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무튼, 문구 - 나는 작은 문구들의 힘을 믿는다 ㅣ 아무튼 시리즈 22
김규림 지음 / 위고 / 2019년 7월
평점 :
몰랐는데 얼마전 읽었던 '아무튼, 피트니스'와 같은 출판사에서 '아무튼' 시리즈로 발간된 책이었다. 피트니스와 문구 말고도 떡볶이, 요가, 하루키, 피아노, 비건, 술, 말하기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많이 나와있었다. 나도 나름대로 문구에 애착이 있는 사람이지만, 일부러 찾아읽은 건 아니었다. 가져간 책을 다 읽어서 비치용 도서를 기웃거리다 만났는데, 다음엔 내 취미나 취향에 더 가깝거나 궁금한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내겐 조금 가벼운 책이었다. 내용도 그렇지만, 타인의 개인적이고 단순한 취미생활에 대한 글은 책으로 읽기에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문(방)구'에 대한 애착과 열정은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고, 그런 특별함이 그녀를 성장시키고 지금까지 나아오게 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취미나 취향은 그리 어렵지 않은 건데 남보다 더 많이, 오래, 또 열정적으로 어느 한 가지를 '탐'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내겐 그런 특별한 즐거움이 뭐가 있을까, 다시 생각해보고 돌아보게 된 시간이었다.
내가 나와 나누는 대화를 기록하는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마주한다. 가장 솔직한 나의 감정을 일기를 쓰면서 알게 된다.
심각하게 고민을 써 내려간 페이지들은 다시 열어보면 열이면 아홉은 가벼워져 있다. 지치고 힘든 어떤 날 예전에 쓴 일기들을 읽으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위로를 해온다. 나름대로의 걱정과 고민을 짊어지고 있었던 그때의 내가 말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다 지나갈 거라고, 결국엔 다 가벼워질 것들이라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곧장 책상 앞에 앉는 나는 그 이상의 시간을 책상 앞에서 보내는 셈이다. 그러니 책상 위에 부지런히 사물들을 들여놓고 사용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결국 나의 삶을 가꾸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살뜰히 가꿔야겠다. 책상도, 나의 삶도.
크기도 색깔도 같은 노트를 사는 건데 뭐가 특별할까 싶어도, 왠지 모르게 매번 경건한 마음이 든다. 수백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내 인생의 책장에서 이제 막 한 권을 끝내고 또 다른 권으로 넘어가는 기분이랄까.
옛날 일기장을 펼쳐보며 과거의 내가 어딜 갔는지 누굴 만났는지 찾아보는것도, 당시에 했던 생각을 훔쳐보는 것도, 기록 스타일이 변한 것을 느끼고 신기해하는 것도, 옛 연애의기록을 보며 이불킥을 하는 것도 쌓인 일기장만이 안겨줄 수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표현할까 고심하며 설레거나 무엇을 쓸지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보다 다짜고짜 표현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그게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대부분 비효율적 시간들에 있다. 빨리 할 수 있는데도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한 것들.
이런 비효율성을 감내하는 건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걸 뜻한다(바쁠 땐 일력도 밀리고 시계도 멈춘다). 그래서 나는 내 일상 속에 항상 쓸데없는 일들이 조금씩 자리하고 있기를 바란다. 빠르게 움직이는 일상 속에 수고로운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다는 건 잘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기에.
오랜 시간 써서 나에게 꼭 맞는 형태로 만드는 것.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만들어나가는 것, 일방적으로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맞춰나가는 상대로서의 필기구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내가 도구를 길들이기도 하지만, 실은 내가 도구에 길들여지기도 한다.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
아는 것이 늘어갈수록 일상은 한층 더 풍성해진다. 매일 이렇게 무언가를 새로 알아갈 수 있어서 즐겁다.
나는 쓸데없는 것들의 힘을 믿는다. 생필품들은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지만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쓸모없는 물건들이다.
문구의 진짜 가치는 실용성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그러니 나도 더 이상 핑계 대지 않으려 한다. 예뻐서, 귀여워서, 써보고 싶어서, 그냥 사고 싶어서, 저걸 사면 오늘 하루가 더 나아질 것 같아서, 문구를 사고 싶은 이유는 실용적이라는 이유 말고도 너무나 많으니, 우리는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체크리스트와 플래너, 나는 결코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할 일을 종종 놓치곤 하는데, 덤벙대는 내 성격을 어느 정도 보완해주는 것이 체크리스트다. 출근하자마자 할 일들을 써놓고 하나하나 지우는 쾌감이 상당하다. 체크리스트 덕에 원래보다 1퍼센트 정도는 더 체계적인 인간이 되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대척점이 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서로가 서로를 대체할 수 없으니 꽤 좋은 공존이 아닐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했던 것, 다이어리 네다섯 권을 동시에 쓸 정도로 열정적으로 몰입했던 것이 스스로도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무언가에 푹 빠지는 건 성인이 되어서도 어려운 일인데 그 나이에 쉽게 쌓을 수 없는 취향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만들었으니 말이다.
손으로 쓴 데에서 나오는 독특한 손맛은 쉽게 따라 할 수 없다. 백 번을 써도 백 번 모두 다르고, 모든 글씨들에서 쓰는 사람의 성격과 감정이 느껴진다.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또 사랑스럽다.
조만간 사라질 물건에 대한 애틋함같은 게 갈수록 커진다. ‘그땐 이런 것도 있었는데‘ 하면서 이런 물건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았다고 추억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곧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에 불현듯 쓸쓸해진다.
기계로 만든 것들이 많아질수록 손으로 만든 핸드메이드의 가치는 오히려 더 커질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물건들 사이에서는 삐뚤빼뚤 고르기 않게 손으로 만든 것이 더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아마도 더 인간적이기 때문이겠지.
역시 좋아하는 것은 좋아한다고 시끄럽게 떠들고 볼 일이다.
그래, 취향이라고 해서 꼭 멋들어질 필요가 있나!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소한 것들로 행복과 만족을 찾아나가는 것도 충분히 즐거운 인생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