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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코필리아 -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올리버 색스 지음, 장호연 옮김, 김종성 감수 / 알마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중고등학교 시절.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당시에는 음악만이 유일한 안식처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빽판(원판을 복사한 판으로 조악하지만 그래도 들을만했다.)을 주로 사서 그것을 헤드폰을 끼고 밤 새워 들었다. 그 순간은 입시공부에 쪼들은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아니라 수많은 청중을 앞에 두고 미친듯이 연주하는 뮤지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심취했던 음악 중에서 지금도 곡조가 완벽하게 기억나는 것은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리냐드 스키냐드의 ‘프리버드’다. 특히 ‘프리버드’는 전자기타 4대가 동시에 뿜어내는 애드립으로 유명한 노래인데,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일반적인 록밴드는 리듬기타 하나, 리드 기타 하나로 연주하지만 리냐드 스키냐드는 3대의 전자기타로 연주했고, 더욱이 이 노래는 리드기타 하나가 더 추가되어 세 개가 각자 다른 음으로 애드립 연주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원을 마칠 때 갑자기 귀가 안 들리게 되어 그 다음부터는 음악을 듣지 못했다. 소리가 잘 안 들리는 상황에서 음악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었고, 보청기를 낀 상태에서는 음악을 들어봐야 예전처럼 정확하게 음색을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결국 천장이 넘는 백판을 다 버리고 그렇게 아끼던 기타, 드럼도 내다 버렸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노래는 1980년대 말까지다. 요즘 가끔 내 아이가 “아빠. 이 노래 알아?” 하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이 제목 자체를 처음 듣는 노래다.
내가 지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회사를 그만둔 다음부터 겪게 된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퇴사 후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하루 종일 보청기를 끼지 않아도 되니 자연스럽게 귀에 무리도 없고, 몸도 많이 편안했다. 게다가 하루 종일 확성기 같은 것을 끼고 따지고, 싸우고, 논쟁할 필요도 없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 삶인가.
나는 퇴사하고 6개월 쯤 지난 후, 큰 마음먹고 좋은 헤드폰을 하나 사 음악을 들어봤다. 그 동안 귀가 많이 편해졌기 때문이다. 근데 조금 창피한 일이지만 노래를 듣다말고 울어 버렸다. 헤드폰에서 들리는 소리, 볼륨을 최대한 키웠고, 귀도 많이 안정되었기 때문인지 오래 전에 듣던, 거의 원음에 가까운 음악 소리가 나를 감동시켰다. 가수의 고음 하나가 막혔던 혈관을 뚫어주는 것 같았고. 드럼의 베이스북 소리가 심장을 강하게 두들기는 듯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 이런 소리를 몇 십 년 동안이나 못 듣고 살았다니...“ 하는 탄식이 나왔다. 내가 아무리 음악을 좋아했더라도 그까짓 흘러간 유행가 몇 곡 들으면서 눈물까지 흘릴 줄은 몰랐다. 음악이란 것이 이토록 강렬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던 순간이다.
근데 그 후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밤에 자고 일어나면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잠에 취해 화장실 같다가, 내 방으로 가 컴퓨터를 부팅하고, 부엌에 가 커피 한잔 타서 다시 방으로 돌아와 마실 때까지도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는 채 계속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떤 때는 찬송가를, 어떤 때는 나훈아, 남진스타일의 뽕짝을, 어떤 때는 팝송을, 그리고 어떤 때는 몇 개 알지도 못하는 가곡이나 클래식음악이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잠에서 깨어 흥얼거리는 게 아니라 꿈속에서도 계속 노래 불렀던 것을 잠에서 깬 바람에 알게 된 것은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생각해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노래소리는 계속 들렸다. 마치 내 옆에 라디오가 켜 있는 것처럼 가수의 목소리, 반주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들렸다. 근데 희한한 것은 조금 늦게, 그러니까 아침 6시나 7시정도에 깨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흥얼거리는 모습은 이른 아침, 새벽 4~5시쯤에 깰 때만 생긴다.
‘이게 뭘까?’ ‘내가 왜 이러지? 혹시 정신병????’ 어떤 때는 그런 내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근데 그 이유를 이 책 <뮤지코필리아>에서 찾았다. 저자는 어느 날인가 음악과 관련된 꿈을 꾸었는데 그 때 들리던 음악소리가 하루 종일 계속 되었다고 한다. (나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 나는 몇 시간 그러다가 그만두는데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저자에게 그 노래를 흥얼거려 보라고 했고, 그 노래를 들은 친구는 저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최근에 어린 환자를 포기한 적 있어? 아니면 문학 책을 버렸거나?” 근데 놀라운 것은 저자에게 두 가지 일이 모두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 마음이 연주하는 곡은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야. 아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지.”
저자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랬다.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라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의 상황은 자신의 마음이 꿈속에서 전날 있었던 사건에 딱 어울리는 상징물을 정확하게 찾아내 이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친구가 그 상황을 해석한 순간, 음악이 사라졌다고 한다.
근데 저자가 나중에 알고 보니 저자와 같은 상황, 즉 꿈에 음악을 듣고 그 노래가 하루 종일 계속 들리거나 ,어느 순간 갑자기 소음도 아닌 완벽한 하나의 노래가 생생하게 생각나는 것과 같은 현상이 별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무척 많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나처럼 몇 시간 계속되다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몇 날, 몇 해 동안 그것도 하루 종일 쫓아다니는 바람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될 경우다. 심하면 'Off' 스위치가 없는 전축 하나를 갖다 놓은 것처럼 되어 잠도 이룰 수 없는 상황까지도 간다. 이것을 ‘환청’이라고 한다.
저자는 환청 때문에 고통을 겪는 한 부인의 증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녀의 환청이 정신병의 징후가 아니라 신경의 문제로 일어나는 것이며, 이른 바 ‘방출환각’이라고 대답했다. 청각 장애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입력을 차단당한 대뇌의 청각 피질 일부가 자발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대부분 그녀가 예전에 들었던 음악 기억으로 구성된 음악 환청의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뇌는 끊임없이 활발하게 활동할 필요가 있고, 청각이든 시각이든 정상적인 자극을 더 이상 받지 못하면 자체적으로 자극을 만들어 낸다.”
결국 청각장애니 소리가 단절된 상황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소리를 관장하는 뇌를 사용하지 않으면 인간의 뇌는 자기 스스로 이를 사용하려 하고, 그 결과 환청이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란젤 박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오랫동안 신경성 난청을 겪었습니다. 가족 내력이지요. 음악 환청 증세는 난청에 수반되는 감각 과민증과 관련되지 않나 싶습니다. 중추청각의 경로가 과하게 작동해서 소리를 증폭시키는 겁니다.”
결국 내가 퇴사 후 듣게 된 일종의 환청은 예전에 비해 청각신경의 사용을 줄임으로써 발생한 게 아닌가 싶다. 요즘은 과거처럼 무리하게 뭔가를 들으려 하지 않지 않고, 혼자 일할 때는 보청기도 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단순한 상상이나 정신병이 아니고, 실제 음악을 들을 때 사용하는 뇌가 자가 발전한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환청(일상생활을 못할 정도의 환청)이 생기면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하기 어렵다고 한다. 뇌가 움직이는 것이지만, 이들의 뇌는 모두 정상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이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뇌 활동 자체를 죽이는 방법밖에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 뇌를, 그것도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대뇌부분을 죽일 수 있겠는가.
정신과 의사 엔터니 스토어는 <음악과 마음>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부른 적도 없고, 어쩌면 원하지도 않았을 음악이 머릿속에 울려대는 것은 대체 무슨 목적 때문일까?”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해 “그런 음악이 대체로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고 결론지었다. 즉 “지루함을 달래고 몸동작을 한층 더 리드감 있게 만들어 주고 피로를 줄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들려오는 소리는 일종의 꿈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기에 당사자가 그냥 지나치거나 억누르고 말았을 생각을 다시 살펴보게 해 준다고 한다. 즉 자기 뜻과는 달리 들려오는 노래 소리는 논리나 이성으로 판단 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당사자에게 ’이로우며‘ 일종의 ’생물학적 적응‘이라는 것이다.
음악은 논리적이지 않다. 어떤 특정의 의미를 담고 있지도 않고, 색깔도 없다. 게다가 문자처럼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들으면서 자기 스스로가 느끼고 이해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음악만큼 인간의 감정과 밀접한 것도 없는 것 같다. 내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말보다는 리듬이고, 그것이 바로 음악이다.
나는 앞으로는 잠에서 깬 후 뭔가를 흥얼거리고 있으면 그 노래를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노래가 나에게 게시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당시 내가 모르는 내면의 어떤 감정을 나에게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