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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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때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시험기간이 되면 공부만 빼고 모든 게 재미있어지는. 평소에 안 하던 딴짓 거리에 계속 몸이 가고 또 그게 그렇게 재밌을 수 없더라는 경험들이 다 있을 텐데 이건 뭐 커서도 변함이 없는갑다. 어쩌다 휴일이 생기면 오늘은 온종일 책만 읽어야겠다거나 밀린 서평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꼭 중간중간에 이런저런 잡일들을 하곤 한다. 특히 글 쓰는 작업은 끊임없이 창의성을 요구하는 일인데, 이 창의성은 두뇌가 휴식 중일 때에 회전이 더 잘 되는 법이라 종종 일부러 딴짓을 할 때도 많았지만 이번 독서는 진짜 집안일이 즐거워서 미치겠을 정도로 따분하고 괴로운 책이었다. 이번 글은 정말 아무런 도움도 안 될 테니 이쯤에서 뒤로 가기 버튼을 클릭하여 금 같은 시간을 아끼시길 권하겠다.


자살하려던 청년이 골동품 가게에서 신비한 나귀 가죽을 얻는다. 여기에 소원을 빌거나 욕망을 가지면 원대로 이루어지나 소유자의 수명이 줄어든다. 여튼 부귀영화를 얻게 된 그는 나귀 가죽이 줄어듦에 따라 자신의 생이 곧 끝날 거라는 노이로제에 빠져 허덕인다. 젊은 날에는 그렇게 죽고 싶어 하더니, 모든 걸 다 갖고 나니 죽기 싫어서 베개에 코 박고 찔찔 짜는 나날만 보내는 주인공. 역시 세상엔 공짜가 없으요.


하, 드디어 올게 왔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고전을 전혀 읽지 않았던 과거의 내가 가졌었던 선입견을 그대로 담고 있는 초강적의 작품이었다. 현재 나로서는 전혀 흡수가 불가한 책이라 이번 리뷰는 깔끔히 포기하고 그냥 하고 싶은 말만 주구장창 적겠다. 먼저 이 책은 특정 대상을 위함이 아닌 작가 자신을 위해 썼다는 인상을 받는다. 넘치는 방대한 지식과 번뇌와 통찰들을 기록하여 본인만의 유산으로 남기고 싶어 한 괴짜의 작품이랄까. 이 책이 재밌었다는 모든 분들을 내 진심으로 존경한다. 나름 불친절한 여러 책을 만나왔지만 이 책은 그중에 원탑이요, 어나더 레벨이었다. 내가 먼 훗날 온 세상을 통달하고 나면 다시 읽고서 누구든 쉽게 이해할만한 리뷰를 남겨보련다.


내 아직까지는 이 책보다 단어를 많이 사용한 책을 보지 못했다. 한 문장에 들어간 단어와 표현이 너무나도 많아서 소화가 안된다. 이 작품은 두세 줄 정도로 짧은 요약이 가능한 데에 비해 분량은 터무니없이 두껍고, 기승전결의 전개보다 주인공의 독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나 진짜 읽다가 정신착란에 빠질뻔했더랬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스킵 하면서 겨우겨우 읽었다. 독서모임만 아니었으면 초반에 덮었을, 나와는 전혀 상성이 안 맞는 넘사벽 책이다. 국어사전도 이보단 재밌겄으요.


자기 연민과 신세한탄으로 가득한 말들을 어쩜 그리 중복됨 없이 내뱉을 수 있는지 놀랍다면 놀라운 언변인데, 제발 엔간히 좀 하라는 친구의 조언에도 꿈쩍 않고 자신의 찌질함을 늘어놓는 주인공. 이제 겨우 이십 년 좀 넘게 살아놓고 뭐 그리 한이 많은지 무슨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팔십 대 노인처럼 굴어대는데, 그냥 궁시렁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동안 공부하며 알게 된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세상 참 부질없다를 읊조리고 있으니 보고 있노라면 피가 쭉쭉 마른다. 발자크도 지식의 저주에 갇힌 사람이었나? 도무지 적당히란 걸 모르는 사람이다. 3~4절만으로도 지겨운 노래를 99절까지 하시겠다? 이런 사람은 마취총이 답이다.


웬 서문이 처음부터 나와서 작품의 글로 저자의 인간성을 판단치 말라는 말을 어디 고대 문자처럼 영 못 알아먹을 말들로 장황하게 설명해서 돌아가실뻔했는데, 알고 보니 그 숨 막히게 답답하고 따분했던 서문이 차라리 작품보다 훨씬 읽을만했더라는 사실에 벽 잡고 공중제비를 돌 뻔했다. 그래 뭐 당시 배경과 분위기에 따라 사회의 이모저모를 비판하려는 것도 대강 알겠고, 작가가 생각하는 철학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것도 알겠으나 당최 파악이 안되는 중에 너무 많은 내용을 와르르 쏟아낸다는 생각이 안드심니꺼? 사백 페이지 넘게 이런 식이니 나 같은 쪼렙에 인내심 부족한 독자는 읽다 말고 자꾸 딴짓을 하게 되더란 말이다. 아니, 어느새 집안 대청소를 해부렀으요.


그나마 3부에 가서는 이야기라고 해줄 수는 있을 만큼의 전개가 나오지만 투 머치 토커의 루즈함은 여전했고, 무엇보다 한번 거부했던 내 머리는 끝까지 이 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았다.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책이라도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가지자는 편인데 이 책은 그렇지도 않았다. 인간관계에서도 한번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면 다시는 안 보는 나라서, 발자크도 다시 볼 일은 없을 듯. 위에서 말했듯이 내가 세상만사를 통달한다면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지. 아오, 써도 써도 끝이 안 나네. 이만 쓰련다. 님도 여기까지 읽느라 고생했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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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11-21 22: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집안 대청소를 하게 해준 고마운 책이네요 ㅋㅋㅋ 물감님 글이 재밌어요 ㅋㅋ 얼마나 힘드셨는지 팍 와닿네요. 발자크 책은 재미없기로 유명하다고 누가 쓰신 거 봤었는데.. 그말 그대로인가 봅니다. 다음 책은 재미난 걸로 고르세요~^^

물감 2021-11-21 22:24   좋아요 3 | URL
간만에 전투력 샘솟게 해준 책이었습니다ㅋㅋㅋ 아직도 할 말은 많은데 참기로 했어요ㅋㅋㅋ덕분에 집안 깨끗해지고 좋쿤요!!

청아 2021-11-21 2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물감님!!ㅋㅋㅋㅋ읽지 않은 책인데 느낌이 팍팍옵니다. 저 최근 ‘새버스의 극장‘읽으며 그런 투머치에 숨넘어갈뻔 했거든요.
너덜너덜해져서 깔 힘도,용기도 없어 대충 쓰고 말았는데 덕분에 묘한 대리만족. 지금 내리는 비처럼 속이 후련하네요ㅋ👍

물감 2021-11-21 22:26   좋아요 2 | URL
ㅋㅋㅋ과연 우리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즐겁게 읽었으려나요? 고구마 소설은 진짜 한국인과 안맞아요ㅋㅋㅋ이토록 칼을 갈면서 독서하기도 처음이에요...

페넬로페 2021-11-21 22: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점 적게 줄때의 최고의 리뷰는 물감님이 쓰신 글입니다. 재미 있으면서도 이해가 쏙쏙 갑니다. 안그래도 읽을 책이 많은데 걸러야 할 책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물감 2021-11-21 22:33   좋아요 2 | URL
아무런 도움이 안될 거라고 적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게 되었네요ㅋㅋㅋ여튼 올해의 워스트는 이 책입니다. 하하핳

새파랑 2021-11-21 22: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 단편집을 읽고나서 고리오 영감이랑 이 책을 읽어봐야지 했는데 좀 질질 늘어지는 느낌의 책인가 보네요 😅 그래도 완독하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물감 2021-11-21 23:10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은 그어떤 책도 냠냠 맛있게 읽으실 거 같아요ㅋㅋㅋ이 책도 꼭 읽어봐주세요😁

coolcat329 2021-11-23 22:42   좋아요 2 | URL
네~세 권 중 나귀가 제일 재미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이 책 좋네요. 그 특유의 넘쳐남을 미워할 수 없어서요 ㅎ

물감 2021-11-24 07:16   좋아요 1 | URL
쿨캣님, 보니까 이 책을 비평한건 또 저뿐이더라고요. 고로 이 책은 좋은 책이 맞습니다ㅎㅎ 제가 아직 레벨이 낮아서 그래요ㅜㅜ

scott 2021-11-22 00: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세기의 천재 발자크도
물감님에게 💥한개만 받음!ㅎㅎ

물감 2021-11-22 07:04   좋아요 2 | URL
이것이 바로 편협한 독서의 정석 아니겠습니까ㅎㅎㅎ

공쟝쟝 2021-11-23 18:4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닌건 아니라고 말하는 별점 자린고비 ㅋㅋㅋㅋ

물감 2023-01-31 17:23   좋아요 1 | URL
아 그럼그럼요 다 덤벼랏ㅋㅋㅋ

coolcat329 2021-11-23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물감님~글이 너무 재밌어요. ㅋㅋ웃었네요.
저도 이 책 1부는 좀 고생했는데 2부부터는 재밌었거든요. 물감님 아주 제대로 걸리셨군요. 😂
사실 발자크가 정말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이긴 해요.
귀족숭배병에 어린애같은 명예욕에 하여튼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자크는 적대감을 갖기엔 너무나 위대하다고 츠바이크가 말했으니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세요~~^^

물감 2021-11-24 07:27   좋아요 1 | URL
호평은 널렸으니 비평 한 개 정도는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ㅋㅋㅋ서문이 왜 있었는지 갑자기 알겠네요. 작품은 작품으로만 봐달라 이거군요. 여튼 이런 작가도 있구나,하고 넘기겠습니다🙂

나비종 2021-11-24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안일이 즐거워서 미치겠을 정도는 아니었지만ㅎㅎ 읽다 에너지 조금 충전하고 읽어야했던 책이었습니다. 읽기-분노-충전-다시 읽기-한숨-충전-다다시 읽기-체념-충전-읽기-주욱 읽기-가까스로 디엔드. 3주 가까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분노가 사그라들었나 그나마 별점을 후하게 줄 정도로 마음이 드넓어지더군요.

그러게요. 그렇게 죽고 싶어하더니 죽기 싫어 전정긍긍하는 변덕은 또 뭐래요. 역시 세상엔 공짜가 없습니다.ㅋㅋㅋ

‘드디어 올 게 왔다, 그중에 원탑, 어나더 레벨, 온 세상을 통달하고 나면, 정신착란에 빠질 뻔, 국어사전도 이보단 재밌겄으, 피가 죽죽 마른다, 지식의 저주에 갇힌, 마취총이 답, 고대 문자처럼 영 못 알아먹을 말들로, 서문이 차라리 작품보다, 벽 잡고 공중제비, 투 머치 토커의 루즈함‘ ㅋㅋㅋ 물감님 글의 매력이 불을 뿜다 못해 폭발하는 표현들입니다. 참담했던 심정이 다이렉트로 전달이 되는 걸 보니~^^ 고구마를 먹으면서 목이 막혔는데 물이 없어 꾸역꾸역 더 커다란 덩어리로 밀어넣으셨던 상황 같아서요.ㅎㅎ
번역자가 구사하는 어휘 자체가 어려워서 저도 수시로 낱말 뜻 찾아가면서 읽었습니다.^^

저도 인간관계에서 한 번 아니다 싶으면 대체로 다시 안보는 편인데 물감님도 그러시군요. 다시 찾고 싶은 작가가 아니긴 하지만 인생은 또 모르니까요.^^
수고하셨습니다. 오히려 리뷰 한 방으로 마음도 깔끔하게 청소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나름 카타르시스를ㅋㅋㅋ 별 점 한 개를 극복하신 의지력으로 이제 천하무적이되셨겠군요. 드럽게 재미없는 책들도 몽땅 독파할 수 있다!!! 오기만 해! 하지만 웬만하면 그냥 가던 길 가버려~ㅋ
내년에도 유쾌한 리뷰로 뵙겠습니다~^^*

물감 2021-11-24 20:46   좋아요 1 | URL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는 공감대만으로도 족합니다ㅎㅎ 아직은 제가 작품보는 눈이 없나봐요. 내년에는 좀더 내공을 쌓을 예정입니다. 슬슬 분권으로 된 작품들도 선정할까해요^^

저도 이렇게 신랄한 비평을 쓴건 처음이에요ㅋㅋㅋ별 한 개짜리도 완전 오랜만이고요. 덕분에 거침없고 신나게 쓸 수 있었습니다ㅋㅋㅋ저에겐 세상만사를 거부하고픈 욕망이 있다요!!ㅋㅋㅋ

올해의 마지막 모임이 끝났네요. 시간 참 빨라요. 역시 같이 읽으면 즐거워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나봐요ㅋㅋ아오 연말이라 그런지 점점 바빠져서 곧 과로사 하겄어요ㅜㅜ 각자 건강 잘 챙기고 내년에 또 인사나누겠습니다^^

꼬마요정 2021-12-02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앗 그렇군요.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전 아직도 앞에서 헤매다가 다른 책으로 갈아타고 늘 마음에 저거 읽어야 하는데… 이런 맘입니다. 한동안 그런 마음을 내려놓아도 되겠네요 ㅎㅎㅎ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동욱 참 멋져요 ㅎㅎㅎ

물감 2021-12-02 11:02   좋아요 1 | URL
어우 동지만나 기쁘네요 ㅎㅎㅎ 숨막혀 돌아가실뻔 했어요 ^^
안맞는 책 억지로 잡을 필요 없어요... 쏟아져 나오는게 책인데요 뭐 하하핳
이동욱 괜찮나요? ㅋㅋㅋㅋㅋ공유는 이제 보내줬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