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탕 (1, 2권 합본 리커버 에디션) -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2018년도에 출간된 이 작품은 나오자마자 히트를 치고 독자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하여 나도 한 번 읽어볼까 했다가 분권이라서 미루고 미룬 게 벌써 2년이나 지났더군. 나중에 합본으로 나오면 읽어야지 했는데 그 바램이 드디어 이뤄졌다. 꽤나 분량이 많은데도 합본으로 만들 줄이야. 출판사가 센스 좀 있네, 그래. 남들은 다 읽고 시들시들해진 이 작품을 이제야 본 나님은 격한 감동을 입고서 뒤늦게 폭풍 리뷰를 쓰고 있다. 이제껏 책을 읽으면 좋든 싫든 내 감정과 생각을 글로 남기고 싶었는데, 이 책은 그 반대이다. 지금의 여운을 글로 남기지 않고 그냥 이대로 간직하고 싶다. 이 감동은 글로 표현하기 힘든 데다, 나의 감정들이 소리 없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그만큼 이 책은 깊고 진한 울림을 가졌다. 작품성도 그렇지만 저자의 간결한 문체나, 활자로 소화해낸 영상 기법에도 여러 번 감탄했다. 역시 영화감독 출신이라 감각이 다르긴 하더라. 영화화되면 꼭 보러 가야겠다.


초간단 줄거리. 식당의 주방보조로 살아온 고아원 출신의 주인공은 사장님의 권유로 20년 전 부산의 한 곰탕집을 방문한다. 미래엔 없는 이 곰탕의 레시피를 빼내기 위해 곰탕집 주방보조를 자청한 그는 놀랍게도 곰탕집 아들과 여자친구가 자신의 부모라는 사실을 알고 극대노한다. 한편 옆구리에 구멍 뚫린 시신이 등장하여 난리가 난 부산 경찰들은 갈수록 똥줄이 탄다. 그리고 순간이동으로 부산 곳곳에 출몰하는 의문의 남자는 뭐 때문에 주인공을 추격하는가.


인간이 과거로 가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맺힌 한을 풀기 위해 가는 거다. 그 말인즉슨 100% 순수한 사유는 없다는 뜻인데, 아무렴 어떤가. 그렇게라도 사심을 채울 수 있다면야. 헌데 부탁받은 거라지만 겨우 곰탕 레시피라는 소박한 욕망이라니. 감도 안 오는 설정이지만 초반부터 떼죽음 당한 여행자들을 볼 때 결코 유쾌한 판타지 소설은 아니란 걸 직감했다. 과거와 달리 현대의 타임슬립 작품들은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내용과 대단히 거리가 멀다. 대표적으로 마블 영화 중 ‘엔드게임‘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런 다크하고 시리어스한 분위기가 언제부턴지 트렌드로 자리를 잡았다. 여하튼 식상하게 또 타임슬립인가 했는데 타 작품과 달리 과거에서 현재로 복귀하질 않았다. 그래서 주 무대는 과거가 되고, 그 과거는 이제 현재의 이야기가 돼버린다. 게다가 곰탕 한 그릇처럼 따뜻한 정이 담긴 내용보다는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몰락을 다루는 내용이 더 많았다. 이렇게 흔한 장르의 뻔한 설정을 뻔하지 않게 쓰는 것도 진짜 능력이다.


작가가 스토리만큼이나 캐릭터 설정에 공들인 게 느껴진다. 특히 인물의 감정 변화가 이 책의 액기스라 할 수 있는데, 먼저 주인공부터 살펴보면 그는 삶에 미련 하나 없는 상태로 과거에 왔다. 그 후 친부모를 만나 공허했던 마음이 분노에서 연민으로, 그리고 애정으로 채워진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가족이라는 것과 그것이 주는 특별한 감정이 건조한 사막에 빛과 생기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래서 과거에 남는 길을 택했지만 그로 인해 다른 여행자들을 죽게 만들었고 자신은 제거 대상이 되었다. 순리를 거스려서 얻는 행복의 대가가 이렇게나 위험하단 걸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곰탕집 아들 순희도 감정 선의 변화가 다이나믹하다. 엄마를 여의고 문제아로 자란 순희는 주인공에게 부모의 자식 사랑 비슷한 걸 느낀다. 소년의 닫혀있던 마음은 점점 열렸고 어느새 친부보다 주인공을 더 좋아하게 된 순희가 후에는 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주인공을 살리려고 한다. 순희의 아버지이자 주인공의 할아버지인 곰탕집 주인의 감정 변화도 볼만하다. 주방 일을 시켜달라는 주인공을 경계하면서도 아들을 챙기는 모습에 맘을 열고, 자신을 대신해 아버지의 역할을 하도록 뒤를 맡겼다. 심지어 주인공이 신원불명의 이방인이란 걸 알고도 경찰에게 가족이라고 거짓말까지 해주었다. 이렇게 얼어붙어있던 모두의 심장은 사랑으로 녹아내리고 펌프질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작가의 넘치는 인간미를 볼 수 있었고, 역시 사랑에는 적이 없다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20년 전의 부산은 오래전에 과거로 넘어온 자들이 먼저 터를 닦고 자리를 잡아 대한민국을 삼키려는 계획을 실행 중이다. 이들은 전부 신분을 훔쳐서 살아간다. 미래인들이 과거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타인의 신분으로 사는 것은 여러모로 리스크가 따른다. 그렇기에 이들은 훔친 신분이 지니고 있던 지위와 권력을 써서 서로를 보호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가짜 신분으로 산다는 건 평생을 야비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현실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잘 나가는 연예인이나 강남 건물주의 삶을 부러워하고, 너도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시켜주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힘쓰고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가 아닌 삶은 절대 내 것이 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네 인생이나 잘 챙겨라‘가 아닐까 한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전부 반영한 걸 보면 작가의 예술 감각이 타고난 게 분명하다. 불필요한 씬은 잘라내어 스피디한 전개를 보여주었고, 타임슬립과 순간이동 같은 판타지 요소도 훌륭하게 소화해냈고, 범죄와 음모로 가득 찬 무대 위에 휴머니즘까지 녹여냈다. 무엇보다 멍청하고 답답한 캐릭터가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반대로 감초 역할이 없다 보니 다소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너무 무겁지 않게 잘 조율했다. 이 책도 하루키 책들처럼 칭찬 일색의 리뷰만 가득하므로 간단히 비평글만 쓰려 했는데, 비평할 껀덕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이제는 국내 스릴러문학의 수준이 엄청나게 올라간 게 느껴져 참 뿌듯하다. 개인적으로 영미권보다는 아직 약하지만 북유럽권보다는 낫다고 본다. 자 그럼, 어서 영화화를 해주시고 다음 차기작으로 컴백해주시길 간절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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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0-06-13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부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대화 주제 중 하나가 1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바꾸거나 하고 싶은가 였어요. 바꾸고 싶은 한 가지가 바로 떠올랐어요. 차마 말하지 못해 오카리나를 배우고 싶다는 둥 책을 좀 더 많이 읽고 싶다는 둥 겉도는 얘기만 했었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그림자와 같은 감정들을 많이 경험한 덕분에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극한의 감정과 지독한 외로움이 글을 쓰는 자양분이 된다는 건 글쓰는 이에게 축복일까요 불운일까요. 판타지와 같은 일이 제게도 일어난다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를 바꾸고 싶어질까요. 햇살같은 길만을 걸었어도 여전히 글쓰기를 갈망하는 삶을 살았을까요.

물감 2020-06-13 22:16   좋아요 2 | URL
결국 나비종님의 과거는 지금의 글을 쓰는 양분이 되었군요. 마치 가수들이 감정을 담아 부르기 위해 일부러 이별을 겪듯이요. 근데 저는 반대로 생각을 해봐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 내 감정이 다치고 슬퍼야만 하는가 하고요. 저도 사실 지난날의 아픔과 상처로 인해 더 성장하고 발전한 부분이 많이 있지만, 선택권이 있다면 그런 성장들 다 필요없으니 아프기 전으로 돌아갈래요. 그리고 좀 더 제자신을 아끼고 위할래요... ㅎㅎㅎ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며 살아온 게 후회가 되서요. 어차피 저나 나비종님같은 글쟁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어도 결국 독서하고 글쓰며 살았을꺼에요. 왕자가 옥상에서 보는 태양이나, 거지가 1층에서 보는 태양이나 다 똑같으니까요^^

나와같다면 2020-06-13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과거로 가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맺힌 한을 풀기 위해 가는 거다

그래서 모든 타임슬립은 안타까워요
그때 그랬더라면

물감 2020-06-13 22:19   좋아요 1 | URL
그때 그랬더라면. 맞아요.
산다는 건 언제나 후회만 남는 일방통행의 길을 걷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지금을, 오늘을 잘 지내야하는데 쉽지 않네요.
 
스페이스 오페라
캐서린 M. 발렌티 지음, 이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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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화 ‘라라랜드‘의 제작팀이 영화화를 맡은 작품이라 해서 냉큼 서평단에 신청했다. 책을 받아보고서야 안 건데 내가 즐겨 하지 않는 SF 장르였다. 몇몇 리뷰를 통해 여러 번 밝힌 바 나는 과학소설을 읽지 않는다. SF는 문학적인 감성을 볼 수 없는 데다, 온갖 어려운 용어와 문장들로 도배돼있어 소설보단 전공서적을 읽는 기분이라 집중이 안 되거든. 그래서 SF나 판타지 같은 장르는 활자보다 영상을 선호한다. 아무튼 이런 성향의 나님께서 이 책을 도전한 이유는 SF 장르라는 것을 확인 못해서... 가 아니라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라는 초 신선한 컨텐츠에 혹했기 때문이다. 일말의 기대감과 반신반의의 심정으로 책을 폈으나 역시는 역시나였다. 시작부터 쏟아지는 이름 모를 행성과 외계인들과 초 진지한 횡설수설 문장들에 급 당황하였고, 아무리 읽어도 내용이 눈에 들어오질 않아 집중이 가장 잘 된다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읽곤 했다. 나름 어려운 책도 침대 위에서 꾸역 꾸역 읽어온 나님을 화장실까지 데려다 놓은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못 버티고 무너졌을지도.


밴드 앱솔루트 제로스의 두 멤버는, 자신들을 찾아온 외계인을 따라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에 반강제로 참가한다. 이 가요제는 은하의 별마다 대표로 뽑힌 우주인들이 모여 경연을 펼치는데, 우승 팀은 꼴찌팀을 몰살하여 우주의 질서를 잡을 특권이 주어진다. 이제 지구의 운명은 나사 빠진 두 남자에게 달렸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위기의식이 전혀 없다는...


국민 MC가 생방송의 죽은 분위기를 살리려 아무 말이나 횡설수설 해대는 듯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런 데에 면역력이 낮은 나 같은 독자들은 2부부터 읽으시길 권장한다. 만약 2부도 이해가 안 가거든 과감하게 3부로 넘어가라. 그래도 마찬가지라면 4부로... 이쯤이면 느낌 왔을거다. 모든 페이지가 난해하다는 것을. 리뷰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의 십중팔구가 장점만 적기 때문에 나는 이제껏 비평 위주로 글을 써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내가 아니어도 많은 비평의 글들이 예상되므로, 이번만큼은 나도 장점만 써볼까 했다가 이내 포기해버렸다. 이 책에서 유일무이한 칭찬거리는 번역가 이정아 님의 피 땀 눈물로 완성시킨 초월 번역 말고는 못 찾겠더라.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과, 과연 이것이 맞는 문법인가 싶은 문장들을 우리말로 옮긴 초월 번역가의 수고에 삼삼칠 기립박수와 별 한 개를 무료 나눔 해드렸다. 아 물론 작가의 미친듯한 상상력과 신들린듯한 문장력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익살스러운 문체와 포복절도 코믹함. 좋아, 다 좋은데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하겠고, 이 작품이 당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파악이 안되었다. 어떻게 가요제를 다루면서 음악 내용은 없는 걸까. 마법사가 될 생각이 전혀 없는 해리 포터, 농구할 생각이 전혀 없는 강백호, 조명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는 엄복동... 아 이건 아니고 아무튼 기본 설정부터 문제 있어 보이는데 SF는 다 이런 걸까.


어찌어찌하여 완독은 했지만 놀랍게도 머리에 남는 것이 없었다. 우주인들의 생김새, 종족의 문화와 특징들, 행성들의 역사 같은 7차원 적인 내용들이 분량의 90%를 차지한다. 제발 좀 우주 얘기는 그만하고 가요제 내용이나 다뤄주길 바랐으나 애석하게도 내 바램은 먼지 알갱이만도 못하다는 걸 느꼈다. 이보다 더한 것은 문법 파괴자가 쓴 듯한 문장들을 욕하고 싶어도 그 글들의 주체가 외계인들이라 욕하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암튼 우주의 언어와 문장들이 뭘 말하려는 건지 대충은 알겠는데 그 이상은 정말이지 이해를 못하겠음. 차라리 어려운 법조문이나 이용약관 같은 글들이 더 이해가 쉬울 정도. 혹시 나만 이런가 싶어서 다른 리뷰들도 읽어봤더니 전부 나처럼 멘붕이 왔더라고. 아무리 봐도 일반 독자들은 버티기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니 국내의 SF 마니아들이여, 부디 그대들만이라도 이 작품을 외면하지 말아달라. 이 책도 누군가에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을 테니까. 여하튼 서평 이벤트답게 괜찮은 리뷰로 보답하고 싶었으나 양심상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음을 출판사에서 부디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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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5-28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좋아요. 한때 추리 소설을 좋아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시간이 아까워
저의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글을 찾게 되더군요. 사유 깊은 에세이가 좋아요. 재미도 있고요.
비현실적인 건 저도 영상이 좋더라고요.

잘 읽었어요. 서평단 신청해서 리뷰 쓰려면 부지런해야 할 것 같아 저로선 엄두를 못 냅니다. 천천히 읽기가 제 적성에 맞아서요. 천천히, 그리고 반복 읽기를 해 볼까 합니다.

물감 2020-05-28 07:19   좋아요 2 | URL
저도 비현실적인건 잘 안봐요. 나랑 맞는 책만 읽는다해도 시간이 부족하니 점점 이것저것 도전을 안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저 생각보다 부지런하지 않습니다. 한 달에 세 네권 정도의 독서와 리뷰가 평균이에요^^ 1년에 백 권 이상 읽는 알라디너들에 비하면 저는 게으른편이죠ㅎㅎ그래서 저도 페크님처럼 적당한 템포로 읽는 걸 좋아합니다. 안맞는 독서 라이프에 스트레스 받고 싶지는 않아서요.

패스파인더 2020-06-03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f 가 취향 많이 타는 장르긴 하죠.ㅎ

물감 2020-06-03 09:53   좋아요 0 | URL
그런데 sf 싫어하는 알라디너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오래전부터 느낀건데 저만 유별난 사람인듯한... 웃프네요ㅎㅎ
 
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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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재앙‘이라는 단어가 친숙한 시대가 된듯하다. 자연 재앙은 그렇다 치고, 인간이 만든 재앙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재앙들이 대부분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만, 전염병은 시기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유일한 재앙이다. 세계를 사망으로 물들이는 코로나를 보며 더욱 실감한다. 과거 메르스나 에볼라처럼 코로나도 잠깐의 유행병으로 생각했다가 어느새 3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 엄청난 재앙 가운데서 재조명된 문학 작품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이다. 일부 이기적인 사람들의 개념 없는 행동으로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 사태 속에서 우리들이 갖춰야 할 것은 바로 공동체 의식이다. ‘페스트‘는 이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반성의 교과서였다.


쥐 사체에서 발생한 페스트는 이례 없었던 고통을 선사했다. 계엄령이 내려진 도시는 외부와 차단되고 시민들은 강제로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페스트는 멈출 방법이 없었고, 서서히 죽어가는 병자를 지켜보는 게 다였다. 감염자들은 시신이 되어 구석에 쌓여가고, 산 자들은 곧 있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사망에게 먹혀버린 이 도시에서 최후까지 페스트와 싸우는 의사 리외. 죽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이 시기에 읽으면 더 와닿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봤던 영화를 또 보는 기분이 들어서. 그만큼 페스트와 코로나는 구석구석 닮아있었다. 사실 재난 소설의 내용은 그게 그거라서 숲보다는 나무에 더 주목해야 한다. 고갈되는 음식과 전기. 무너지는 경제. 증가하는 실업자. 고립된 도시와 정지한 시간 속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희망 등등. 집안에 갇힌 시민들이 하는 일은 지나간 시간들을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제 세상에 없거나,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사이가 돼버렸다. 그렇게 이별은 갑자기 찾아와 모두의 일상을 헤집어놓았다. 그러나 길어지는 재앙에 적응된 사람들은 슬픔에 무덤덤해지고, 고통으로 탄식하지도 않고, 타인의 불행에도 안타까워하지 않게 된다. 주인공은 이러한 변화들이 곧 불행이며 절망임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감정에 무뎌지지 않고서 어떻게 버티란 말인가.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묵묵히 죽을 차례를 기다렸다. 과연 인간은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존재였다.


등장인물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절묘하게도 셋 다 지금의 한국 상황과 딱 맞아떨어진다. 첫 번째는 종교에 의존하며 현실을 망각하는 자들. 재앙은 신의 뜻이니 죗값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며 스스로 이겨낼 생각을 하지 않는 유형이다. 신천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남들이 죽든 말든 제 신앙만이 전부였던 그들의 결과가 어땠는지는 굳이 적지 않겠다. 두 번째는 사치를 부리며 현실을 부정하는 자들. 절대 재앙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돈과 허세로 자유를 외치는 유형이다. 이태원 클러버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철부지들은 자유를 무슨 돈 주고 사 먹는 삼각김밥처럼 생각하나 본데, 그들이 누렸던 자유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도 적진 않겠다. 때로는 오늘의 치킨을 내일로 미룰 줄도 알아줬으면 한다. 세 번째는 페스트에 맞서 저항하는 자들. 재난을 이겨내자는 국가 방침에 적극 동참하는 유형으로, 이들은 건강한 사회가 곧 개인의 행복이라 믿는다. 질병관리본부와 의료진들이 이 유형에 해당된다. 거창한 뜻을 품지 않아도 그와 비슷한 이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쉬지도 않고 치료에 전념하는 이들이 있어 코로나의 기세는 차츰 꺾여간다. 그러면 우리는 이 중에 어느 유형에 속해야 할까. 잘 생각해보시라.


카뮈가 이 작품으로 연대의식의 중요성을 일깨운다고 해설자는 기록했다. 아마도 이 교훈 때문에 지금 ‘페스트‘가 재조명 받은 게 아닐까. 코로나를 대하는 인식과 태도는 나라마다 판이했다. 개인의 자유를 더 우선시하는 나라도 있고, 무력으로 국민을 통제하는 나라도 있으며, 반대로 국민이 자발적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나라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는 코로나가 돌자마자 외국인의 입국을 차단함으로 진정 국민을 위하는 화끈한 나라가 되었다. 반면 자유민주주의국가인 미국은 우월주의와 오만함으로 스스로를 방치하다 수많은 사망자를 만들어낸 무식한 나라가 되었다. 두 나라는 우리가 생각했었던 이미지와 상반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러시아는 관점을 국가와 단체에 맞추었고, 미국은 개인에게 맞춘 결과이다. 저자는 이런 연대의식의 부재가 몰고 오는 피해에 대해서 다양한 인간 군상으로 기록해두었으니 직접 읽어보길 권장한다.


또한 페스트는 사랑의 부재를 그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얼마 없는 시간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페스트는 그런 기회조차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페스트는 유독 잔인한 재앙이었다. 페스트가 지나간 도시의 변화는 하나뿐이었다. 괴로운 시간이 빨리 가길 바랬던 사람들은 제발 시간이 멈추길 바라고 있었다. 그동안 힘껏 사랑하지 못한 세월을 보상받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별한 후에야 가족과 연인의 소중함을 느꼈고, 사랑의 감정으로 긴긴 시련과 고난을 버텼다. 재앙이 끝난 후에도 사랑이 죽어버린 세상이라면 재앙이 끝났다고 볼 수 있을까.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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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0-05-22 0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장을 넘기지 못하고 계속 다시 읽다가 잠시 내려놓은 작품입니다. 코로나 사태와 맞물려서 너무나도 읽고 싶은 책인데 정말 이상하리만치 집중이 잘 안되네요. ㅠㅠ

물감 2020-05-22 07:09   좋아요 2 | URL
집중이 안된단 말에 공감해요. 저도 그랬는데, 이야기 자체로는 큰 매력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흡입력이 있는것도 아니고 가독성이 좋은편도 아니니까요. 이 책은 남들의 리뷰만으로도 이미 읽어본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더니 나름 잘 넘어가더군요ㅎㅎ 저처럼 편히 내려놓고 읽어보세요^^

페크pek0501 2020-05-22 15: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전 읽었는데 이방인보다 좋았어요. 이방인이 너무 엉뚱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바람에 그랬는지도 몰라요. 소설은 참 어렵단 말이에요. 그래서 언제부터가 소설 리뷰는 내 마음대로 쓰기, 로 정하고 쓴답니다. 소설엔 정답이 없음이렷다, 그러면서요. ㅋㅋ

물감 2020-05-22 19:34   좋아요 0 | URL
저는 이방인을 안봐서 잘모르지만 생각을 많이하게 만드는 작가인건 맞는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리뷰는 형식없이 써버려요ㅎㅎ오히려 그런 글이 더 휘리릭 잘써지기도 하고요^^

나비종 2020-05-31 0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페스트를 통찰하는 작가의 문장들에 공감이 많이 가더라구요. 코로나19에 적용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어서 많이 놀랐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세 가지 유형, 엄지척입니다! 우와~하며 역시~하며 몇 번을 읽어봅니다^^
이번 달은 많이 바빠서 허덕이면서 3일만에 후다닥 읽고 오늘 새벽에야 리뷰를 올렸네요.^^;;

물감 2020-05-31 11:46   좋아요 2 | URL
너무 혼자만 바쁘게 사시는거 아닌가요? ㅎㅎㅎ 오랜만입니다. 바쁘신중에도 짬내서 완독과 리뷰작성에 성공하신 나비종님께 기립박수를!!!

통찰력은 조지 오웰 수준급의 작가였어요. 인간은 무엇으로 살고 죽는지, 욕망은 어떤식으로 내면을 무너뜨리는지 등등 어쩜 이렇게 날카로운 시각을 가졌던 것일까요. 이런 분들은 인간의 존재를 연구하다가 작품을 쓴건지, 아님 작품을 쓰기 위해 인간을 연구한건지 모르겠어요. 카뮈의 다른 작품들도 문학동네에서 출간해줬으면 좋겠네요!

일정이 너무 빠듯하시거나, 컨디션이 난조하시면 꼭 알려주세요~ 모임을 연장하거나 잠시 쉬어가거나 하면 되니까요! 아직 갈 길은 멀고, 읽어야 할 책은 많습니다. 그러니 독서모임보다 건강 먼저 챙기시고 기운 회복하시길 바랄게요^^!

나비종 2020-05-31 15:3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확실히 일처리 속도가 예전에 비해 느려져서 그런가봐요. 점점 눈도 침침해지고ㅋㅋ 오랜만이예요, 물감님! 기립박수씩이나 받으니 다음 달 도전 의지가 샘솟습니다, 불!끈!~

제 생각에는 전자인 것 같아요. 인간의 존재를 연구하다가 작품을 쓴 거라는. 작품을 쓰기 위해 인간을 연구했다고 하기에는 전체적인 통찰력의 수준이 하이레벨이라 한 두 해 연구해서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34살의 젊은 나이에 작품을 썼던데 그 나이에 난 뭐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이 모임은 저의 활력소이기 때문에 괜찮아요. 리뷰를 쓰고 물감님과 댓글로 생각을 나누는 하루가 정말 좋습니다. 업무로 인한 대화 말고 진짜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것 같거든요. 이거 마저 없으면 일에 깔릴 것 같은 제가 너무 억울해서요. 낼부터 다시 화이팅하겠습니다!^^*

물감 2020-05-31 20:04   좋아요 1 | URL
사실은 저도 나비종님과의 독서 이야기하는 날을 손꼽아기다리며 살고 있어서요, 예정에 없는 휴식기가 생기면 슬플거 같네요^^;; 나비종님만큼 바쁜건 아니지만 저역시 짬을 내야만 독서가 가능한 요즘인지라 ㅎㅎㅎ그래도 이건 꼭 해야한다! 라는 책임의식으로 모임에 참여하고 있어요. 나비종님도 같은 마음이시겠죠 ㅎㅎ 이렇게 바삐 사는데도 책을 읽고 리뷰까지 작성하고 나면 굉장히 뿌듯해요! 이번달도 헛되게 보내지 않았구나,하는 마음으로 한달을 마무리하게 되니까요~ 그럼 말씀하신대로 6월도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할게요^^ 점점 날이 더워져가는데 건강조심하시고 멘탈도 잘 잡으시길 바라요!

나비종 2020-05-31 20:08   좋아요 0 | URL
짧은 5월의 편지를 물감님께 썼어요. 시간 나실 때 제 서재로 오세요~^^
 
콘크리트 수상한 서재 3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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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제는 소설책의 서평단 모집이 예전만큼 많지가 않다. 그럴 때마다 한국인은 정말 문학을 안 읽는다는 걸 체감한다. 이 정보화 스마트 시대에 허구적인 이야기를 자꾸 봐서 뭐 하냐는 말도 들었지만, 아니 뭐든지 유익하고 득이되는 것만 보고 듣고 살아야 하나? 반대로 문학만이 줄 수 있는 감성은 전공서적이나 자기 계발서 같은 책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단 말이다. 먹고사는 데에 그런 건 필요도 없고 도움도 안 된다는 사람하고는 상대를 안 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들을 때마다 깊은 빡침이 전신을 감싸고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받는 세상, 이런 장르문학으로 해소하고 사는 거지 뭐. 여하튼 오래간만에 읽는 국내 미스터리 소설인데 진지하게 리뷰 한번 써보도록 하겠다.


안덕은 다 쓰러져가는 낡아빠진 작은 도시이다. 이곳으로 아들과 함께 이사 온 검사 출신 변호사 세휘. 그리고 그녀의 당숙이자 이 지역을 쥐락펴락하는 최종 보스 장 회장. 얼마 뒤 도시는 연쇄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장 회장을 따르던 오른팔들이 연달아 실종된다. 어쩌다 보니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그녀는 당장의 돈이 필요했고, 방화범을 찾아내면 뒤를 봐주겠다는 당숙의 제안에 넘어간다. 주인공을 정계로 진출시켜 너 좋고 나 좋자는 당숙의 계획이 뻔한 선악과라는 걸 알면서도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보다 먼저 범인을 알아내야 하는 그녀는 이 일이 보통 위험한 게 아님을 느끼지만 너무 깊숙이 들어와서 그만두지도 못한다. 대체 이 연쇄 사건으로 범인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잘 쓴 책이다. 김호연 작가의 책을 읽었을 때 이런 느낌을 받았었지. 개인적으로 좋았던 점은 주요인물을 모두 여성으로 설정한 것이다. 지금까지 범죄소설은 남성들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성이 이끌어가는 작품이 거의 없다. 국내 문학은 더더욱 그렇다. 솔직히 여성 캐릭터들이 수사나 액션을 담당하는 게 한계 아닌 한계가 있긴 하다. 신체적인 문제도 있고, 비협조적인 타인들의 태도도 그렇기에. 범죄소설의 주인공들 직업이 대부분 검사, 변호사, 경찰, 군인, 탐정이고 아무래도 이쪽 바닥이 남성들로 조직화되어 있다 보니 더 그랬을 것이다. 그렇기에 평범한 여성 변호사가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갈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이런 장르는 예측이 안되면 안 될수록 흥미롭고 집중도 잘 되거든. 게다가 악역도 골렘 같은 피지컬의 여성이었고, 남성들이 저지르는 범죄 계획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참 여러 번 편견을 깨준 책이다. 


이것 말고도 작가는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그중 양심과 탐욕의 공존을 이야기의 원동력으로 삼은 것이 놀라웠다. 당숙인 장 회장은 도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고, 그만큼 비밀도 많고 뒤가 구린 사람이었다. 반면에 치매 걸린 엄마와 반항 기질을 보이는 자식을 케어하며 집안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주인공은 당숙의 협박 어린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법조인이면서도 돈 때문에 장 회장의 개가 되어야만 했던 그녀는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숨이 막혔지만, 집안을 위해서라면 똥이든 된장이든 다 받아들이기로 한다. 사건에서 손 떼고 싶어도 가족을 걸고넘어지는 당숙의 협박으로 수사는 멈출 수 없었다. 이런 진퇴양난의 번뇌가 시작부터 끝까지 유지된다. 여기에 완급조절도 훌륭하고 장면들이 곧바로 영상화될 만큼 매끄러워서 저자가 무슨 시나리오 작가인 줄 알았더니 일반 회사원이라고 함. 이럴 수가.


개인적으로 원피스 만화를 보며 감탄했던 게 그 많은 등장인물들이 전부 깊은 사연을 안고 있다는 거였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주연이든 엑스트라든 말이다. 그렇다 보니 스토리는 더욱 탄탄해지고 캐릭터는 입체적으로 변했다. 이 책도 그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잠깐 지나가는 비중 적은 인물에게도 사연을 심어주어 리얼리티를 살렸다. 여기에 정유정 작가의 특기인 음산한 분위기 연출까지 집어넣었다. 이만하면 장르문학으로써 웬만한 건 다 갖췄다고 봐도 무방하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사건 수사보다는 도시의 부조리와 주인공의 집안 문제 쪽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있다는 점과, 주인공이 변호사보다는 아이의 엄마 캐릭터로 더 부각돼있다는 점이다. 이러다 보니 작품의 성격이 어중간해져 버렸다. 연쇄 실종사건을 다루는 플롯으로 소개된 책인데 진짜는 사회소설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제목인 콘크리트의 의미가 본문에 나오진 않았지만 쉽게 부서지지 않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가리킨 게 아닐까 한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듯이, 돈과 세상도 그러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범인의 승리로 끝나는 배드 엔딩이다. 근데 난 오히려 흔한 권선징악으로 끝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오랜만에 정말 잘 만든 국내 문학을 읽게 되어 감격했다. 좋은 작가와 작품을 소개해준 황금가지 출판사에도 감사드린다.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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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의 심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6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연휴 기간 동안 책이나 실컷 읽어야지 했던 계획과 달리 저질체력의 몸뚱이는 잉여로운 침대 생활 속에 젖어버렸다. 먹고살기 바빠서 정해진 일정대로만 살다 보니 흐르는 세월이 아까워 뭐라도 해보자며 시작한 것이 독서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제는 낭비되는 시간들이 그렇게 아깝지만도 않다. 나의 독서는 삶의 템포를 늦추고 유연한 생각을 만드는 데에 의미를 두고 있지만, 때로는 그것이 나를 옭아매는 사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정녕 나는 독서가 좋은 것인지 스스로를 의심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괜한 걱정이었다. 독서 슬럼프의 원인과 해결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방전된 배터리는 재충전을 해야 한다. 단 것도 먹어주고, 카페인도 섭취하면서 컨디션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독서가 안 내킨다면, 아직 회복이 덜 된 것이니 좀 더 주무시면 된다. 책을 의무가 아닌 취미로 읽는 사람이라면 참고해보시길. 게으른 나의 독서 생활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느라 말이 길어졌다. 오랜만에 코넬리 옹의 서브 시리즈인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를 골라봤다.


장기간의 재활원 생활을 마치고 다시 변호사로 복귀하는 미키 할러는 라이벌이던 변호사가 갑자기 살해당하면서 그의 모든 담당 사건들을 넘겨받게 된다. 의뢰인 중에는 살인범으로 찍힌 영화사의 대표가 있었고, 이 거물의 변호에 반드시 성공해서 완벽한 부활 신고식을 할 생각이다. 죽은 변호사가 숨겨둔 마법의 총알을 찾아낸 할러는 그것으로 재판을 승리로 이끌어간다. 한편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살인범의 냄새를 맡고 불안에 휩싸이는 할러. 그리고 그에게 접근하는 해리 보슈와 경찰들. 할러는 어떤 위험에 빠진 것일까.


형사물인 ‘해리보슈 시리즈‘는 사건을 파헤치고 수사하는 속도가 시원시원한 편인데, 법정물인 ‘미키 할러 시리즈‘는 액션이 필요 없는 작품이라 진행이 매우 더디다. 또한 등장인물은 많은데 이해관계는 복잡해서 정리하느라 집중력이 오래가질 못했다. 더군다나 1편인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를 읽은 지 한참 지나서 시리즈의 전후가 가물가물하다. 이래서 시리즈는 텀을 길게 두면 안 됨. 암튼 자칭 교활한 천사였던 할러는 1년의 공백 기간이 지나서 매우 유해져 버렸다. 실력이야 여전했지만 어쩐지 캐릭터를 잃어버린 느낌이다. 아무튼 이번 편부터 할러와 보슈 두 사람은 본격적인 만남을 가지는데, 스타일이 정반대라서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으르렁 갸르릉 거리고 있다. 보슈에겐 융통성과 온유함이 필요하고, 할러에겐 윤리와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그래서 작가는 두 캐릭터를 붙여서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했다. 다 좋은데 브로맨스는 자제해줬으면.


일거리를 여러 개 받아서 좋기도 하겠지만 범인이 라이벌의 중요 자료들을 들고 날랐다는 게 문제였다. 나름대로 사건을 정리해봐도 구멍은 많았고, 사건들 간에도 연관성이 보이는데 그것마저 알 수 없으니 지금 가는 길이 막힌 길인지 뚫린 길인지 캄캄하기만 했다. 암튼 여러 사건을 맡아서 동시에 진행하다 보니 내용이 계속 교차되고, 등장인물도 여럿 쏟아져 나와 중간까지는 정신이 너무 없었다. 갈수록 판은 커지는데도 좀처럼 명확한 길이 안 나와서 너무 시간만 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안 그래도 느릿느릿한 장르인데. 이번 작품의 핵심은 ‘거짓말‘이다. 법조계의 고인 물이 다 돼가는 주인공은 그간의 경험으로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믿고 있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거짓말로 남들을 이용하던 그가, 반대로 그 거짓말에 이용당하는 프로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항상 나는 놈의 입장에 있다가 뛰는 놈의 입장이 되고 보니 답답해 죽으려 한다. 늘 그렇듯이 당근 한입 주고 미친 듯이 채찍질하는 사디스트 작가 마이클 코넬리였다.


아무리 무죄를 주장한다지만 당당함이 우주를 찌르는 의뢰인의 태도는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기보다, 사회의 위치가 그런 인품을 낳은듯해 보였다. 어쨌건 이 거물의 변호를 위주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건 맞지만, 할러 자신이 누군가의 표적이 되었다는 불안감과, 지나치게 간섭하는 해리 보슈와, 비록 이혼했지만 다시 점수 좀 따보려는 아내와의 줄다리기 등등 서브 스토리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느낌이다. 좋게 보면 상다리 휠만큼 먹을게 많은 거고, 나쁘게 보면 메인 요리가 부실한 거다. 후속편을 생각해서 여기저기 밑밥을 뿌리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는 안되지. 이런 구멍을 강렬한 캐릭터로 메꾼다면 모를까, 순둥이가 되어버린 할러에게는 더 이상 배꼽을 커버칠 힘이 없었다. 어째서 작가는 그렇게나 개성 가득했던 캐릭터를 겨우 두 편만에 탈바꿈한 것일까.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랬을 테지만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제프리 디버가 떠오른다. 둘 다 미국을 대표하는 하드보일드 스릴러소설 작가이고, 시리즈 작품을 쓰면서 매번 대박을 터뜨리는 것도 똑같고, 범죄 분야의 전문성과 문학의 대중성까지 갖췄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디버의 글이 김경호라면 코넬리의 글은 박완규이다. 디버는 김경호처럼 날카롭고 스트레이트한 음색이고, 코넬리는 박완규처럼 묵직하고 와일드한 음색이다. 여러 면에서 닮아있는 둘이지만 차갑고 강렬한 디버의 글은 겨울 왕국을 연상케 하고, 코넬리의 글은 어둡고 후덥지근한 분위기라서 지하 던전을 연상케 한다. 이상하게도 그 던전에 한번 들어가면 숨쉬기가 힘든데도 나오고 싶지가 않다. 느낌 아시죠?


원래 법정 스릴러 하면 존 그리샴이지만 워낙 벽돌 책이라 읽어볼 엄두가 안 났는데, 코넬리 표 법정물은 두꺼워도 별 부담이 없어서 좋다. 장르 특성상 법정물은 진지하고 딱딱한 분위기의 연속이어서 일정한 재미를 주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어떤 분야보다도 훨씬 높은 전문성을 요한다. 그 어려운 걸 코넬리는 보란 듯이 해내고 있는데 1편도 그렇고 이번 편도 매우 준수한 내공을 보여준다. 흔한 변호인의 속고 속이는 이야기만으로 재미를 뽑아내는 게 한계가 있으므로, 기자나 형사들과도 엮어 의뢰 사건의 안팎으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일명 텐션 뻥튀기라고 하는데 코넬리가 이걸 참 잘한다. 타고난 감각과 고유의 컬러를 정말 잘 활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코넬리 작품은 무조건 읽어주자. 칭찬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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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 2020-06-03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넬리의 해리보쉬 시리즈도 볼만합니다. 미키할러 변호사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정통수사물
느낌이 많이 나요.

물감 2020-06-03 09:49   좋아요 0 | URL
아 보슈 시리즈는 몇권읽었어요! 제 취향은 해리보슈가 더 좋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