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탕 (1, 2권 합본 리커버 에디션) -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2018년도에 출간된 이 작품은 나오자마자 히트를 치고 독자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하여 나도 한 번 읽어볼까 했다가 분권이라서 미루고 미룬 게 벌써 2년이나 지났더군. 나중에 합본으로 나오면 읽어야지 했는데 그 바램이 드디어 이뤄졌다. 꽤나 분량이 많은데도 합본으로 만들 줄이야. 출판사가 센스 좀 있네, 그래. 남들은 다 읽고 시들시들해진 이 작품을 이제야 본 나님은 격한 감동을 입고서 뒤늦게 폭풍 리뷰를 쓰고 있다. 이제껏 책을 읽으면 좋든 싫든 내 감정과 생각을 글로 남기고 싶었는데, 이 책은 그 반대이다. 지금의 여운을 글로 남기지 않고 그냥 이대로 간직하고 싶다. 이 감동은 글로 표현하기 힘든 데다, 나의 감정들이 소리 없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그만큼 이 책은 깊고 진한 울림을 가졌다. 작품성도 그렇지만 저자의 간결한 문체나, 활자로 소화해낸 영상 기법에도 여러 번 감탄했다. 역시 영화감독 출신이라 감각이 다르긴 하더라. 영화화되면 꼭 보러 가야겠다.


초간단 줄거리. 식당의 주방보조로 살아온 고아원 출신의 주인공은 사장님의 권유로 20년 전 부산의 한 곰탕집을 방문한다. 미래엔 없는 이 곰탕의 레시피를 빼내기 위해 곰탕집 주방보조를 자청한 그는 놀랍게도 곰탕집 아들과 여자친구가 자신의 부모라는 사실을 알고 극대노한다. 한편 옆구리에 구멍 뚫린 시신이 등장하여 난리가 난 부산 경찰들은 갈수록 똥줄이 탄다. 그리고 순간이동으로 부산 곳곳에 출몰하는 의문의 남자는 뭐 때문에 주인공을 추격하는가.


인간이 과거로 가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맺힌 한을 풀기 위해 가는 거다. 그 말인즉슨 100% 순수한 사유는 없다는 뜻인데, 아무렴 어떤가. 그렇게라도 사심을 채울 수 있다면야. 헌데 부탁받은 거라지만 겨우 곰탕 레시피라는 소박한 욕망이라니. 감도 안 오는 설정이지만 초반부터 떼죽음 당한 여행자들을 볼 때 결코 유쾌한 판타지 소설은 아니란 걸 직감했다. 과거와 달리 현대의 타임슬립 작품들은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내용과 대단히 거리가 멀다. 대표적으로 마블 영화 중 ‘엔드게임‘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런 다크하고 시리어스한 분위기가 언제부턴지 트렌드로 자리를 잡았다. 여하튼 식상하게 또 타임슬립인가 했는데 타 작품과 달리 과거에서 현재로 복귀하질 않았다. 그래서 주 무대는 과거가 되고, 그 과거는 이제 현재의 이야기가 돼버린다. 게다가 곰탕 한 그릇처럼 따뜻한 정이 담긴 내용보다는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몰락을 다루는 내용이 더 많았다. 이렇게 흔한 장르의 뻔한 설정을 뻔하지 않게 쓰는 것도 진짜 능력이다.


작가가 스토리만큼이나 캐릭터 설정에 공들인 게 느껴진다. 특히 인물의 감정 변화가 이 책의 액기스라 할 수 있는데, 먼저 주인공부터 살펴보면 그는 삶에 미련 하나 없는 상태로 과거에 왔다. 그 후 친부모를 만나 공허했던 마음이 분노에서 연민으로, 그리고 애정으로 채워진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가족이라는 것과 그것이 주는 특별한 감정이 건조한 사막에 빛과 생기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래서 과거에 남는 길을 택했지만 그로 인해 다른 여행자들을 죽게 만들었고 자신은 제거 대상이 되었다. 순리를 거스려서 얻는 행복의 대가가 이렇게나 위험하단 걸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곰탕집 아들 순희도 감정 선의 변화가 다이나믹하다. 엄마를 여의고 문제아로 자란 순희는 주인공에게 부모의 자식 사랑 비슷한 걸 느낀다. 소년의 닫혀있던 마음은 점점 열렸고 어느새 친부보다 주인공을 더 좋아하게 된 순희가 후에는 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주인공을 살리려고 한다. 순희의 아버지이자 주인공의 할아버지인 곰탕집 주인의 감정 변화도 볼만하다. 주방 일을 시켜달라는 주인공을 경계하면서도 아들을 챙기는 모습에 맘을 열고, 자신을 대신해 아버지의 역할을 하도록 뒤를 맡겼다. 심지어 주인공이 신원불명의 이방인이란 걸 알고도 경찰에게 가족이라고 거짓말까지 해주었다. 이렇게 얼어붙어있던 모두의 심장은 사랑으로 녹아내리고 펌프질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작가의 넘치는 인간미를 볼 수 있었고, 역시 사랑에는 적이 없다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20년 전의 부산은 오래전에 과거로 넘어온 자들이 먼저 터를 닦고 자리를 잡아 대한민국을 삼키려는 계획을 실행 중이다. 이들은 전부 신분을 훔쳐서 살아간다. 미래인들이 과거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타인의 신분으로 사는 것은 여러모로 리스크가 따른다. 그렇기에 이들은 훔친 신분이 지니고 있던 지위와 권력을 써서 서로를 보호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가짜 신분으로 산다는 건 평생을 야비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현실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잘 나가는 연예인이나 강남 건물주의 삶을 부러워하고, 너도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시켜주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힘쓰고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가 아닌 삶은 절대 내 것이 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네 인생이나 잘 챙겨라‘가 아닐까 한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전부 반영한 걸 보면 작가의 예술 감각이 타고난 게 분명하다. 불필요한 씬은 잘라내어 스피디한 전개를 보여주었고, 타임슬립과 순간이동 같은 판타지 요소도 훌륭하게 소화해냈고, 범죄와 음모로 가득 찬 무대 위에 휴머니즘까지 녹여냈다. 무엇보다 멍청하고 답답한 캐릭터가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반대로 감초 역할이 없다 보니 다소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너무 무겁지 않게 잘 조율했다. 이 책도 하루키 책들처럼 칭찬 일색의 리뷰만 가득하므로 간단히 비평글만 쓰려 했는데, 비평할 껀덕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이제는 국내 스릴러문학의 수준이 엄청나게 올라간 게 느껴져 참 뿌듯하다. 개인적으로 영미권보다는 아직 약하지만 북유럽권보다는 낫다고 본다. 자 그럼, 어서 영화화를 해주시고 다음 차기작으로 컴백해주시길 간절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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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0-06-13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부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대화 주제 중 하나가 1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바꾸거나 하고 싶은가 였어요. 바꾸고 싶은 한 가지가 바로 떠올랐어요. 차마 말하지 못해 오카리나를 배우고 싶다는 둥 책을 좀 더 많이 읽고 싶다는 둥 겉도는 얘기만 했었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그림자와 같은 감정들을 많이 경험한 덕분에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극한의 감정과 지독한 외로움이 글을 쓰는 자양분이 된다는 건 글쓰는 이에게 축복일까요 불운일까요. 판타지와 같은 일이 제게도 일어난다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를 바꾸고 싶어질까요. 햇살같은 길만을 걸었어도 여전히 글쓰기를 갈망하는 삶을 살았을까요.

물감 2020-06-13 22:16   좋아요 2 | URL
결국 나비종님의 과거는 지금의 글을 쓰는 양분이 되었군요. 마치 가수들이 감정을 담아 부르기 위해 일부러 이별을 겪듯이요. 근데 저는 반대로 생각을 해봐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 내 감정이 다치고 슬퍼야만 하는가 하고요. 저도 사실 지난날의 아픔과 상처로 인해 더 성장하고 발전한 부분이 많이 있지만, 선택권이 있다면 그런 성장들 다 필요없으니 아프기 전으로 돌아갈래요. 그리고 좀 더 제자신을 아끼고 위할래요... ㅎㅎㅎ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며 살아온 게 후회가 되서요. 어차피 저나 나비종님같은 글쟁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어도 결국 독서하고 글쓰며 살았을꺼에요. 왕자가 옥상에서 보는 태양이나, 거지가 1층에서 보는 태양이나 다 똑같으니까요^^

나와같다면 2020-06-13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과거로 가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맺힌 한을 풀기 위해 가는 거다

그래서 모든 타임슬립은 안타까워요
그때 그랬더라면

물감 2020-06-13 22:19   좋아요 1 | URL
그때 그랬더라면. 맞아요.
산다는 건 언제나 후회만 남는 일방통행의 길을 걷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지금을, 오늘을 잘 지내야하는데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