112p
이혼하고도 종종 토니를 만나주는 전처에게 사정을 말해본다. 전처는 자신을 명쾌한 여자로, V는 미스터리한 여자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남자들은 어느 한쪽의 매력에 빠진다고 했다. 명쾌함을 골랐던 주인공은 뒤늦게 미스터리에 끌리는 중이었다. 어느새 일기장을 돌려받는 문제보다 V의 환심을 사고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일에 몰두하는 토니. 그래서 계속 차갑게 구는 V의 태도는 관심 밖이었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언제나 비밀스런 구석이 있었고, 좀처럼 답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토니를 경멸하였다. 그런 V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별 대수롭지 않아 했으나, 여전히 감을 못 잡는다는 핀잔을 듣다 보니 내가 알던 그녀의 이미지가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또다시 전처를 찾아가 조언을 구해보지만, 이제 당신은 혼자야 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제서야 전처도, 전여친도 돌아서게 만든 원인이 나였음을 어렴풋이 자각하는 토니 영감님. 대체 그의 기억들은 어디까지 희석되어 있던 것인지.
카뮈와 니체를 읽는다던 A의 독서 취향에서 이미 그의 죽음은 예견되어 있었다. 윤리적 결정에 따른 행동을 몸소 보여준 참 대단했던 친구. 자신보다 A에게 끌렸던 전여친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었으나, 친구와의 비교로 심란해진 토니의 화살은 어째서인지 V를 향하고만 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지난 연인의 속을 뒤집고 치근덕대는 건 추잡한 복수심 따위가 아닌 그녀의 경멸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자신을 잘못 보고 오해했던 것으로 돌려놓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신이 저주했던 이의 불행한 말로를 어떻게 바꿀 수 있으랴. 틀어져 버린 사이를 무슨 수로 만회할 수 있으랴. 이것은 명쾌하든 미스터리하든 마찬가지일 테다. 토니가 어떻게든 문제를 풀고 나름의 답을 내려보는데, 정작 그녀의 경멸은 전혀 다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토록 둔하고 눈치 없는 주인공도 결국 눈치챘던데, 왜 나는 다 읽고도 몰라서 남들의 리뷰를 읽고 이해했는지. 이거야 원, 나야말로 감을 못 잡는 놈이었다.
다시 보니까 참 역설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좋았던 기억들은 오물이 잔뜩 묻어있고, 외면했던 기억들엔 정답이 숨어있었으니. 나라고 다를 게 뭐 있을까. 나 같은 경우에는 누가 보더라도 상대방의 100% 과실이지만, 그게 과연 수년 동안 저주해가며 감정 상할만한 일이었나 싶다. 이제는 너무 오래 지나버린 그 사건에서 혹여 내가 간과한 문제나 일들이 있었을까 봐 걱정도 든다. 너무 강렬했던 감정과 기억들은 영영히 박제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끄집어내보니 많이 흐려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흩어져 날아가고 있을까. 그것들을 잡아야 할지, 내버려 두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