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심장 창비세계문학 18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김세일 옮김 / 창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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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은 죽은 남성의 뇌하수체와 고환을 개한테 이식하여 탄생한 돌연변이의 내용이다. 이 뇌를 교체한다는 소재는 현대문학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데, 무려 1925년에 <개의 심장>이 쓰인 걸 보면 인격에 대한 관심사는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말도 안 되는 엽기적인 발상이지만, 수술받은 개는 점차 인간의 외형으로 변해가고 인간의 말도 할 줄 알며 지능도 생겨나기 시작한다. 아마도 다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떠올릴 텐데, 이 책에서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입장이 역전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튼 이 기괴한 수술의 목적은 인간의 노화를 막고 젊음을 되찾는 실험이었다. 그 바램과는 딴판인 실험이 되었지만 이건 이거대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셈이었고, 수술을 집행한 교수는 개-인간을 교육하여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골목살이 하던 개의 습성이 참된 인간이기를 거부하는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의 행세를 반복하는 실험체였다. 하여간 이런 꼴을 볼 때마다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지워지질 않는다.


개-인간과 교수 일행의 부딪힘은, 신 인류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비판을 나타낸다. 출간 당시 아주 핫하던 볼셰비키의 혁명주의를 개-인간으로 압축해냈다고 볼 수 있겠다. 작중에서는 노동 계급인 프롤레타리아 무리가 교수 일행을 찾아와 고발하겠다며 시비를 건다. 이 아파트에서 교수 당신만 방 8칸을 쓴다면서. 하지만 교수는 허가된 대로 쓰는 거라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불청객은 훗날 개-인간을 꼬드겨서 교수가 눈 뒤집힐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도록 교묘히 조종한다. 또한 개-인간에게 직책을 주어 사회의 일원처럼 느끼게 해주기도 하는데, 교수 일행은 아직 한참 발달 단계인 실험체가 맨날 이상한 것만 배워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인 것이다. 이 양측의 상황들로써 당시 러시아의 혁명 운동 분위기를 대강 알게 해준다. 이 신 인류가 얼마나 눈엣가시였을지 참.


주제나 메시지가 명확한 작품이라 딱히 더 말할 게 없다. 이미 다른 분들이 더 상세하게 리뷰했기도 하고. 그나저나 작가는 왜 이토록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를 썼을까. 본인이 의사 출신이라서 더 실감 나게 쓸 자신도 있었겠지만, 신 인류의 등장을 ‘인간으로 진화한 개‘로 설정한 것은 대놓고 프롤레타리아를 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 반대로 자신의 권위와 계급만을 신경 쓰는 교수의 모습은, 우파에 대한 비난이자 우롱인 셈이다. 이 작품을 쓰면서 작가는 자신이 어디에 속해있다고 보았을까. 개-인간의 거친 말과 행동을 통하여 기존의 스탈린 체제가 여러모로 문제 있으며, 작품 해설대로 점진적 변화를 거쳐서 혁명을 완성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러시아의 역사 배경은 잘 모르지만 그런대로 알아듣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프랑켄슈타인>같은 임팩트는 없어서 별 점은 높게 못 주겠군요. 스미마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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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1-30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불가코프가 기괴하고 코믹하게 체제를 비판한점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나저나 물감님, 프사 느낌이 너무 따뜻해졌는데요? 차가운게 더잘어울리시는데ㅋㅋㅋ실망입니다ㅋ

물감 2024-01-30 22:56   좋아요 1 | URL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른 작품도 찾아볼까봐요ㅎㅎㅎ
그리고 저도 차가운 걸 선호하는 편인데, 마음 좀 다잡아볼라고 요렇게 바꿔봤어요😃😃😃

stella.K 2024-02-01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공유! 멋지네요. 어쩌면 전 물감님을 공유로 인식하게 될지도 몰라요. ㅎㅎ
불가코프가 이런 책도 썼군요. 마르가리타 오래 전에 사 놓고 여태 안 읽고 있습니다. 이 사람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야말로 피의 인생이라고나 할까? ㅠ

물감 2024-02-01 13:16   좋아요 1 | URL
하하하 어쩌면 그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ㅋㅋㅋ
<마르가리타>가 대표작이던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같이 도전하시죠ㅋㅋㅋㅋ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창비세계문학 20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박원복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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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내 기준에서의 소설이란, 머리와 가슴 중 어느 한쪽으로는 읽혀져야만 한다.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느낀 플롯이나 구성은 ‘이야기‘로 받아들이질 못한다. 그게 촌스럽다 해도 나는 주제를 벗어나거나 흐름을 비껴가는 스타일이 극도로 싫다. 그 특유의 초점 없는 문장들이 연달아 나올 때의 당혹감은 몇 번을 반복해도 적응이 안 된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또한 그러했다. 일단 사후 기록이라 해서 달리 특별할 것도 없었고, 어중간한 의식의 흐름 또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찐따 화법을 쓰고 있어서 집중이 하나도 안된다. 초반까지는 커가면서 있었던 일들을 짤막하게 설명하는데 흥미가 1도 안 생겨서 차라리 나님의 썰들을 대충 써도 이거보단 재밌겠다는 생각이 백만 번쯤 든다. 그러다 중반쯤 되면 결국 뻔하고 진부한 사랑 내용으로 넘어간다. 그것도 애까지 있는 유부녀와의 긴장감 1도 없는 사랑놀음으로. 그래, 이왕 그쪽으로 갈 거면 MSG라도 좀 뿌려서 그럴듯하게 꾸며나 보든가, 이건 뭐 콘텐츠도 컨셉도 없이 아무 생각이나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휘갈겨 쓴, 무성의함의 표본이다. 좀 더 팩폭하자면 딱 초딩 수준의 감성이어서 문법이고 맥락이고 뭐고 싹 다 무시한 허술함 그 자체이다. 이 지루하고도 정신 산만한 글들을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될 때쯤, 71.장에서 갑자기 셀프 디스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작가 본인도 문제점을 잘 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컨셉이 없다는 말은 취소하겠다. 전력으로 컨셉에 충실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 이상 같지도 않은 말장난에 지쳐서 그만 중도 하차해버렸다. 그래도 뭔가 좀 얻어 갈까 했었지만 이 책은 풍자와 해학 어느 쪽도 아니었다. 브라질을 대표하는 작가라는데 이 작품만으로는 전혀 동의하지 못하겠다. 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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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1-27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라이, 에서 빵터짐..

물감 2024-01-27 14:00   좋아요 1 | URL
휴, 한명 웃겼다..

stella.K 2024-01-27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웃었습니다. 근데 다른 리뷰어들은 좋다고 날린데 시크하신데요? 전 팩폭에서 빵~ㅎㅎ

물감 2024-01-27 18:37   좋아요 2 | URL
한국인들은 보여지는 게 중요해서 싫어도 싫다고 안합니다. 저는 한국의 서평 문화는 글러먹었다고 생각한지 오래됐어요ㅋㅋㅋ

coolcat329 2024-03-15 0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이 책 읽다가 그만두셨군요! 빛소굴에서 나온 <정신과 의사> 읽고 작가에게 관심이 생겨 지금 이 책 40페이지 쯤 읽고 있는데 너무 산만하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어서 읽는 게 괴롭네요. 포기하려고 90프로 맘 먹고 그래도 이웃님들 글을 보고 다시 결정하자 하고 찾아보는데 별2개 반가운 물감님 글 발견 😂😂
저도 그만 읽으려구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가서 힘드네요.

물감 2024-03-16 22:08   좋아요 0 | URL
정신과의사는 멀쩡한 편이던가요?ㅋㅋ 그래도 저는 절반 넘게는 읽었습니다. 뒤에 뭔가가 있을거라는 기대는 싸그리 무너지더라고요. 일찍 하차하길 잘하셨습니다요😁😁😁
 
브로큰 윈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8 링컨 라임 시리즈 8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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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타임용을 찾다가 고른 디버의 작품이다. 요 시리즈를 다 읽겠다는 다짐을 몇 년째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디버의 작품들은 기본 500쪽 이상인데, 느긋하게 읽어도 이삼일 이면 완독할 정도의 속도감을 지녔다. 이번에도 명불허전 페이지터너임을 증명했으나 솔직히 디버치고는 평범하다고 느꼈던 작품이었다. 디버를 읽어본 사람만이 공감할 아이러니라 해두자.


8편의 빌런은 웹상에 등록된 개인정보를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악질 중의 악질이다. 타깃을 죽인 뒤 피해자가 사용하는 제품을 알아내, 무고한 사람의 집에다 그 물건들을 두어서 범인으로 누명을 씌운다. 또는 타깃의 신용 정보를 도용하여 빚쟁이로 만들어서 나락을 보내버리기도 한다. 피해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읽고 조종하는 그는 전지전능한 신이나 다름없었는데, 이 엄청난 설정을 적극 활용하는 장면은 얼마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리즈만의 묘미인 빌런과의 대결이 빈약하게 느껴진다. 물론 링컨 수사팀은 정신없이 돌아갔지만.


작가는 그 빈약함을 메꾸고자 링컨의 개인사를 집어넣었다. 링컨의 절친이자 사촌인 아서가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어 구치소에 잡혀간다. 아서의 아내에게 그 소식을 들은 링컨의 마음은 착잡하다. 한참 친하게 지내던 대학시절, 사촌이 링컨의 애인을 뺏은 후로 쭉 손절해왔기 때문에. 그러나 링컨의 감지 센서는 증거가 명백한 이 사건에 이상함을 느껴, 사사로운 감정과 별개로 수사에 흥미를 갖게 된다. 예상대로 유사 사건들이 몇 건 더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거대한 데이터 마이닝 기업이 엮여있었다. 라임은 모든 데이터의 접근 권한을 가진 기업의 직원 중 하나를 용의자로 보았고, 즉시 대상을 물색하여 수사에 들어간다. 늘 그렇듯 전부 허탕이었고, 한쪽에서는 또 다른 범죄가 발생하여 수사에 혼선을 주었다. 역시 주인공들은 굴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


이 외에 라임의 파트너인 아멜리아 색스의 개인사도 나온다. 그녀가 딸처럼 아끼고 보호하는 여학생이 있는데,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데다 사건까지 휘말려서 아주 그냥 속이 타들어만 간다. 소녀로 인해 생겨나는 모정은, 형사라는 거친 직업에서 엄마라는 평범한 삶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소망이 커져갈수록 얼른 링컨과 합쳐서 심신의 안정을 얻고 싶어 함이 느껴진다. 허나 애석하게도 링컨의 고장 난 신체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나이 많은 유부남과의 사랑과, 전신마비 장애인과의 사랑 중 어느 쪽이 더 참담할까. 정말이지 이번 편은 메인 사건보다 서브 내용들이 더 흥미롭다.


제프리 디버는 온라인 범죄의 작품을 세 권이나 출간했다. 링컨 라임 시리즈의 <브로큰 윈도>, 캐트린 댄스 시리즈의 <도로변 십자가>, 스탠드 얼론인 <블루 노웨어>인데, 같은 소재를 여러 번 쓴다는 건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개인정보 노출의 위험성을 강조하려는 뜻이 아닐까 한다. <브로큰 윈도>는 익히 들어온 ‘깨진 유리창의 법칙‘으로써, 사소한 문제를 방치했다가 훗날에 큰 범죄로 이어진다는 범죄 심리학 이론이다. 그 말대로 사소한 개인 정보들이 어느 한순간에 나락 가게끔 만드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특히나 요즘같이 SNS나 블로그가 대중화된 시점에서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경고를 백날 해봤자 어찌할 수도 없는 현실 아닌가. 사는 동안 운이 따라주길 바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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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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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여자친구를 사귄 건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였다. 상대는 다른 학교의 두 살 연하였는데, 너도나도 공부에 매진하던 그 시기를 나는 연애하느라 정신없이 보내었다. 그러다 점점 다투는 일이 늘어났는데 이유인즉슨 그 애의 주변에는 항상 남자들이 있었다. 그렇게 나랑 싸우고 풀고를 반복하던 그 애는 어느새 나의 절친하고 눈이 맞아버렸다. 극소심했던 나는 주먹다짐 대신 싸이월드에다가 그들에 대한 맹비난의 글로 도배를 하였다. 우리를 모르는 제3자가 읽어도 욕 나오지 않을 수 없게끔 정성을 다해 저격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와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몇 년 뒤에는 결혼까지 하여 또다시 충격과 증오를 안겨주었다. 그 시절 나는 매일같이 거울 앞에 서서 온갖 저주를 퍼부었던 게 기억 난다. 그로부터 3년 뒤, 지인들이 그들의 이혼 소식을 들려주었다. 여자 쪽의 바람이었고, 그 내막은 여기에 담지 못할 만큼 추잡한 것이었다. 나는 수년간의 저주가 이루어진 기쁨에서 오는 복잡 미묘함을 꽤 오랫동안 느껴야 했다.


평소 사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나, 너무 내 것과 비슷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을 읽었다. 반스 행님의 대표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오래 묵혀둔 내 기억의 파편들을 사정없이 끄집어내어 이 야심한 밤에 나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 V가 절친 A와 사귀게 되자 이들에게 저주의 편지를 아주 정성스레 써주었던 것이다. 이후 영문을 모르는 A의 자살 소식이 들려오고, 그렇게 40년이 지나버린다. 이제 노인이 된 주인공 앞으로 V의 엄마가 남긴 소정의 돈과 A의 일기장이 상속된다. 그러나 V는 A의 일기장을 가로채어 절대 넘겨주지 않는다. 하여 토니는 V와 연락하고 만남을 가지지만, 그럴수록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너는 감을 전혀 못 잡는다‘라는 핀잔뿐이다. 그녀는 과거 토니가 남긴 저주의 편지를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는 자신이 썼던 저주의 내용대로 일어난 결과를 목도하며 기억의 왜곡과 균열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레 친구들과 멀어지면서 직장을 다니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다가 은퇴한, 남들 다 그렇듯 평범한 인생 대로를 밟아온 주인공. 그의 기억 속에 A는 언제나 훌륭한 철학자이자 진실의 탐구자로써 남아있었다. 그래서 A의 자살 또한 자신들과 다르게 논리적 사고로 도출된 행동이라 보았다. 그러니까 자신은 A를 좋게만 평가하고 있었고 그건 틀림없는 사실일진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이 낯 뜨거운 편지가 정녕 제 손으로 썼다는 게 얼마나 미치게 만들던지. 아무리 미화된 기억이라지만 긴긴 세월 동안 굳건히 믿고 지켜온 기억이 한순간에 부정당했으니 그 밖의 기억들도 안심할 수가 없게 돼버렸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남들의 인식 또한 내가 알던 것과 크게 다를지도 모른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삶의 정당성을 외면하고 편한 길을 택한 결과였을까. 일찍 생을 마감한 A가 맞았고, 여태까지 살아남은 토니는 틀린 것일까.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한들 뭔가가 편리해지지도 않고, 뭔가에 소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시해버린다.

111p - 112p

이혼하고도 종종 토니를 만나주는 전처에게 사정을 말해본다. 전처는 자신을 명쾌한 여자로, V는 미스터리한 여자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남자들은 어느 한쪽의 매력에 빠진다고 했다. 명쾌함을 골랐던 주인공은 뒤늦게 미스터리에 끌리는 중이었다. 어느새 일기장을 돌려받는 문제보다 V의 환심을 사고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일에 몰두하는 토니. 그래서 계속 차갑게 구는 V의 태도는 관심 밖이었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언제나 비밀스런 구석이 있었고, 좀처럼 답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토니를 경멸하였다. 그런 V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별 대수롭지 않아 했으나, 여전히 감을 못 잡는다는 핀잔을 듣다 보니 내가 알던 그녀의 이미지가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또다시 전처를 찾아가 조언을 구해보지만, 이제 당신은 혼자야 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제서야 전처도, 전여친도 돌아서게 만든 원인이 나였음을 어렴풋이 자각하는 토니 영감님. 대체 그의 기억들은 어디까지 희석되어 있던 것인지.


카뮈와 니체를 읽는다던 A의 독서 취향에서 이미 그의 죽음은 예견되어 있었다. 윤리적 결정에 따른 행동을 몸소 보여준 참 대단했던 친구. 자신보다 A에게 끌렸던 전여친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었으나, 친구와의 비교로 심란해진 토니의 화살은 어째서인지 V를 향하고만 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지난 연인의 속을 뒤집고 치근덕대는 건 추잡한 복수심 따위가 아닌 그녀의 경멸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자신을 잘못 보고 오해했던 것으로 돌려놓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신이 저주했던 이의 불행한 말로를 어떻게 바꿀 수 있으랴. 틀어져 버린 사이를 무슨 수로 만회할 수 있으랴. 이것은 명쾌하든 미스터리하든 마찬가지일 테다. 토니가 어떻게든 문제를 풀고 나름의 답을 내려보는데, 정작 그녀의 경멸은 전혀 다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토록 둔하고 눈치 없는 주인공도 결국 눈치챘던데, 왜 나는 다 읽고도 몰라서 남들의 리뷰를 읽고 이해했는지. 이거야 원, 나야말로 감을 못 잡는 놈이었다.


다시 보니까 참 역설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좋았던 기억들은 오물이 잔뜩 묻어있고, 외면했던 기억들엔 정답이 숨어있었으니. 나라고 다를 게 뭐 있을까. 나 같은 경우에는 누가 보더라도 상대방의 100% 과실이지만, 그게 과연 수년 동안 저주해가며 감정 상할만한 일이었나 싶다. 이제는 너무 오래 지나버린 그 사건에서 혹여 내가 간과한 문제나 일들이 있었을까 봐 걱정도 든다. 너무 강렬했던 감정과 기억들은 영영히 박제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끄집어내보니 많이 흐려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흩어져 날아가고 있을까. 그것들을 잡아야 할지, 내버려 두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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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1-18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물감님의 고3 시절 연애담, 완전 소설이군요?
역시 한 번만 바람피우는 사람은 없네요. 속이 다 후련...ㅋ
사적인 이야기 앞으로도 종종 해주셨음 좋겠어요. 너무 재밌어요!
저에게는 그저 그런 소설이었는데 물감님의 분석에 재독하고 싶네요.

물감 2024-01-18 12:00   좋아요 1 | URL
으하하 제가 이같은 굴곡들이 좀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의 냉소적인 모습이 되었거든요. 보다시피 좋은 추억감이 못되어서 잘 꺼내지 않으려는 것도 있고요ㅋㅋ 기회되면 가끔씩 오픈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잠자냥 2024-01-18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극소심했던 나는 주먹다짐 대신 싸이월드에다가 그들에 대한 맹비난의 글로 도배를 하였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첫문단 진짜 재밌네요 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4-01-18 13:31   좋아요 1 | URL
역시 킬 포인트를 아시는군요 ㅋㅋㅋㅋ 따지고 보면 저의 필력(?)은 그때부터 생겨난 듯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하에서 쓴 수기 창비세계문학 10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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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사회 용어가 있다. 어느 집단이든지 간에 또라이가 꼭 있어서 생겨난 말인데, 요즘은 빌런이라는 표현으로 순화해서 불리는 중이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도 그 빌런이 계시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믹서기에 넣어 갈아버려도 시원찮을 저런 인간조차 문학 속의 인물로 배정된다면 하나의 훌륭한 서사가 탄생한단 말이지. 그렇담 누구의 어떤 삶이든지 간에 다 보기 나름이라는 얘긴가. <지하에서 쓴 수기>를 읽다가 곁길로 뻗어나간 생각을 적어봤다. 이번 주인공은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자의식 과잉의 또라이시다. 현실에서는 조금도 관심 주지 않을 인간인데, 왜 이같은 비호감도 책으로 만나면 잠자코 지켜보는 게 가능할까. 문학의 힘이란.


이것은 40년간의 지하 생활로 잡생각의 가지들이 마구 뻗어나갔던 어느 괴짜의 독백록이다. 1부에서는 웬 헛소리가 메들리로 나오길래 또 잘못 걸렸나 싶었다. 근데 읽다 보니 어라, 의외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담론의 각 장마다 수시로 트집을 잡고 불만을 표하는데, 그의 발언들은 살다가 한 번씩 삐딱해졌을 때에 들 법한 생각이어서 막 언짢거나 거부감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나‘는 남들에게 존경받기를 원하지만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이렇게 쓴소리나 내뱉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를 경멸하고 내 말에 반박한다면 철저히 응징하겠단다. 이렇듯 심보가 고약하고 저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지만 개인의 욕구가 타인의 방향과 다른 것뿐이다. 그러니까 사회적 통념에서 좋고 나쁨은 있어도, 맞고 틀림은 없음을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다소 표현이 거칠어서 그렇지, 은근히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작품이다.


난해하다고 알려진 작품이던데, 나는 1부에서 보여준 난해함보다 2부의 난해함이 좀 더 거시기했다. 2부는 이야기 식으로 바뀌어서 좋았다만, ‘나‘의 멘탈이 극과 극을 오가느라 따라잡기에 버거웠다. ‘나‘는 싫어하는 동창의 송별식을 억지로 따라와 물을 흐려놓는다. 친구들의 비난에도 자신의 애티튜드를 고집하는 ‘나‘는 돌아서서 후회했다가 다시 욱하는 이 태세 전환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지하공간에 오래 갇혀서 맛이 간 줄 알았더니 실제 지하가 아닌 의식의 음지를 가리키는 말이란다. 원래 남들과 잘 못 어울리는 성격의 ‘나‘는 스스로를 낭만주의자라 일컫는다. 그 특성이란 모든 걸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뚜렷하게 바라보며- 아름답고 고상한 것을 내적으로 지켜내어 자신을 완전하게 보존하는 것이다(80p). 따라서 자신의 확고한 믿음과 판단에 관하여는 절대 사수해야만 했던 건데, 혹여 그 똥고집들이 신념에서 비롯됐다면 모를까, 제 성정을 못 참고 막 나가니까 어이가 없는 거다.


‘나‘의 난해함은 계속된다. 이제 막 직업여성이 된 리자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참된 삶과 사랑을 읊어가며 인생 대선배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사랑이 어떻고, 결혼은 어떻고, 부부와 자식 관계는 어떠하며... 온갖 청산유수의 훈계를 스트레이트로 쏟아내는데, 바로 이전까지 친구들에게 독기를 품고 칼을 갈던 상황에서 갑자기 이런 장면으로 이어져 도무지 맥락이 없었다랄까. 그렇게 헤어지고 ‘나‘의 집을 찾아온 리자는 그의 분노조절장애를 직접 보고서 당황한다. 자신의 가난과 허세를 들켜버린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 친구에게 괜한 자존심을 부려댄다. 지가 상처 줬으면서 수치와 모욕을 받았다는 건 또 무슨 사고방식일까. 사회활동이 없거나 인간관계가 끊어진 사람이 자기 생각에 갇혀버리면 이렇게나 위험하다.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 진짜 참 나이 먹고 뭣들 하는 짓거리인지. 하지만 이것 또한 앞서 말한 옳고 그름이란 과연 존재하는가를 곱씹어 보게 해준다는 사실. 그래도 말야, 존경받고 싶다면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좋다지만 똥으로 메주를 쑤어선 안되는 겁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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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1-13 12: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을 좋아하렵니다. 재독하려고 사 놓았는데 재독 못 들어갔으나 워낙 정독하여 다 기억이 나는 소설입니다. 어떤 행동에서는 마치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도 선생을 왜 심리학자라고 하는지 알겠더라고요.ㅋㅋ

물감 2024-01-13 21:12   좋아요 2 | URL
여러 작가들이 인간의 추한 내면을 묘사할 때에 점잖고 세련된 방식을 택하는 반면에, 도 슨생은 그런거 없이 노빠꾸라서 참신하고 좋더라고요. 이 작품에서도 좋았던 구간이 많았는데 워낙 주인공의 감정 기복이 심해서 말이죠 ㅋㅋㅋㅋ 페크님께서 제 몫까지 좋아해주셔요....
올해에는 도스토옙스키를 독파해볼 생각입니다. 몇몇 작품은 분량의 압박이 엄청나더라고요. 그래도 작가가 한 가독성 하니까 해볼만할듯 싶어요 ㅋㅋㅋ

페크pek0501 2024-01-17 14:15   좋아요 1 | URL
도 선생의 작품으로 <죄와 벌>을 추천합니다.
저에겐 도 선생이 천재임을 인정하게 된 소설이었어요.

물감 2024-01-17 14:49   좋아요 0 | URL
1분기 안에 죄와벌 스타트 할 계획입니다. 가장 두껍다는 지만지 번역본으로요ㅋㅋㅋ

coolcat329 2024-01-13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1부는 참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2부는 또 웃기더라구요. ㅋㅋ
현실에서 만나면 정말 싫을 거 같은데, 소설 속에서 만나는 이상한 사람들은 이해하고 싶고 한편으론 정이 가는 게 신기해요.
또라이 ㅋㅋㅋ 딱 맞는 표현이에요.
근데 그게 또 인간의 한 특징이기도 한 거 같습니다.

물감 2024-01-14 08:00   좋아요 1 | URL
현실에서 멀리하던 연구대상들을 엮이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니까 보게 된다...가 제 결론입니다ㅋㅋ과연 쟤네들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가 공개되는 셈이니깐요ㅋㅋㅋㅋ

자목련 2024-01-15 1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 읽다가 앞에서 진도가 안 나가서 포기했어요.

물감 2024-01-15 12:45   좋아요 1 | URL
1부는 건너 뛰고 2부만 읽어도 손색없을 작품입니다(제가 보기엔).
1부와 2부가 그렇게 연관성 있다고 느껴지지 않아서요.
그나마 분량이 적은 게 다행이었지, 300 쪽 이상이었으면 저였어도...

stella.K 2024-01-17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딴 얘긴데 또라이 제조기는 천명관이 우리나라에선 최고더만요.
그건 장편소설에서 빛나죠. 드러운데 재밌어서 키득거리며 읽게 됩니다. ㅋㅋ

물감 2024-01-18 07:08   좋아요 1 | URL
<고래>,<고령화가족> 딱 두 권 읽어봤는데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ㅋㅋㅋ
근데 <고래> 말고는 대부분 좀 약하다는 평을 어딘가 들었어서 손이 잘 안갔거든요. 다른 책들도 볼만하시던가요??ㅋㅋ

stella.K 2024-01-18 10:39   좋아요 1 | URL
고래가 최고긴 하죠. 근데 나의 삼촌 브루스 리도 못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감님은 부르스 리만 읽으시면 주요작은 다 읽으시는 셈은 아닐까 싶기도하네요. 단편은 별로고 작가는 장편에 강한 것 같아요.

물감 2024-01-18 10:57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부르스 리>까지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